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집 살 돈조차 없는 형편. 와 닿기 어려운 이 말이 조기 졸업을 해야만 했던 이유였다. 보통 조기 졸업은 민사고, 과학고 출신에 엄청난 선행 학습을 한 받은 친구들에게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는 정확히 반대였다. 일반고였고 선행은 커녕 학교 말곤 기댈 곳조차 없었다. 인간의 의지와 극한 상황은 불가능한일까지 가능하게 만든다. 내 눈은 점점 기숙사 소등 이후에도 글씨를 읽을 수 있게 적응이 되어 갔고 6과목을 단 두 번의 방학 동안 마스터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가난에 부모님을 탓하고 가난이 싫어 게임만 했던 뚱보가 지금은 카이스트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실패할 이유만큼이나 성공할 이유 역시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실패란 생각이 들어 좌절의 눈물을 흘릴지라도, 먼 훗날 그것은 성공의 씨앗이 되어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외로웠던 경험이 있었기에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기에 돈의 소중함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날 내가 힘들게 공부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여러분에게 조언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그 모든 것은 나를 힘들게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야말로 나를 이루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홈쇼핑 광고를 보던 소년, 외로움과 친구가 되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주로 보았던 것은 홈쇼핑 광고였다. 늦은 밤에도 나는 혼자 집을 켰다. 조그만 음식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누나도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밤늦도록 부모님과 누나를 기다렸다. TV 정규 방송은 이미 끝났고, 당시에는 케이블 방송도 제대로 안 깔려 있었기 때문에 내가 부모님과 누나를 기다리며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오락은 TV 홈쇼핑 광고 보기였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면 지쳐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누군가를 홀로 기다린다는 것에 익숙해졌다. 점점 외로움이라는 것과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소외감에 익숙해졌다. 나는 이 세상의 주변인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홈쇼핑만 보고 있던 나에는 새로운 할 일이 생겼다. 학원을 다니게 된 것이다. 영어가 부족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영어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님은 흔쾌히 학원에 보내주셨다. 하지만 학원비 납부일만 되면 부모님은 까먹었다며 나중에 내겠다는 말씀만 하셨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만, 얼마 안 되어 그 이유를 이해했다. 학원이란 곳은 돈이 없는 나 같은 학생을 반겨주는 곳이 아니었다. 늘 학원비 독촉에 시달렸고 결국 나는 얼마 안 되어 학원을 그만두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홈쇼핑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집에 있는 시간 동안 거의 하루 종일 게임을 했다. 잠을 자다가도 몰래 일어나서 게임을 했고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게임을 했다. 당시에 나는 지금보다 더 작은 키에, 몸무게는 20kg나 더 나갔다. 성격은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해 갔고 자신감도 점점 잃어만 갔다. 나에게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렇게 크게, 혹은 작게 인생에 패배라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학원 교육이나 과외를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은 외로웠고 항상 박탈감만이 가득했다. 언제나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남들 다 하는 외식도 한번 해보지 못했다. 가족끼리 여행을 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친구들이 “너는 학원도 안 가고 놀 수 있어서 좋겠다.”라고 말할 때마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나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나를 실패하게 할 이유인 것만 같았다. 나는 점점 그렇게 스스로를 포기해 갔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가정 형편, 조기 졸업만이 살 길

그렇게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목표 대학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다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점수가 높은 대학을 적어서 냈다. 절반 정도가 서울대를 목표로 한다고 했고 그 외에는 거의 고려대, 연세대를 적어 냈다. 당시 나는 포항공대를 적어서 냈다. 흔히 카이스트, 포항공대, 서울공대를 국내 최고의 공대라고 하기에 그중 하나를 고른 것이다. 당시에 나는 일반고에서 카이스트를 간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었고, 서울대는 마냥 높아 보였다. 그나마 포항공대가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선택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어찌됐든 그때부터 나의 입시 목표는 포항공대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듣지 않았으면 좋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언제 집이 경매로 넘어갈지 모르고, 당장 내일이라도 쫓겨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밤중에 문틈 사이로 흘러 들어온 부모님의 낮은 목소리에 나는 정말 멍하니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전까지 집안 경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들은 적이 없었다. 세상은 이 작은 공간마저도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친척으로부터 우연히 얻어 온 컴퓨터를 분해했다. 그 컴퓨터는 오래되어 거의 폐기 처분해야 할 수준이었는데 혹시라도 좋은 부품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어머니께서 오셔서 나에게 물으셨다.

 

“좋은 컴퓨터가 사고 싶니?”

“아니요.”

“엄마가 미안해...... 그런 것도 못 사주고......”

“괜찮아요.”

“엄마도 잘해 주고 싶은데 그게 어렵다.”

“뭘요.”

“어제 이야기 다 들었니?”

“......”

“엄마가 미안해......”

“......”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컴퓨터를 만지작거렸지만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하필 나한테만… 세상은 왜 이렇게 잔인할까….

곧 나는 고2 조기 졸업에 포항공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포항공대에 입학하면 전액장학금을 받아 전혀 학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였다. 그리고 조기 졸업을 하면 고등학교에서도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이상 고등학교를 다니며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가정 형편이 견뎌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2 조기 졸업을 목표로 본격적인 공부에 돌입했다.

 

불도 켜지 않고 몰래 공부해야 했던 시간들

나의 입시 준비는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반드시 학비 면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나에게 더 이상의 미래는 없었다.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대학 입시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처음으로 치른 내신 시험 결과는 포항공대를 목표로 하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일반고에서 포항공대를 고2 조기 졸업으로 가기 위해선 전교 1~2등의 성적을 유지해야 했지만 중간고사 결과 나는 50등 밖의 성적을 받고 말았다.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그 등수로는 포항공대에 가기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다. 나의 각오, 다짐이 모두 헛되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 정도 각오를 하고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 그렇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한 번 실패한다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이후로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포항공대 수학과 학생 박주홍이다.’

도서관 책상에 이렇게 써 붙였다. 나를 자극할 것이 필요했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 글귀를 보았다. “네가 포항공대에 갈 수 있다고?” 하며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 오기가 생겼다. 반드시 성공해보이겠다고. 내 삶에 더 이상 우울하고 힘든 날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믿을 것은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 반드시 이뤄내고 싶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거의 매일 새벽 4시가 넘도록 공부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숙사에서 새벽 1시부터 야간 점등을 실시하였다. 기숙사생들이 너무 늦게까지 공부해서 수업 시간에 존다는 이유로 밤에 무조건 불을 끄기로 한 것이다. 기숙사 독서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갑자기 공부할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새벽 1시에 야간 점등을 하면 방에서 자는 척하다가 몰래 독서실로 나와 홀로 공부를 했다. 사감님께서 가끔 확인하러 오시기 때문에 스탠드도 켤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나는 멍하니 눈이 어둠속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그렇게 잠자코 있으면 동공이 점점 커지면서 희미하지만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필로 빼곡히 적은 문제 풀이까지는 볼 수가 없었지만 나는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가끔은 캄캄한 독서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서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달려야 했다.

