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를  공부의신 이라 부른다. 나는 공신이라는 대학생 교육 봉사단체를 만들었고 공신닷컴이라는 회원수 20만 명의 공부법, 동기 부여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공신은 대한민국 최고의 봉사단체로 청와대의 매년 초대를 받고 있으며 공신닷컴은 정보통신윤리위윈회 청소년 권장 사이트로 등재된 서울형 사회적 기업이다.

 

공신 이후로 공부법이란장르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난 MBC에서 공부법 프로 MC를 맡으며 KBS 공부의신 드라마 공부법 자문으로 대본 작업에 참여 했다. 내가 썼던 공부법 책들은 중국과 대만에 수출되고 있고 1 365일 한 번이라도 만나 보려는 학생 학부모님이 줄을 섰다. 과연 얼마나 잘난 인간 이길래?왕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고 신이라 불리는 것일까? 오늘 난 내 과거에 대한 이야길 솔직히 해보려 한다. 이런 이야기, 가까운 공신 들에게도 해본 적이없다. 유쾌한 기억보다는 힘든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그야말로인생의 암흑기였다. 경상북도 점촌이란 시골 마을에 살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서울 화곡동에 전학을 오게 됐다. 새로 온 집은 시장 근처였는데, 논밭만 있던 곳에 살다 차들과 사람, 집들로 빼곡히 들어찬 동네에 오게 되니 모든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학교에 간 첫날부터 나는 완전히 쫄아 친구들에게 자기소개조차 하지 못했다. 난 원래 내성적이고 겁이 많았다. 덩치도 작았다. 그당시 주눅이 들기도 했었고 조금은 깍쟁이 같은 서울 친구을 만나니 말을 꺼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붙여진 내 별명은촌놈, 혹은 더러맨이었다. 까무잡잡하고 팔꿈치에는때가 껴있어서 더럽다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굉장히도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만만해 보였는 지 나중엔 싸움 잘하는 친구들에게 맞기 시작했다. 맞는 덴 별 이유가 없었다.  난 겁이 나서 화장실을 못 갔고 다른 건물 화장실을 쓸 때가 많았지만 그것도 왠지 쪽팔려서 못갈 때가 많았다.  어쩌다 급할 땐 쉬는 시간에 집까지 뛰어 갔다. 물론 수업 시간에 맞춰 들어올 수 없었고 선생님께서 뭐하다 왔냐 물어보시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집까지 부리나케 뛰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데 그건 지금이라서 그럴 수 있을 뿐이다. 그 당시엔 정말 미래가 없어 보였다. 학교 폭력이란 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을 절대 심각성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중학생이 된 뒤로 일산으로전학을 갔다. 일산은 전에 살던 동네완 달리 싸움도 적고 친구들도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 스스론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소극적이고 찌질했고 뭐하나 똑부러지게 하는 게 없었다. 별 존재감도 없어 학교에 왔는지 안왔는 지 잘 모를 학생이었다. 2 때 였다. 어느 날 반에서 가장 키크고 싸움 잘하는 친구와 눈이 교실에서 마주쳤다. 마침 그 친구는 담배로끊어 오른 가래를 바닥에 뱉으려던 찰나였는데 눈이 마주친 것이었고 그 친구는 입안에 한 가득 담겨 있던 침을 그대로 나에게 뱉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내얼굴로 그 침이 정확히 날아 왔고, 하필이면 그 순간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얼굴에 침을 뱉다니, 수업이고 뭐고 달려들어 주먹이라도 날렸어야 했다. 하지만 용기라곤 이제껏 살면서 가져보지도못한 나였다. 나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침을 손으로 닦고 그 상태 그대로 한 시간 동안 수업을 들었다.대들어 볼 생각조차 못했고 선생님께는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할 용기 조차도 없었다.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썩어 문들어지는 침 냄새를 지우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람 침이 이렇게 고약한 건 지는 그 때 처음 알았다.내 스스로가 불쌍했고 이런 놈을 자식이라고 애지 중지 하는 부모님이 불쌍했다. 이런식으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마저 했다. 난 너무도 달라지고 싶었다.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었고 단 하루라도 친구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가 되보고 싶었다. 그 순간 공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데신기하게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번져나갔다. 제대로 한 번 해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왜 하필 공부였냐? 공부를 잘하면 아무리 병신이고 찌질해도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3올라가기 전 방학, 공부라는 걸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해봤다.오기도 품었고 처음으로 독서실을 끊었는데 조용한 게 공부가 꽤나 잘 됐다. 학교와좀 먼 곳이라 친구들도 없었고 대부분 대학생, 직장인들만 있는 곳이었다. 가끔씩  독서실 근처 오락실가는 것 빼곤 혼자서 공부를 했다. 물론 한 번 가 앉으면 끝판까지 가니 좀 문제긴 했지만 그것 빼면 정말공부만 했다.  어떨 땐 시간을 아끼려고점심시간에 독서실 계단에서 햄버거를 사먹거나 과자 한 봉지로 때우기도 했다. 하지만 보람찼다.뭔가 내가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는 중3 첫 시험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반에서 2등을 했다. 반 배치 등수와는 다르게 생각지도 못한 학생이 떠오르니까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날부터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칭찬을 받게 되니까 교무실에 가는 게 즐거울 정도였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께 좋은 인상을주기도 하고 또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으니 학교 가는 게 신이 났다.

