[목차]
꿈★의 조각들 :-) 2. 따라가는 삶과 찾아가는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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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점이 생긴 이유
꿈의 피라미드식 모형은 우리가 단계별로 특정한 필수적인 목표를 성취해야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식의 인생설계가 사회적 통념으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왜 위와 같은 맹점이 생기게 되었을까?
잘 생각해보자. 여러분이 가장 잘 안다.
바로 교육제도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제도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테크트리로 이어지고 있다.
마치 공장에서 제품이 조립라인을 통해 완성되는 것처럼,
사람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량생산을 하는 것이다.
이런 모양은 인생전체를 특정 테크트리를 짜서 전문화된 길을 밟아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그 이외의 길은 매우 위험한 것처럼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같은 나이에 하도록 시킨다.
즉, 일정한 과정을 follow를 열심히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그 교육제도 하에서, 여러분 주변의 선생님, 부모님, 언론매체 등등이 어서 목표설정을 하고 꿈을 위해서 살 것을 독촉한다. (여기서‘꿈=목표’니까..) 아직 좋아하는 것이 뭔지 감도 잡히지 않은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조급한 마음으로 어서 목표를 정하긴 하지만,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기에 가슴도 뛰지 않고 동기부여도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제도를 만들면서, 그 제도 자체가 가지는 맹점을 간과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만드는 이론의 한계다.
그런데 이것을 만든 사람들이 잘못된 것일까?
난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가 학생이던 70~80년대, 산업화 시대 때는 이런 방식이 통했고, 실제로 한국 사회의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때는 교육을 통해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인력을 빠른 속도로 공급했어야만 했었기에, 공장식 컨베이어 벨트식 교육을 통해 인재를 사회를 내보내야 했었다. 또한 성장을 위해 개인보다는 집단과 나라가 중요하던 시기여서 개인의 적성이나 기질보다는 당장에 국가가 필요한 것에 모든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필요한 일도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옷 만들기 등 정답이 정해져 있어서 방법을 배우고 열심히만 하면 되었던 것이었기에, 획일적인 교육도 통했다.
하지만 시대가 너무나도 많이 바뀌고 있다.
우선 자동화가 이루어져 대부분 인간이 단순노동으로 했던 일들을 이제 기계가 대체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제작이나 옷 제작 등의 대부분의 일을 기계가 대신한다. 복잡한 회계나 단순작업은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대신한다.
이제 사람이 요구되는 곳은 창의성이 필요한 곳이다.
현재 생겨나는 직업의 70%는 창의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며,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선 창의성이 필요하다.
간단하게 스마트폰을 예를 들어보자. 스마트폰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선 품질 좋은 핸드폰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웬만하면 다 엇비슷하게 한다.
어떻게 디자인을 하고 사용자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어떻게 어플들의 생태계를 잘 활성화할 것인가 등등 수많은 요소들을 창의성있게 고려해야 한다. 이런 시대에 단계적으로 교육을 따라 차곡차곡 공부하는 것은 단순지식을 늘리는 데에는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창의적인 경쟁력을 배우기는 쉽지 않다.
아는 것도 없는데..
내가 지금 26살이다. 지금 26살인데 내 주변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지 모른 채 방황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경제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뜨기도 했다.
“대학 4년생 절반, 진로 못 정해. 그 중 진로 못 정한 이유 중 50%는 좋아하는 것을 몰라서이기 때문”
생생한 자극을 위해 신문 기사 일부분을 붙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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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들은 부모님의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를 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달려오고 졸업이 되던 찰나, 문득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하려는 것이 과연 내가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못 정한 사람들 중 50%가 좋아하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데, 과연 진로를 정한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진로를 정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취직하는 사람 들 중 대부분이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성과 상관없이 취직부터 하고 본다.
이렇게 대학생도 여전히 진로문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데, 하물며 아직 세상 경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꿈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정진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은 아마 수학 과학 등 세상의 지식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한 학교 교육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축복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Follow(따라가는 삶) 대신?
그냥 성적을 잘 받기 위해 수학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직장에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그저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그 길의 끝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신없이 follow만 해서는 난 우리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체제 하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까?
열심히 따라가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간접답안이 있다.
30년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뭔가 되려고 해 왔습니다.
뭐든 잘하고, 테니스도 잘치고, 좋은 학점도 받고
모든걸 그런 관점으로 봤어요.