 

카이스트를 목표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다

그렇게 1학년 1학기가 지나고 첫 번째 여름 방학이 되자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 책의 또 다른 저자인 공신 멤버 ‘변진우’와 친해졌는데 당시 진우는 고2 조기 졸업에 KAIST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는 진우의 영향으로 KAIST도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KAIST, 포항공대 두 곳을 목표로 삼고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KAIST, 포항공대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학, 과학의 경우 고등학교 전 과정을 심화 공부해야 했다. 심층 면접이 이뤄지는 고2 10월 전까지 고등학교 수학, 과학 전 교과를 공부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새로운 목표를 세운 시점은 7월 중순이니 대략 1년 2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단 수학은 3개의 심화 과목 중 ‘미분과 적분’을 골랐다. 과학의 경우 물리, 화학, 생물 3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나는 이 문제로 한동안 고민했다. 확실히 물리를 좋아했고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물리는 천재들의 학문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과학고 물리 천재들 사이에서 내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렇지만 다른 과목이라고 만만한 것도 아니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물리를 선택했다. 곧 계획에 윤곽이 잡혔다. 당시 나는 수학 10-가만을 공부한 상태였다. 면접 전까지 10-나, 수1, 수2, 미분과 적분, 물리1, 물리2 이렇게 6권을 추가로 독파해야 했다. 고1 여름 방학과 2학기, 겨울 방학 그리고 고2 1학기와 여름 방학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학기 중에는 최대한 내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계획에서 제외했다. 고2 여름 방학 역시 본격적으로 면접을 준비해야 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계획에서 제외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6권의 책을 두 번의 방학 동안 모두 공부해야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감당이 안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맨땅의 헤딩, 나만의 항아리 공부법 개발

실제로 공부 계획을 세우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사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독학으로 해야 했다. 공부 계획, 공부법 모두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특단의 방법이 필요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더욱이 주변에 KAIST나 포항공대로 진학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지도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적으로 인터넷 정보에만 의존해야 했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다 보니 고민만 점점 깊어져갔다. 지금도 나의 일기장을 보면 당시 내가 고민하던 공부 계획이나 공부법에 대한 흔적이 끊임없이 나온다. 하루에 한번씩, 길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공부법에 관한 내용을 일기에 적었다. ‘이 책을 써야한다, 저 책을 써야 한다’,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저렇게 공부해야 한다.’라는 식의 내용을 빼곡히 일기에 적어놓았다. 이렇게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느 정도 나만의 공부법이 생겼다. 지금은 ‘항아리 공부법’이라는 부르는 방법이다. 공부법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고 하자. 물을 어떻게 붓더라도 물은 항아리의 밑바닥부터 차오른다. 이것은 모든 만물의 이치다. 공부라는 것도 똑같아서, 결국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공부할 때, 가장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가며 난이도를 점점 올려갔다. 한 권의 책 안에는 각 단원이 있고 단원마다 난이도가 낮은 것부터 높은 것까지 존재한다. 보통 한 단원을 모두 다 끝낸 후에야 다음 단원 공부를 들어가지만 그러다 보면 첫 단원의 고난이도 부분에서 막혀 공부에 지치게 되는 것. 첫 단원부터 마지막 단원까지 쉬운 난이도 부분부터 쭉 살핀 후 다시 책의 제일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내용을 공부하는 식, 이것이 바로 나만의 항아리 공부법이었다. 이 방법을 통해 여름 방학 동안 10-나, 수1을 공부했고 겨울 방학이 끝날 때까지 수2, 미분과 적분, 물리1, 물리2를 모두 공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부법을 스스로 만들며 공부를 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빨리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수학, 과학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2학기 때 전교 석차가 100위권 가까이로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좀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다. 그동안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져 요금 미납으로 전화가 끊어지거나, 부모님의 신용카드가 정지되어 문제집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욱 의지를 불태웠다. 아버지께서는 다리를 다치시고도 당신의 치료비로는 돈을 쓰지 않고 오히려 불편한 다리로 학교까지 걸어와 나에게 문제집을 사다 주셨다. 주먹을 불끈 쥐고 공부했다. 결국 나는 졸업 직전에는 전교 2등까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3개의 전공을 가진 욕심 많은 카이스트 학생

이후 면접시험에서 나는 당당히 KAIST와 포항공대를 고2 조기 졸업 전형으로 합격하였다. 졸업할 당시 학교에서 걸어준 플래카드에는 KAIST에도 나의 이름이 있었고 포항공대에도 나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걸 보자 웃기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 나는 KAIST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욕심이 많아서 전공을 3개나 하고 있고 동아리 활동도 놓치지 않고 하고 있다. 대학에 입학해서 공연도 해보고 학교의 지원으로 해외 컨퍼런스에도 참가해 보았다. 방학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인턴도 하고 있고 꿈에만 그리던 연구도 직접 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때 다짐했던 대로 학생들을 위해 글도 쓰고 강연도 하며 멘토가 되어주고 있다.

여러분이 내 수기를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덮는 것으로 선배들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리고 여러분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멋지게, 그 누구보다 감동적인 여러분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당신이란 이름으로 기억될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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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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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일반전형 식물생산산림과학부군. 불합격.

2005년, 2월 1일. 그해 가장 추운 겨울날이었다.

인터넷 창에 나타난 이 반갑지 않은 글자들은,

이번 해에 수능을 한번 더 보라는, 그러한 받아들이기 힘든 의미를 나에게 전달해주었다.

재수다.

수능을 한번 더 봐야한다.

현역 때 죽어도 하기 싫다던 재수를 결국 하게 되었다.


440대 초반의 점수로는 역시 무리였던 것일까.

수능 전날 그 미칠듯한 초조함에 한번 더 떨어야 할 것이고, 수번의 모의고사를 다시 한번 봐야한다.

기출문제도 다시 풀어봐야 하고, 교과서도 처음부터 다시 봐야한다.

11월 17일 이후로 공부와는 인연을 끊었었기 때문에, 머리는 완전히 굳어있었다.

불규칙적인 생활 패턴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어서 몸 또한 많이 망가진 상태였었다.

타락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합격 발표가 난 다음날, 강남대성학원에 유시험을 보러갔지만 당연하게도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2차 모집 때, 노량진 대성학원 무시험전형으로 넣어서 대성학원 자연4반으로 배정되게 되었다.




2월 17일에 개강을 시작으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초반 학원 생활은 암울, 그 자체였다.

80명정도 되는 학생들을 좁디 좁은 교실에 몰아넣었는데, 뒤에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대화도 웃음도 없었다.

서로의 눈에는 재수생의 패배의식이 묻어 있었다.

점심시간의 화장실은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어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살고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 1달간은 정말 암울하게 보냈다. 재수는 쉽게 결심해서는 안된다.


정말 많은 눈물을 참아야 하고, 수많은 아픔들은 마음 속으로 삭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재수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사회에서, 나를 보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인생은 고독한 것이고 혼자라는 것. 인내와 끈기.






3월 2일. 눈이 많이 내리던 날에, 나는 학원에 지각을 했다.

그리고 같은 날, 서울대학교의 입학식이 있었다.


천국과 지옥처럼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상황에서, 나는 이를 악물며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며 치열하게 공부를 해나갔다.

다음은 3월 6일에 썼던 일기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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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생의 하루는 바쁘게 시작됩니다.

아침 7시 50분까지 교실로 들어가야 하므로,
이곳 등촌동에서는 6시 20분 정도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터질듯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한손에는 도시락통을 든,
이 키 작은 학생은 의심할 바 없이 죄수생입니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집니다.
-마치, 제가 재수생이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듯이, 다같이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한 반의 인원은 80명입니다.

3학년 때 교실보다 약간 더 큰 이 교실에 어떻게 80명이 들어가서 수업을 받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책상은 다닥다닥 붙어있어 뒤쪽에서 앞으로 나가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쉬는 시간에는 돌아다닐 수가 없어,
쉬고 싶을 때에는 그냥 책상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거나 잠을 자야 합니다.