 

3내내 나는 그 기세를 이어가 우리 동네에서 공부 좀 한다는 공립고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특했고 대만족이었다. 이제 노는 일만 남았다. 남들 고등학교 예습한다고 할 때 난 정말 신나게 놀았고 입학 후엔 학교생활에 적응도 잘해서 친구들과도 많이 사귀고 학생회,동아리 활동을 즐겼다. 학교 다니는 게 행복했다.

 

다만 약간의 고민은 공부였다. 중학교 공부는 벼락치기로 하면 거의 한대로 나왔는데 고등학교 공부는 어렵기도 어려웠고 나름 열심히 해도달라지는 게 없었다. 내신은 범위가 너무 많았고 모의고사는 정말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진 빠지게 모의고사 시험을 보긴 보는 데 봐도 결과는 형편 없었다. 풀 때는 맞는 것 같은데막상 채점하면 영 딴판이었다. 1, 2가 끝나가는데도 반에서 중간 정도, 그 상태에서 달라지는 게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은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성적은 잘 나왔다. 나와는 반대인 아이들이었다.

 

답답한 건 친구들은 나를거의1등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야자시간도 땡땡이 치지 않고 수업시간도 절대 조는 일 없이수업을 꼿꼿이 들으니 그럴만도 했다. 수업시간에 항상 깨어있는 나를 보고 내 필기를 빌려가는 친구들도 많았지만성적은 대부분 그 아이들이 더 좋았다. 축하는 해줬지만 힘이 빠졌다. 급기야는 한 과목에서 50점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당시 내신 부풀리기로 100점 받는 애들이 수두룩 했는데 나는 공부를 해도 그냥 그 자리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역시나는 머리가 나빠. 부모님께서  못해줘서 그래. 우리 집안엔 왜 대학 나온 사람한 명 없는 거지. 난 왜 물어볼 형도 없지. 우리 집 차는 왜 고작 프라이드에 그것도 중고차를 타고 다니나.  별별 탓을 다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싫고 미웠다. 부모님과말 섞는 것 자체가 싫었고 집에 오면 짜증을 안내는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없이 좌절하고있을 무렵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내가 형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 답답했던 만큼 동생에겐내가 겪은 막막함을 물려주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날부터 노트를 마련해서 공부하면서 도움될 만한 내용들을 상세히 적었다. 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였다. 짐작했겠지만난 다른 건 몰라도 어릴 적부터 동생 하나는 끔찍히 아끼는 형이었다.

