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 수능 직전에 그렇게 상태가 나빴는데 왜 성적이 잘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일까. 혹은 지난 1년간의 노력이 진실로 멋진 것이고 노력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기에? 학평의 모의평가에서 성적이 잘 나왔던 건 믿을만하지만, 그 뒤에 내가 치렀던 사설 모의고사는 형편없었고 거기서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도 하나도 믿을 게 못 되는 것일까? 

 솔직한 개인적 생각으로는 아마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신문에 나오는 학생처럼 국영수를 교과서 위주로 예습복습 철저히 공부한 탓이고 사실은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노력 없이 단지 운만으로 뭔가를 얻고 잃는다는 건 별 의미없는 일이지만, 가끔은 운이란 게 사람 인생에 있어서 꽤 큰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애매한 문제 한두 개 맞춘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반적인 수능 출제 양상은, 내가 자신있었던 언어와 외국어가 다소 어렵게 나오고 수학이 쉽게 나온 건 천운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또한 불행히도 그 운이란 게 실제로 있다면 약간의 아쉬움을 내게 남기기는 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거창한 해피엔딩은 못 된다. 나는 이 오르비 옵티머스라는, 7년 전에는 존재 여부도 몰랐던 사이트를 발견하고는 뭐 대단한 것이라도 찾아낸 양 생각했고 거기서 나오는 입시 관련 정보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으리라 철썩같이 믿었다. M모 사이트 같은 다른 곳의 유료 예상 서비스가 훨씬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음에도, 그리고 부모님 역시 그쪽을 믿는 게 훨씬 낫다고 내게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나는 싸우고 또 싸워서 과감히 상향지원을 했다. 

 재수는 있을 수 없으니 최대한 하향해서 가군 나군 넣고 혹시 모르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다군까지도 하향지원하자는 부모님의 말에 말 그대로 신경질을 냈던 것이다. 운 좀 붙어서 시험 하나 잘 치고 나니 뭐든지 문제없을 것 같았다. 성적 잘 나왔으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어디든 넣어도 문제없이 붙을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과욕이었고 내 자신의 희망에 내가 취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뭔가에 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최초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에야 나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2월 말까지 추가합격 통보가 오기를 기다리며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내가 가고 싶던 대학을 가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른 말 잘 들으면...으로 시작하는 속담이 아주 빈 말은 아닌가 보다. 안 들어서 손해본 게 입시 관련해서만 벌써 두 번째니까.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도 후회할 일은 얼마든 많다. 조금만 원서를 더 하향해서 넣었더라면, 수능의 그 수학문제에서 검산 한 번만 더 했더라면, 재수할 때 3월달부터 국사와 제2외국어를 했더라면, 군대 갔다와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졸업하려고 노력했더라면, 아니 대학 1학년 때 술먹고 놀러다니지 말고 공부를 했더라면, 점수 맞춰 아무 대학이나 등록하지 말고 바로 재수를 했더라면, 자연계가 아닌 인문계를 선택했더라면...이러다가는 젖먹던 시절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밤을 새우고 새워 방구석에 앉아 후회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랄 것이다. 아무리 아쉽고 후회되더라도,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 넘어가면 안 되는 무언가, 더 이상 후회하면 안 되는, 결국은 포기하고 깔끔히 잊어야만 순간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재수를 시작하면서 그 순간을 정했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튼 다행히도 다른 원서는 합격했고, 이전에 다니던 K대학보다는 평가가 좀 낮지만 그래도 인문계 자연계 차이를 고려하면 그닥 큰 차이없다고 할 만한 한 대학에는 장학금까지 받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디 붙었다고 말하자 친구가 "이번 수능 잘 쳤다며?"하고 반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속쓰리지만, 최소한 수능 성적 얼마와 맞바꾼 대가로 돈 걱정 덜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꽤 큰 의미가 있다. 원래 썼던 원서가 붙었더라도 어쩌면 진지하게 고려했을지 모를 옵션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 뿐이라고. 

 물론 단지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 위해 7년이란 시간을 낭비한 것은 분명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도록 내 발목을 잡고 손해를 끼칠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다. 남들이 앞으로 뛰어가는 동안 혼자 뒤로 갔으면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죽을둥 살둥 달려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리 행운 불운 핑계를 대봐야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가 내 공과 내 과로 인한 것이고,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일 뿐이다. 어쨌건 일이 결정난 지금은 후회하지 말아야 할 순간이 드디어 되고야 말았다. 




 2011년 3월의 서울. 27살 늦깎이 대학 1학년생에게도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봄이 왔다. 외모만 보고도 진작에 신입생 아닐 거라 지레 짐작하고 동아리 가입 권유 팜플렛 한 장 내게 주지 않는 2, 3학년 학생들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조잘대며 오가는 캠퍼스를 몇 번이고 걸어 보았다. 

 이 3월은 누군가에게는 닭장 같은 고등학교 교실이나 재수학원에서의 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개강파티가 즐거운 대학교 첫 경험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취업 스펙을 만들기 위해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로 밤을 지새는 날의 연속일 것이다. 혹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건, 인턴생활, 과외, 알바, 뭘 하건...이 글을 읽고 있는 이 땅 이 나라 위의 젊은이들 누구나에게 자신만의 사연으로,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짜증과, 희망과 좌절과 또 그 모든 것으로 점철된 수많은 길고긴 이야기가, 지나간 과거와 지나갈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현재 역시 매 순간순간마다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줍잖게 들리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뒤에 드리운 과거가 맘에 안 든다고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진 미래가 어두워 보인다고 미리 앞서 절망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치열하게 살자고 말이다. 최소한 타임머신은 아직 아무도 못 만들었지 않은가.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건투를 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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