노량진의 , 시멘트와 철골로 둘러싸인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이 건물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저는, 저희는 공부만 하고 지냅니다. 말할 친구도 없습니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사회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 떨어지지 않고, 턱걸이로 붙었더라면, 군대갔다오고, 졸업할 때가 되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사회는 무섭습니다.

아무도 이 어린 청년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오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몇시간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 곁을 떠나면 , 고등학교를 갖 졸업한 저는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학원에서는 항상 배가 고픕니다.

이곳은 전쟁터이고, 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몸이 아나 봅니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은 어찌나 맛있던지...


재수를 처음 시작할 때, 이것은 인간이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너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 재수를 통해서 참..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대학을 제가 만약 합격했더라면, 수능이 끝난 후 나태했던 그 모습 그대로 대학에 지니고 갔을것입니다.

하지만 재수를 함으로써 다시 원래의 서형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더 겸손한 태도로,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시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잃어버렸던 저의 열정도 되찾았습니다.

화장실 갈적과 나올적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신이 힘들었던 시기가 다 지나면 그때의 생생한 열망을 잊기 쉽습니다.

어느정도 그 느낌을 피상적으로 상기시킬 수는 있어도, 그 느낌을 다시 완전히 느끼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전 다시 공부를 시작함으로 인해서 고등학교 때 느꼈던 그 감정들, 열정과 꿈들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부법, 인생의 목표들, 두발자유화 등....


공부를 하다보면 고등학교 때의 추억이 떠올라 혼자 싱긋 웃어봅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 같습니다.

시련이 와도 그 추억이 있으므로 모 시인의 시구처럼 희망처럼 그날을 기다리며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 마음속으로 이렇게 노래가사를 읊조리며 다시 펜을 잡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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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이 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반 친구들과 하나 둘씩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은 서로서로 알게되고 친해지면서 반 분위기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학원과도 친숙해졌다. 자율적인 자습 분위기와 뛰어난 선생님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대성학원에서는, 모의고사를 본 후에, 문이과로 나눠서, 학원 전체 1등부터 100등까지의 이름과 출신고등학교를 게시판에 붙였다.

이를 흔히 빌보드라고 부르는데, 학생들은 빌보드에 붙는 것을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이는 학생들 서로간의 공부 욕구를 더 높여주었다.







학원 생활에 익숙해진 어느 하루는, 친한 친구 한명과 야간 자율학습을 안하고, 피시방에서 스타를 했다.

피시방에서 정신없이 3시간 정도 게임을 한 뒤에, 친구와 헤어지고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서, 겉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몸에서는 피시방에서 밴 담배냄새가 났고, 오늘 학원에서 선생님께서 내준 숙제들이 생각이 났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다가는 삼수를 할지도 모른다. 재수도 이정도로 끔찍한데 삼수는 더할 것이다.  


집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나는 속으로 펑펑 울었다.

담배냄새가 나는 옷과 함께 나는 그렇게 헛되이 보낸 그날 하루를 후회했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한 후, 난 굳은 결심을 했다. 고3 때처럼 공부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 똑같은 절차를 밟을 것이고, 결과는 제자리가 되거나 약간 상승할 것이다.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같이 공부해선 안된다. 재수를 하는 동안에 나는 인내를 배워야 한다.




4월달까지 단 한번도 야간 자율학습 (야자) 를 빼먹지 않고 모두 하기로 결심했다.

걸핏하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집으로 가곤 했던 고3때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한 결심이었다.

몇일동안은 별 문제없이 그 결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아침에 머리를 감고 말리지 않은 탓인지, 감기에 걸렸다.

감기는 고3 때도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 중에 하나였다.

수업시간에는 너무나도 아팠지만 그냥 오기로 버텨내었다.

야자가 시작된 후에는 증상이 더욱 심각해졌다. 콧물이 자꾸 흘러서 코가 헐고 쓰라렸다. 머리에서는 열이 났다. 너무나도 괴로웠다. 약을 먹었으나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머리가 아펐다. 몸은 정말 지칠대로 지쳤다. 어리석고 감상적이었던, 어린청년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때, 집에가는 것은 나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게되면 삼수다. 빈 자습실로 가서 책상위에 그냥 쓰러져 버렸다.

언젠간 이렇게 약을 먹고, 먼지쌓인 교실에서 아픈 채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몸은 펄펄 끓는 듯했다.


난 내 자신과 싸웠다. 고독의 끝에서 혼자 나는 싸웠다. 여기서 지면 나는 끝장이다.
하면서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3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몸은 홀가분했다. 방금 전에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열들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기분좋은 땀이 나를 적셔주고 있었다.







그 날을 고비로, 나는 4월달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야간자율학습을 나왔다.

수능 공부를 할 때, 이렇게 자신을 절제하는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은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 기간 동안의 공부로, 모의고사 성적이 급상승 했다는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빠른 사람들은 이미 예상을 했을 것이다.




3월달의 대성 월례고사 때의 성적은 노량진 대성 이과 2800명 정도중에서 350등 정도였지만, 4월 모의고사 때는 150등 정도를 했다.

특히나 수학 100, 영어100, 과학탐구 180점을 맞으므로, 수외과 성적으로 학원 전체에서 16등을 하고, 전국에서는 300등 안에 들 수 있었다.  




재수하는 동안에, 나는 나의 공부법에 원칙을 세웠다.

첫째로 '반복', 둘째로 '집중'.

그 두가지를 원칙으로,
학원 수업시간에 배우는 교재를 반복하고(반복), 학원 수업시간의 내용을 철저히 복습하면서, 그 때 배운 내용들 만이라도 모두 흡수하겠다는 것(집중)이 나의 생각이었다.

다방면의 책에 손을 뻐쳐서 공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의 책을 배우더라도, 집중해서 제대로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습득했던 공부법이 '원칙주의' 공부법이었다면, 재수하는 동안에 깨달은 공부법은 '실전주의' 공부법이었다. (두 가지 공부법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교집합과 연관성은 가지고 있다.)

난 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법에 관한 책을 30권 이상 읽었고, 공부법 강의도 거의 다 찾아서 보았다.

그것에서 쌓은 데이타베이스와 내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들, 그리고 주위 친구들의 공부하는 법을 참고해서 2월 말부터, 내가 깨달은 공부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바른공부법'을 써 나갔다.

토요일 밤에 장장 6시간에 걸쳐서 쉬지 않고 써서 바른공부법 초판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난 그 공부법을 주말마다 그것을 수정해나가고 추가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4월 초에 어느정도 틀이 잡혔다.

그리 대단한 공부법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냥 나의 공부법을 정리할 수 있어서, 나 자신이 만족했다.





4월 5일, 식목일날에, 오르비(www.orbi7.com) 학습동에 공부법을 올렸다.

공부법을 올리게 된 직접적 이유는, 내가 겪은 시행착오의 길을 사람들이 걷지 않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르비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도 많기에, 바른 공부법이 많은 반대에 부딪혀 비추천을 받고 삭제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정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올린 글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만족이라는 생각에 그냥 올렸다.

샤워를 하고와서 반응을 살피기 위해 글을 보니, 리플은 30개가 넘게 있었고 추천수는 10이 넘게 올라가 있었다.

불과 20분 남짓한 시간에 생긴 일이었다. 예상 외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계속 그것을 지켜보면 공부를 못할 것 같아서, 옷을 갈아입고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서 자습을 하는 중에도 내 신경은 온통 온라인글에 쏠려있었지만 말이다.


집에 와서 글을 보니, 나도 놀랄 정도의 반응이었다.  리플수는 100개를 훌쩍 넘어있었으며, 추천수 또한 80이 넘어 있었다.



그 글은 오르비 최초로 게시된 당일날 특별학습동으로 이동한 글이 되었다.