 

과목별 공부법, 공부할 때 태도 마음가짐부터 자극받을 수 있는 문구까지. 항상 이노트가 옆에 있었는데 나중엔 이게 습관이 되어 내 나름대로 이런 저런 방법들을 시도 해보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나가게 되었다. 이 노트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에게 내가 해줄 수 잇는 가장 좋은 선물 중에 하나일 꺼라 생각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효율적인방법들은 모두 적었다. 사실 그 당시엔 그게 공부법이라고 불릴 만한 것인지도몰랐다. 공신닷컴 같은 사이트도 없으니 그저 전부 내가 직접 해보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식이었다.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이런 시도를 하고 방법들을 찾아가며 나에게맞는 공부법을 찾게 된 이후로 공부가 잘 되기 시작했다. 전보다 23배 이상 공부가 잘 됨을 느꼈다.

 

가끔은 머리가 팽팽 돌며  풀가동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였다.내가 왜 진작 이런 식으로 공부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었다. 그 후회 때문에라도더 공부해야 했다. 3 내내 난 공부하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공부할 수 있을 지 항상 생각했고 실천했다. 시험 볼 때마다 적용해보고 반성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고다음 시험에 적용해 나갔다.

 

어쩌면 나는 이 노트덕분에내가 원하는 대학에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나 뿐 만 아니라 그 노트에 적힌 공부법덕분에 내 동생도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나는 줄곧 교육 봉사를 해왔는데,봉사를 좋아하거나 사회를 바꿔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같이 힘들어하고 헤매는 학생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대 이후 나는 내가학생들에게 조언해줬던 공부법과 동기부여에 대한 조언을 모든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공부법이란 것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란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방학을 이용해 공부법 강의를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자 했는데 사이트 이름을 고민하다가 누구나 공부를 신나게하길 바라는 뜻으로 공신이라 지었다. 처음엔 공부의 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 공부라는 것이 진절나게도 힘들었기 때문에후배들은 이 공부법을 통해 공부를 신나게하길 바라는 뜻이었다.

 

동생과 같이 쓰던 기숙사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공신은 이후 공부의 신으로 와전되었고 지금은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1:1로 멘토링을 하고 학습법 컨텐츠와 동기부여 컨텐츠를 전파하는 서울형 사회적 기업으로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밤낮으로뛰고 있다. 2011년이 들어서며 공신에서 활동한 대학생이 300명이넘어 섰다. 공신에서 도움을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다시 공신이 되어 그 선배와 함께 교육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피할 수없는 고통이면 차라리 그것을 즐겨라.’ ‘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니까.’  해병대에서 뼈저리게 배운 이 말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중에 하나다. 사람을 가장 크게 성장시키는 것은 안정이라기 보다 역경이라는 뜻이다. 아직 살아온 날이 길지도 않지만 돌이켜 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나마 지금 내가있기 까지 나를 잘되게 해주었던 것은 사교육도 아니었고 잘난 머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괴롭혔던 친구들덕분이 었고 열심히 해도 나오지 않던성적 때문이었다.

 

 

열등하기 짝이 없는 나도공신이 되지 않았는가? 여러분이 지금부터 마음을 먹고 제대로 시작한다면 아마여러분은 나 같은 사람보다는 몇 배는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는가?일단 반드시 뭔가를 해내겠다는 마음부터 먹어라.

 

물론 지금 여러분에게많은 고난과 좌절이 있을 거라 믿는다. 내가 겪었던 것 이상으로 혹은 비슷한 어려움을느낄 것이며 공부라는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게도 단 한순간도 공부란 게 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께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바로 그것이, 그 고난들이 결국 여러분을 성장하게 하는 가장 큰 보약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부디 좌절하지않길 바란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큰 꿈을 가져라. 고작 대한민국이란 작은 나라에 입시 따위로 좌절하긴 여러분이 너무 아깝다. 어린 시절 가졌던꿈을 다시 꺼내고 세계를 호령할 인물이 될 준비를 지금부터 시작하자. 여러분은 절대 나약하지 않고 또한 이겨낼 힘도 충분히 있다. 그리고 여러분 곁엔 공신 선배들이 함께할 것이니까. 최소한, 이 찌질했던 공신 선배 한 명 만큼은 여러분을 믿고 박수를 쳐 줄 것이니까.

 


자신 있으신가요?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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