지금의 내가 여러 가지에 만능이라면
그건 내가 게임을 잘못했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왜냐하면 게임은
내가 이미 무엇이었는지를 찾는 것(find out)이었으니까요.
<영화 '시대정신' 중> |
그렇다. 우리는 ‘내가 이미 무엇이었는지를’ 찾아야 한다.
여기 사람들이 너무나도 이쁘고 멋있다는 옷이 있다.
사람들은 그 옷을 입으면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당신은 그 옷을 입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그 옷을 입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 옷의 사이즈는 90사이즈인데 당신은 100사이즈다. 그 옷은 쫄티가 되었다. 그런데 몸 사이즈가 110인 사람에게는 그 옷은 어떨까? 숨막히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이 막힌 채 하루하루 신음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지금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여러 가지 만능이고 follow에서 최고가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옷이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면?
그건 게임을 잘못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 몸의 사이즈를 알아야 한다.
‘내가 이미 무엇이었는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소중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다.
60억명의 사람이 있으면 60억명 모두가 다른 재능과 기질을 가지고 있다.
남들이 좋다고 말한 옷을 입기 위해 여러 가지에 만능이 될 필요가 없다.
90사이즈가 120사이즈를 입는다고 해서 무엇이 좋겠는가?
당신은 당신 자체가 어떤 존재인지 발견을 해야 한다. 즉, follow(따라가는 삶) 대신 find out(찾아가는 삶)을 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가슴이 뛰는지 계속해서 찾아나가야 한다.
김춘추의 꽃이라는 시가 있다. 이 때 남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한다. 난 이와 조금은 다른 말을 하고 싶다. 남이 이름을 자신의 불러주지 않아도, 이미 당신은 아름다운 꽃이었다고.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어떤 꽃인지 알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목표 중심으로 살라고 들어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목표 중심으로 살았을 때에는 목표를 달성을 했을 때의 쾌감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 후에는 다시 허망함이 밀려온다.
실제로 인생 대부분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과정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인생의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나가야 한다.
1999년 2월, 나는 오토바이로 미얀마의 광활한 황무지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곧 주저앉을 것
처럼 생긴 중국산 트럭에 30명 남짓 되는 승객들이 간신히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 범퍼 쪽에 앉
아 있던 젊은 스님이 내게 손짓을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토바이를 태워달라는 몸짓이다.
처럼 생긴 중국산 트럭에 30명 남짓 되는 승객들이 간신히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 범퍼 쪽에 앉
아 있던 젊은 스님이 내게 손짓을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토바이를 태워달라는 몸짓이다.
그 스님은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손동작으로 보아 나에게 멀리 있는 절에 데려다 달라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난 여행을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 100킬로미터쯤 되는 길을 몇 시간 동안 달리자 평평한 땅 위로 불쑥 솟은
바위산 위에 오래 된 사찰 하나가 서 있다. 햇빛에 바랜 승복을 입은 노스님이 사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나와 함께 온 젊은 스님이 마주보며 절을 한다.
"저분을 150킬로미터나 모시고 왔는데 제가 제대로 모시고 온 건지 모르겠네요?"
" 네, 그렇습니다. 제대로 모시고 오셨습니다. "
노스님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노스님이 주신 물을 마신 후 악수를 나눴다. 그것으로 할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그런데 오토바
이를 세워놓은 곳으로 갔더니 그 젊은 스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노스님이 주신 물을 마신 후 악수를 나눴다. 그것으로 할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그런데 오토바
이를 세워놓은 곳으로 갔더니 그 젊은 스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 분이 처음 만났던 곳으로 다시 데려다달랍니다."
노스님이 말했다.
"하지만 저더러 제대로 모셔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답니다.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중략)
결국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다시 출발한 우리는 사막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이글대는 붉은 태양이 사막 너머로 갈 길을 재촉하고, 저녁 노을에 물든 아이 야와디강은 눈이 부실 만큼 밝게 빛난다.
갑자기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졌다.
산사를 출발했을 때만 하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유일한 목표였는데,
이제는 이 여행을 접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랜디 코미사르, <승려와 수수께끼> 중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나가야 하는 것일까?
과정이 중요하다면, 과정에서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다음 칼럼에서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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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연재글을 남겼습니다.
사실 더 길게 썼는데 너무 길어져서 앞부분만 잘랐네요. ^^;
다음 칼럼을 기다려주세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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