내 아이디(로보트)에 수십통의  쪽지가 왔고, 그 쪽지에 답변을 하느라 장장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쪽지를 보내면서, 내가 이렇게 조언을 해줄 자격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은 내가 마치 대학생인 것처럼 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재수생인지 몰랐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약하고, 불안감에 떠는 존재인데...

그래도 내 입장에서, 최대한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모두 해 주었다.

답장을 받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면서, 재수시작 처음으로 행복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쪽지 또는 이메일이 왔고, 그에 대해 정성껏 답변해 주었다.

5월달이 되고, 반 친구들과 거의 다 친해지게 되면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나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색을 했고, 친구들과 종종 노래방에도 갔다.
반 친구들끼리 모여서 축구도 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공부의 끈은 놓지 않고, 일정한 공부량은 어느정도 해나갔다. 공부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많이 놀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삶을 유지해나간 시간이었다.




6월이 되고, 옆자리에 앉은 한 여자애와 친해졌다. 성격도 좋고, 얼굴도 이쁜 친구였다.
서로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고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냥 좋았다.
주로 내가 그 친구를 놀리면서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놀렸던 것이 그 친구에게 정말 큰 상처가 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다.

학원에 가는 것이 행복했고, 생각만 해도 좋았다.

어쩌면,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재수생활의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 버렸긴 했지만 말이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집중은 되지 않았다.





6월 한달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모르는 기간이었다.

6월 모의고사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는 표현이 적절할듯 싶다.
KICE시험도, 대성모의고사도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후 내가 그 친구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뒤로 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지금은 공부를 해야할 때라는 마음도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7월부터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학원 정문에는 '7,8월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다.





7월달까지는 수능의 기본을 쌓는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2월부터 복습하고 반복해온 학원교재를, 1학기가 끝나는 7월에 최종적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대성초이스' 수1,수2 문제집은 다 합해서 7번 정도를 다시 보았다.


풀 때도 그냥 기계적으로 풀지 않았고, 어떤 원리를 이용하고, 어떤 단원과 복합적으로 연결이 되는지 관찰하며 풀어나갔다.

계산실수로라도 틀린 문제는 무조건 틀린 문제로 간주하고 반성을 많이 했다.

지겹진 않았다.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공부에서 재미를 찾은 것이다.  

이런 과정속에서 쌓은 밑바탕은 수능에서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최상위권으로 가는 길에 특별함은 없다.
우리가 알고있는 평범함, 즉 우직한 공부 노력, 반복이 바로 최상위권으로 가는 길이다.
고통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려면 어느정도 이상의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인생의 무지개를 보기 위해서는 비를 맞아야 한다.



영어와 언어는 매일 지문을 보고 분석해보았다.
급하게 많은 문제를 풀려하지 않았고, 지문을 분석하는 능력을 키워나갔다.

난 학원 수업을 그냥 듣지 않았다.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대충 듣는 수업은 아무것도 없었다. 앉아서 졸더라도 잠은 절대로 일부러 자지 않았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자습시간이 되면, 의무적으로, 그날 배웠던 것을 꼼꼼히 복습했다.
배웠던 것은 이미 아는 것이라서 지겹게 느껴졌었만, 인내심을 가지고 복습을 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1주일간 배운 내용을 다시한번 복습을 했다.
복습과 숙제, 어느정도의 예습을 끝내고 남는 시간에는, 내 나름대로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이 나름대로의 계획이란, 예전에 배웠던 것을 반복학습하는 것이다.

매일매일의 수업내용을 복습을 하면서 나가더라도, 사람의 뇌는 시간이 지나면 옛날에 공부했던 부분을 망각해버리기 때문에, 다시한번 공부를 해둬야 그 부분을 기억할 수 있다.

학원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고작해야 10일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막판에 힘을 내기 위하여 몸을 재충전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편안히 공부했다. 평균 6시간정도 자습을 한 것 같다.
나머지 시간에는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거나, 장기를 두거나, 책을 읽었다.

2005년 사상 최고기온을 기록한 날에 축구도 했었다.  



그 때, 친구관계가 얽혀서 고민도 많이 했었다.
누구나 대인관계에 관한 고민은 했을 것이다.  난 나에게 문제점이 있는 것을 알고, 고쳐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 10일동안은 재수생활 중, 가장 인간적으로 살았던 기간같다.



그리고 개학을 하고 학원 2학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개강날에는 고려대학교 수시모집 시험을 보러 갔다.
언어논술(요약)과 수리논술은 주말마다 틈틈히 수업을 통해서 준비를 해왔으며, 글쓰기에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합격은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실력발휘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150:1 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이었으니, 사실 합격은 애시당초 힘들었다.

하지만 시험시간 동안에 나는 정말 '원없이' 쓰고싶은 말을 썼다.

최선을 다한 시험이었고, 떨어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사실 합격에 대해 조금 기대를 해서, 타격이 어느정도는 있었지만 말이다.




8월 월례고사 때에는 58등을 해서 빌보드에 올라보기도 했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만족을 했다.






정신없는 8월달을 흘려보내고, 9월달이 되니 다들 마음을 잡고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학원에 오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작년 학교에 있었을 때는, 이맘때쯤 친구들끼리 서로 친해져서 툭하면 놀러 나가고 했었지만,


학원 사람들은 인생의 쓴 맛을 보아서 그러는지 몰라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나 또한 한번 실패를 해봤으므로, 이 기간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9월 KICE 모의평가 시험을 보고, 수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KICE문제는 역시 좋았고, 지금까지 본 모의고사 문제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연결 포인트를 잡아서 복합문제를 내고, 기발한 발상의 신유형 문제도 많았다.

특히나 언어영역 문제는 논리가 딱딱 맞아 떨어졌고, 모든 문제에 대한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묻는 내용은 철저히 고등학교 과정 내에서 출제되었고, 일반 수능 문제집에서 찾을 수 있는 익숙한 문제유형들도 많았다.

수능은 알 수 없는 낯선 시험이 아니라,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은 시험임을 알 수 있었다.







8월부터 9월까지는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공부'를 한다는 측면에서 보다는,

'맞추는 연습'을 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 싶다.

나는 유난히 실수를 많이했기 때문이다.

모의고사를 조사해보면, 틀리는 문제의 80% 이상이 실수였다.
사실, 실수라는 표현은 옳지 못한 것 같다. '착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 하다.



그 실수들을 분석해본 결과, 내가 기본내용을 잘못 공부했해서 틀렸거나, 글자를 잘못 읽거나 부주의해서 틀렸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실수가 실력이었다.

문제들을 풀면서, 아는 것이라도 확실히 맞추는 연습을 해나갔다. 그러면서 점점 틀리는 문제수는 줄어나갔다.




9월달 이후로의 시간은 정말 후회없이 보냈다.  

앞으로 수능때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없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수능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고,  이 시간을 후회없이 보내고 싶다'

난 모든 찰나를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컴퓨터는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거의하지 않았고, 학원에 다녀오면 취약점이었던 영어듣기를 했다.

매일을 규칙적으로 살았다. 자율학습은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러던 중, 10월 모의고사 전날 감기에 걸렸다.

10월 모의고사 때는 콧물과 휴지의 기억밖에 남지 않는다.

문제가 나를 풀었는지, 내가 문제를 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당연히 성적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불안했다.



수능도 이렇게 되면 어떻하나....







그러나 결국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단지 컨디션 때문이라 생각했다.





모의고사 성적은 한편으로는 신경을 써야하고, 한편으로는 신경을 쓰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전자는, 모의고사를 잘 보지 못한 이유가 현재까지의 자신의 나태함 때문이라면 , 이를 채찍의 방편으로 여기라는 뜻이다.


후자는, 모의고사 성적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자꾸 바꾸어 나가지 말라는 말이다.
중간에 계획을 관두면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다.

모의고사가 잘 나왔다고 해서 자만하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7월달까지 나의 물리성적은 30점대 초반이었다.

수학 또한 80점을 웃돌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난 나를 믿고, 모의고사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해서 계획을 실행해나가서 수능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10월달 부터는 실전연습을 해나갔다.  

반에서 친한 누나와 같이 시간을 재면서 실전모의고사를 풀어나갔다.

음료수 내기를 했는데, 먹을 것이 걸려있으니 긴장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시간이 다되면, 서로 바꿔서 채점하면서,

이긴 사람은 승리자의 기쁨을 누렸고 진 사람은 패배의 쓰라림을 느꼈다.



그러한 실전 연습의 과정에서, 시험 집중력을 키워나갔다.





학생들은 시험을 보게 되면, 저절로 집중을 하게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능시험같은 중요한 시험 때에도, 집중을 제대로 못하는 학생들은 많다.

시험 집중력 또한 연습을 통해서 키워나가야 한다.  

서로 모의고사를 푸는 것은, 정말 좋은 추억이 된 것 같다.

그 누나와는 지금도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수능이 가까워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해한다. 전국1등이라고 해서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불안의 정도가 개인마다 조금씩 다를 뿐이지, 수능이 가까워지면 다들 불안해한다.



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실전모의고사를 풀어서 점수가 약간 삐끗하더라도 난 불안해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적인 나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난 자기암시를 걸었다.


'난 수능을 잘본다'

'난 할 수 있다'

'이번엔 잘본다'

'난 실전에 강한 사람이다'


이러한 어구를 일기장에 매일 써나갔고, 틈틈히 쉬는 시간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 불안감은 서서히 내 마음에서 멀어졌고,

자신감이란 것이 내 마음속 한켠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11월 모의고사 또한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성적은 남은 기간동안 나를 견고하게 다뤄준 '죽비'가 되었다.










시험이 2주정도 남은 어느날, 학원의 언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시험 못본 것을 자책하지 말아라. 앞으로 2주는 너희들의 모든 것이 달린 시간이다.

남은 2주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목숨을 걸고 싸워라."  






이 말에 나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어쩌면 이번 수능에서 고득점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선생님 덕분일지도 모른다.



사실 남은 2주는 다들 어느정도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해이해지기 쉬운 때이다.

친구들은 많이 친해져서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는 컨디션 관리할 때라고 하면서 공부에는 손을 놓는 친구들도 몇몇 있었다.

시험을 보러 집으로 내려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대성학원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난 이 때 마지막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1분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정리는, 이상하게도 정리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들 투성이였다.

이 부분을 하면 저 부분이 모르는 것 같고, 그 부분을 공부하면 다시 모르는 것이 생겨났다.




주로 주말에는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쭉 보았다.

역시 세부적인 부분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이 많았다.



평일에는 모의고사를 풀어나가면서,

내가 틀렸거나, 풀면서 애매했던 문제들을 확인하고,

그 해당단원에 찾아가서 다시 확인을 했다.  






마지막 2주는 그렇게 정말 정신없이 공부를 했다.






컨디션 관리는 특별히 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원래 해오던대로 하는 것이 컨디션 관리라 생각한다.

괜히 특별하게 잠을 더 자는 것은 생활 리듬을 깨버릴 수 있다.

수능 날짜가 다가오더라도, 그냥 난 평상시의 흐름을 유지하고 공부를 해나갔다.

주말에도 하루종일 학원에서 자습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 수능이 다음날로 다가왔다.











11.22. 화요일

6시 30분 정도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단 영어의 감을 살리기 위해,  

9월 모의평가 외국어 영역 지문을 다시보았다.

모의평가 지문은 역시 Introduction, Topic, Support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수능은 이렇게 출제되는구나....하는 마인드를 다시한번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다.

문제가 깔끔하고 좋았다. 답이 딱딱 맞아 떨어졌다. 애매한 문제는 없었다.  

10시부터 학교에서 수험표 발급이 있기에 9시 50분정도에 학교로 나갔다.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다.
1년만에 본 친구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나서 깨달은것 하나. 다들 늙어있었다.


그들의 노화를 슬퍼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나 또한 늙어있었다.



아아, 젊음은 거기 남아있어라.

망가진 피부와 하며 언발란스한 나의 헤어스타일
(사실, 수능보기 몇일전에 앞머리가 자꾸 신경쓰여서 앞머리만 잘랐다.)




1년간의 재수생활은 모두에게 힘겨웠던 것이다.






수험표를 발급받는, 진로상담실로 가보니 그곳은 n수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단, n은 2이상의 자연수이다. )

그 많은 인파속에서 힘들게 수험표 교환권을 내고 가까스로 수험표와 수능지침안내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수능 수험표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작년과 똑같은 모양의, 사진만 바뀐 수험표. 바뀐것이 없었다.

더이상 익숙해지면 안되는데...이것이 마지막이길 바랬다.




학교는 대일고로 배정되었다. 대일고라면 우리집 바로 옆이라서 좋아했다. 이제 내일이다.


내일이면 수능준비도 끝인 것이다.

내일 수능이 끝나면, TV도 마음껏 볼 수 있고 잠도 마음껏 잘 수 있다.  

더이상 좁디좁은 강의실에 앉아서 졸음을 참으며 필기를 해나갈 필요도 없다.

예비소집을 끝내고 와서 작년 언어영역 문제를 풀어봤다. 문제들이 논리가 있고 답이 딱딱 떨어졌다.

그리고 과학탐구를 영역별로 모의고사를 한회씩 풀어봤다. 수능을 보는 것같이 집중해서 풀어봤다.

혹자는 수능 전에는 모의고사를 풀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모의고사 점수에 영향을 받아 심리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해서 한 말이다.

점수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면 풀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여태까지 배웠던 것들을 쭉 읽어보고, 정리노트도 읽어나갔다.

8시 반정도가 되니 봐야할 것을 모두 보게 되었다.

2006년 수능을 대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냥 침대에 앉아서 1시간을 보냈다.

뭔 생각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나서 경건히 몸을 씻고 잘 준비를 했다. 10시정도에 잠자리에 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11시 45분에 일어났다. 1시간 45분 낮잠(?)을 잔 셈이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안된다. 자야되는데.....


누워서 30분동안 자려고 노력했다. 눈은 말똥말똥 깨어있었다.




어머니께서 잠을 재우기 위해서 신경안정제와 포도주를 먹었다.
포도주를 먹으니 몸이 뜨거워졌다. 얼굴도 뜨거워졌다. 누가 포도주를 먹으면 잠이 잘 온다 했던가.

혈액순환이 너무 좋아져서 뇌혈압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몸이 완전 흥분이 되었고 잠은 안오지 미칠 지경이었다.  






난 떨고 있었다.

별 생각을 다했다.

이러다가 잠 못보고 시험장에 가서 망치는것 아닌가. 삼수하는것 아닌가.  




정말 많이참고 열심히 했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전 이번 시험에 대비해 최선을 다해왔고

평생동안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적이 없습니다.










지난 1년간, 후회는 없었습니다.








제 능력 안에서는 최선을 다할테니





제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저의 보통의 실력만 발휘하게 해줄

그러한 여건만 마련해주십시오.  








부디 부탁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한번만...

딱 한번만..

제발 이번만이라도






저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난 일생동안 가장 절실하고도 간절한


기도를 했다.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깬 상태였는지.


그러한 반 혼수상태로,

나는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수능날의 아침을 기다렸다.









11.23.수요일.

6시 반정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을 푹 잔지는 못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대일고등학교로 걸어갔다.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뒤쪽 산길을 통해서 걸어갔다.

내가 재수하는 동안에 가장 고생하신 사람들은 바로 나의 가족들이었다.



정말 말 못할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것이다.

장남인 아들이 재수하면서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그러한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실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중에 난 대일고 앞에 와 있었다.

시험을 잘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부모님께 다지고, 난 그렇게 홀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인생은 고독하다.

결국은 혼자다.

인생은 결국 혼자인 것이다.

혼자 절정의 끝에서 싸워야 할 순간이 있다.

내가 결정해야할 그런 순간이 있다.


이번엔 아니다.

이번엔 잘본다.

반드시 잘본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운명이란건 정해져 있지 않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적 개념일 뿐이다.

고로 미래는 없다. 현재만 있을 뿐이다.

현재만 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교시 종이 울리고 언어영역이 시작되었다.

듣기문제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문들을 쭉 훑어보았다.

대부분 아는 지문이라서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이상하게 너무 쉬웠다.

쉬우니 나는 오히려 불안해했다. 어려워야지 변별력이 있는데,.. 마지막에 2문제가 남았다.

답은 결정해놨는데 왠지 불안했다.

종료 1분을 남기고 2문제를 모두 고쳤는데, 결과적으로는 둘다 틀려버렸다.


그순간, 내 언어영역 백분위는 폭락한 것이다.

1교시가 끝나고 다들 쉬웠다는 소리를 했다.




"30분 남았다"
"이런적 처음이다"

초조했다.





2교시 수리영역.

9월 모의평가 때 수리가형과 나형의 표준점수 차이가 많이 났으므로, 가형은 더욱 어렵게 낼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다른 아이들은 쉬운 언어영역 때문에 조금 들떠있는 것 같았다.

수리영역을 한 7번쯤 풀어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이건 내가 알던 수리영역이 아니었다. 어려웠다.

잠시 잘못 생각하면 완전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그와 동시에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재학생들은 죽었구나.'



주관식으로 넘어가니까 재수를 한 나도 난생 처음보는 문제들이 나왔다.

그래도 각 단원의 개념을 생각하며 차근차근 접근하니 풀렸다.  
 

미분과 적분에서는 주관식 30번을 결국 못풀었다.


찍으려니까 참 암담했다. 12로 찍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답은 11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문제가 정말로 아깝다. 좀더 침착했어야 하는건데........




수리영역이 끝나니 다들 죽을듯한 인상들이었다. 학생들이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난 좌절을 해봤자 지금은 늦었다는 생각에, 일단 밥을 재빨리 먹고 잠부터 자기 위해서 자리에 누었다.

자려고 하는 도중에 계속 수리영역 문제가 생각나고 불안했다.



난 나를 믿었다.


"어려웠지만, 잘했을 것을 믿는다. 점수여, 부탁한다."




잠을 자진 못했지만, 그래도 힘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3교시 외국어 영역은 듣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듣기.

1년동안 그렇게 연습해왔던 듣기.

작년 그 악몽의 여자성우가 생각이났다.

처음에 잘 나가다가, 9번정도를 가는데 긴장때문에 숫자계산 부분을 못들었다.

1550달런가 1400달런가



초조해졌다. 땀이 줄줄 흘렀다. 한문제에 대학이 몇개가 달려있는데........




하지만 그 순간 '그래. 이건 버리고 남은거나 잘하자' 라고 생각하고 다시 집중에 들어갔다.

듣기를 다하고 지문을 읽어나갔다.

9월 평가원과 체감난이도가 비슷했다.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다 풀고 시간이 15분정도 남았다. 듣기 9번은 4번에 있는 것밖에 듣지 못했기에, 4번으로 찍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것은 정답이었다.



나이스.
무난하게 3교시가 끝났다.  










 

 



이제 과탐만 보면 끝난다.

과탐만 보면 끝이다.

이제 수능이 끝나는 것이다.

쉬는 시간에 친구를 만났다.

어찌 그리 반가웠던지..

지난 재수생활을 회고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생많았다.. "

웃으면서 서로 잘보라고 하면서 4교시 준비를 위해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젠 허리가 아파왔다.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과학탐구를 풀어나갔다.


물리1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 푸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능 물리는 역시 계산은 하나도 없었다.  

원리, 이해만 묻는 문제였다.



화학1은 거의 다 교과서의 소재가 나와서 놀랐다.

수능 2주전에 화1 교과서를 꼼꼼히 살펴본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에 3점짜리 한 문제를 고쳤는데, 이는 보기좋게 틀려버렸다.





생물1은 정말 열심히 공부해뒀기에, 편하게 풀었다.  

생식기 문제는 당황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라 틀렸지만 나머지는 다 맞출 수 있었다.

 




화학2는 문제집엔 없지만, 교과서에 있는 실험이나 소재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다.

난이도는 예상했던 대로 높았다. 역대 화2 문제중 난이도 최고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틀린 것을 발견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고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화학2 20번의 마킹을 끝냤을 때의 홀가분함과 해방감이란.

작년에 끝날 때 느낀 그 암울함과 대조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끝났구나.....




학교를 나서는 길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너무 기뻐서 부둥켜 안았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한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렇게 인내하면서 살아본 적도 없었다.




그 시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고,

지나가는 중 만나는 사소한 모든 의미들은, 그 순간에 맞닿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남모르게 혼자 삭혀야 했던 정말 힘들었던 시간들은,

그 지나간 시간들은

이제 재수생의 비참한 현실로 각인되는 기억이 아닌 내 꿈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던 추억으로 남겨진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


 

 

 

 


 

 

 


 

 

그렇게 수능이 끝난 후,

원서는 인하대학교 의예과, 서울대 전기컴퓨터 공학부, 한림대학교 의예과, KAIST를 썼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가군에 경희대학교 한의예과나 한양대학교 의예과를 넣었으면 합격할 수 있던 점수였다.

(두곳 다 점수가 예상처럼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목표는 서울대 전기공학부였기 때문에, 다른 곳은 위험하게 원서를 쓰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면접준비는 약 2주전부터 했다.


학원을 다니다가, 수업이 맞지 않아서 혼자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고, 도서관에 가서 하루 평균 3시간 정도 했다.

화학은 하이탑으로 공부를 했고, 수학은 심층면접 문제집을 사서 공부를 했다.

수학은 포항공대와 서울대의 기출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면접은 1월 18일에 있었다.

점수가 어느정도 남았기 때문에, 면접은 평균적으로만 봐도 붙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큰 부담은 없었다.







2006년 1월 18일 날이 밝았다.

오전은 화학, 오후는 수학이었다. 화학 순번은 마지막에서 세 번째였다.

같은 학원 친구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목에 자신이 누군지를 알리는 목걸이(?)를 걸고, 1조부터 10조가 함께 나가서 면접을 봤다.

잠을 4시간밖에 자지 못했기 때문에, 잠을 보충하려고 1시간 정도 자리에 누워있었다.

긴장이 돼서 잠이 안오자, 그냥 집에서 갖고온 하이탑 3권을 봤다.

3시간 정도 기다린 다음에 내 차례가 왔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긴장감이 거의 다 풀린 상태였지만, 목걸이를 걸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난 할 수 있다. 난 서울대학교에 합격한다.’하고 자기암시를 하면서 시험장으로 갔다.



시험장이 따로 마련되어있을줄 알았는데, 복도에 있는 책상에서 푸는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황당했다.


책상에 앉고 시험지를 받고, 시험지와 대면한 순간. 난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화학 면접문제인데 ‘시’가 나와있었던 것이다. 무슨 언어영역도 아니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시를 읽어나가는 도중, 별 거 아닌 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1번문제를 풀어나가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용어가 생소했다.

하지만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5번 문제까지 막힘없이 잘 나가다가, 반응식을 완성시키는 대목에서 헷갈려서, 시간을 모두 소모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면접실로 들어갔다. 교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내가 푼 것은 최대한 빠르게 설명했다.


힌트를 얻고, 푸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3분정도만에 내가 푼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 있었고, 5번문제는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풀 수 있었다.


6번문제는 시간이 모자라서 손도 대지 못했다.


아쉬웠다.

끝나고 나와보니,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농생대에 지원한 누나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전화를 해보니, 이미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묘한 실망감(?)을 느끼며 공대 식당에서 밥을 혼자 먹었다.


기독교 동아리 선배님께서 길을 안내해 주셔서 고마웠다.




밥은 혼자 먹고 , 못푼 문제는 자꾸 생각나고...머리가 복잡했다.

거의 좌절모드였다.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화학 문제가 상당히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괜찮아. 평균정도는 봤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다시 마음을 잡았다.

점심을 다 먹고, 학부모 대기실의 빈 자리에 가서 낮잠을 잤다.

옆에서 떠들어서 잠을 잘 수는 없었지만, 어느정도의 휴식은 취할 수 있었다.


수학 시간이 되자, 난 대기실로 이동했다.


전컴지원자 240명을 두 강의실에 나눴는데, 그 중에 여자는 4명밖에 없었다.

공대의 암울함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 암울함을 더하는 것은, 나의 면접 순번이었다.

뒤에서 4번째였다.

1시부터 6시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린 것 같다.

1시간 정도 기다리다 못해 옆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옆 친구는 강남대성학원 출신이었고,

우리는 통하는 것이 많아서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얘기를 하면서 수학 기출문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시간은 지나갔다.

내 차례가 왔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시험장으로 가서 문제지를 받자마자 문제를 풀어나갔다.


1-1과 1-2는 익숙한 유형의 문제라서 쉽게 풀 수 있었다.


2번 문제는 작은 문제가 4번까지 있었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원 안에서 작은 원이 도는 문제였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2-1은 그 자취가 (cos^3x, sin^3x)인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3x의 각으로 도는 것까지는 구했는데, 그 이상은 더 이상 어떻게 접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10분이 지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아..떨어지고 마는 것인가. 이대로는 안되는데.


2-1은 그냥 넘겨버렸다. 2-2부터 봤다.


곡선의 개형을 그리라는 문제였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얼핏 본것 같아서 생각나는 대로 그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정답이었다. 2-3과 2-4는 대성학원 수학 조두식 선생님께서 한번 풀어주셨던 문제였다.

쉽게 풀 수 있었다. 그렇게 2-1을 풀지 못한 채 면접실로 향했다.

역시 빠른 속도로 내가 푼 문제를 설명을 했다.

교수님은 2-1을 다시한번 풀어보라고 하셨고, 1-1과 1-2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하셨다.

그 부분 외에서는 만족하게 설명한 듯 했다.

하지만 난 끝까지 그 못풀거나 틀린 부분의 답을 찾지 못했고, 제한시간이 다 돼서 나가야만 했다.


만족할 정도로 면접을 보진 못해서 마음이 찝찝하긴 했지만, 그래도 ‘평균정도는 봤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다.





오르비에 가서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니, 거의 다 상황이 나와 마찬가지였다.

2-1을 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험 문제가 어려웠던 것이다.


내 점수가 165.94였는데, 이는 1배수 컷보다 약간 위의 점수로 추정된다.


면접을 중간 이상만 한다면 합격을 기대할만한 점수였다.

잘만 하면 합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2월 2일. 서울대 발표날.

성당 사람들과 같이 피정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핸드폰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저녁 5시 30분쯤, 몰래 아버지께 문자를 보내서 결과를 여쭤보았다.

30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온통 그 생각 뿐이었다.  

떨어져서 전화가 안오는 걸까.



정말 떨어지고 만 것일까...면접 준비좀 열심히 할걸.



아버지는 얼마나 상심하실까.



그 30분간은 나에게 100만년처럼 느껴졌다.  


100만년이 막 지났을 즈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어~ 축하해요~서울대생~"

아버지의 기쁨에 찬 목소리였다.




난 확실하냐며 아버지께 재차 여쭤봤고, 아버지께서는 확언의 대답을 해 주셨다.


너무 기뻤다. 날아갈듯이 기뻤다.


성당에 있는, 같은 고등학교 후배와 껴안고 합격의 기쁨을 나눴다.


하지만 그곳은 피정의 집이기 때문에, 남들 다 보이는 곳에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일.


합격의 기쁨은 잠시, 다시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속에서 터져나오는 환호성을 억제하기에 바빴다.
















3월 9일의 재수일기와 같은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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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공부의신 이라 부른다. 나는 공신이라는 대학생 교육 봉사단체를 만들었고 공신닷컴이라는 회원수 20만 명의 공부법, 동기 부여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공신은 대한민국 최고의 봉사단체로 청와대의 매년 초대를 받고 있으며 공신닷컴은 정보통신윤리위윈회 청소년 권장 사이트로 등재된 서울형 사회적 기업이다.

 

공신 이후로 공부법이란장르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난 MBC에서 공부법 프로 MC를 맡으며 KBS 공부의신 드라마 공부법 자문으로 대본 작업에 참여 했다. 내가 썼던 공부법 책들은 중국과 대만에 수출되고 있고 1 365일 한 번이라도 만나 보려는 학생 학부모님이 줄을 섰다. 과연 얼마나 잘난 인간 이길래?왕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고 신이라 불리는 것일까? 오늘 난 내 과거에 대한 이야길 솔직히 해보려 한다. 이런 이야기, 가까운 공신 들에게도 해본 적이없다. 유쾌한 기억보다는 힘든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은 그야말로인생의 암흑기였다. 경상북도 점촌이란 시골 마을에 살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서울 화곡동에 전학을 오게 됐다. 새로 온 집은 시장 근처였는데, 논밭만 있던 곳에 살다 차들과 사람, 집들로 빼곡히 들어찬 동네에 오게 되니 모든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학교에 간 첫날부터 나는 완전히 쫄아 친구들에게 자기소개조차 하지 못했다. 난 원래 내성적이고 겁이 많았다. 덩치도 작았다. 그당시 주눅이 들기도 했었고 조금은 깍쟁이 같은 서울 친구을 만나니 말을 꺼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붙여진 내 별명은촌놈, 혹은 더러맨이었다. 까무잡잡하고 팔꿈치에는때가 껴있어서 더럽다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굉장히도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만만해 보였는 지 나중엔 싸움 잘하는 친구들에게 맞기 시작했다. 맞는 덴 별 이유가 없었다.  난 겁이 나서 화장실을 못 갔고 다른 건물 화장실을 쓸 때가 많았지만 그것도 왠지 쪽팔려서 못갈 때가 많았다.  어쩌다 급할 땐 쉬는 시간에 집까지 뛰어 갔다. 물론 수업 시간에 맞춰 들어올 수 없었고 선생님께서 뭐하다 왔냐 물어보시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집까지 부리나케 뛰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데 그건 지금이라서 그럴 수 있을 뿐이다. 그 당시엔 정말 미래가 없어 보였다. 학교 폭력이란 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을 절대 심각성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중학생이 된 뒤로 일산으로전학을 갔다. 일산은 전에 살던 동네완 달리 싸움도 적고 친구들도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 스스론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소극적이고 찌질했고 뭐하나 똑부러지게 하는 게 없었다. 별 존재감도 없어 학교에 왔는지 안왔는 지 잘 모를 학생이었다. 2 때 였다. 어느 날 반에서 가장 키크고 싸움 잘하는 친구와 눈이 교실에서 마주쳤다. 마침 그 친구는 담배로끊어 오른 가래를 바닥에 뱉으려던 찰나였는데 눈이 마주친 것이었고 그 친구는 입안에 한 가득 담겨 있던 침을 그대로 나에게 뱉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내얼굴로 그 침이 정확히 날아 왔고, 하필이면 그 순간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얼굴에 침을 뱉다니, 수업이고 뭐고 달려들어 주먹이라도 날렸어야 했다. 하지만 용기라곤 이제껏 살면서 가져보지도못한 나였다. 나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침을 손으로 닦고 그 상태 그대로 한 시간 동안 수업을 들었다.대들어 볼 생각조차 못했고 선생님께는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할 용기 조차도 없었다.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썩어 문들어지는 침 냄새를 지우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람 침이 이렇게 고약한 건 지는 그 때 처음 알았다.내 스스로가 불쌍했고 이런 놈을 자식이라고 애지 중지 하는 부모님이 불쌍했다. 이런식으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마저 했다. 난 너무도 달라지고 싶었다.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었고 단 하루라도 친구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가 되보고 싶었다. 그 순간 공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데신기하게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번져나갔다. 제대로 한 번 해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왜 하필 공부였냐? 공부를 잘하면 아무리 병신이고 찌질해도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3올라가기 전 방학, 공부라는 걸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해봤다.오기도 품었고 처음으로 독서실을 끊었는데 조용한 게 공부가 꽤나 잘 됐다. 학교와좀 먼 곳이라 친구들도 없었고 대부분 대학생, 직장인들만 있는 곳이었다. 가끔씩  독서실 근처 오락실가는 것 빼곤 혼자서 공부를 했다. 물론 한 번 가 앉으면 끝판까지 가니 좀 문제긴 했지만 그것 빼면 정말공부만 했다.  어떨 땐 시간을 아끼려고점심시간에 독서실 계단에서 햄버거를 사먹거나 과자 한 봉지로 때우기도 했다. 하지만 보람찼다.뭔가 내가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는 중3 첫 시험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반에서 2등을 했다. 반 배치 등수와는 다르게 생각지도 못한 학생이 떠오르니까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날부터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칭찬을 받게 되니까 교무실에 가는 게 즐거울 정도였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께 좋은 인상을주기도 하고 또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으니 학교 가는 게 신이 났다.

 

3내내 나는 그 기세를 이어가 우리 동네에서 공부 좀 한다는 공립고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특했고 대만족이었다. 이제 노는 일만 남았다. 남들 고등학교 예습한다고 할 때 난 정말 신나게 놀았고 입학 후엔 학교생활에 적응도 잘해서 친구들과도 많이 사귀고 학생회,동아리 활동을 즐겼다. 학교 다니는 게 행복했다.

 

다만 약간의 고민은 공부였다. 중학교 공부는 벼락치기로 하면 거의 한대로 나왔는데 고등학교 공부는 어렵기도 어려웠고 나름 열심히 해도달라지는 게 없었다. 내신은 범위가 너무 많았고 모의고사는 정말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진 빠지게 모의고사 시험을 보긴 보는 데 봐도 결과는 형편 없었다. 풀 때는 맞는 것 같은데막상 채점하면 영 딴판이었다. 1, 2가 끝나가는데도 반에서 중간 정도, 그 상태에서 달라지는 게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은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성적은 잘 나왔다. 나와는 반대인 아이들이었다.

 

답답한 건 친구들은 나를거의1등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야자시간도 땡땡이 치지 않고 수업시간도 절대 조는 일 없이수업을 꼿꼿이 들으니 그럴만도 했다. 수업시간에 항상 깨어있는 나를 보고 내 필기를 빌려가는 친구들도 많았지만성적은 대부분 그 아이들이 더 좋았다. 축하는 해줬지만 힘이 빠졌다. 급기야는 한 과목에서 50점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당시 내신 부풀리기로 100점 받는 애들이 수두룩 했는데 나는 공부를 해도 그냥 그 자리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역시나는 머리가 나빠. 부모님께서  못해줘서 그래. 우리 집안엔 왜 대학 나온 사람한 명 없는 거지. 난 왜 물어볼 형도 없지. 우리 집 차는 왜 고작 프라이드에 그것도 중고차를 타고 다니나.  별별 탓을 다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싫고 미웠다. 부모님과말 섞는 것 자체가 싫었고 집에 오면 짜증을 안내는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없이 좌절하고있을 무렵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내가 형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 답답했던 만큼 동생에겐내가 겪은 막막함을 물려주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날부터 노트를 마련해서 공부하면서 도움될 만한 내용들을 상세히 적었다. 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였다. 짐작했겠지만난 다른 건 몰라도 어릴 적부터 동생 하나는 끔찍히 아끼는 형이었다.

 

과목별 공부법, 공부할 때 태도 마음가짐부터 자극받을 수 있는 문구까지. 항상 이노트가 옆에 있었는데 나중엔 이게 습관이 되어 내 나름대로 이런 저런 방법들을 시도 해보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나가게 되었다. 이 노트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에게 내가 해줄 수 잇는 가장 좋은 선물 중에 하나일 꺼라 생각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효율적인방법들은 모두 적었다. 사실 그 당시엔 그게 공부법이라고 불릴 만한 것인지도몰랐다. 공신닷컴 같은 사이트도 없으니 그저 전부 내가 직접 해보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식이었다.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이런 시도를 하고 방법들을 찾아가며 나에게맞는 공부법을 찾게 된 이후로 공부가 잘 되기 시작했다. 전보다 23배 이상 공부가 잘 됨을 느꼈다.

 

가끔은 머리가 팽팽 돌며  풀가동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였다.내가 왜 진작 이런 식으로 공부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었다. 그 후회 때문에라도더 공부해야 했다. 3 내내 난 공부하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공부할 수 있을 지 항상 생각했고 실천했다. 시험 볼 때마다 적용해보고 반성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고다음 시험에 적용해 나갔다.

 

어쩌면 나는 이 노트덕분에내가 원하는 대학에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나 뿐 만 아니라 그 노트에 적힌 공부법덕분에 내 동생도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나는 줄곧 교육 봉사를 해왔는데,봉사를 좋아하거나 사회를 바꿔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같이 힘들어하고 헤매는 학생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대 이후 나는 내가학생들에게 조언해줬던 공부법과 동기부여에 대한 조언을 모든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 때까지도 나는 공부법이란 것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란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방학을 이용해 공부법 강의를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자 했는데 사이트 이름을 고민하다가 누구나 공부를 신나게하길 바라는 뜻으로 공신이라 지었다. 처음엔 공부의 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 공부라는 것이 진절나게도 힘들었기 때문에후배들은 이 공부법을 통해 공부를 신나게하길 바라는 뜻이었다.

 

동생과 같이 쓰던 기숙사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공신은 이후 공부의 신으로 와전되었고 지금은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1:1로 멘토링을 하고 학습법 컨텐츠와 동기부여 컨텐츠를 전파하는 서울형 사회적 기업으로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밤낮으로뛰고 있다. 2011년이 들어서며 공신에서 활동한 대학생이 300명이넘어 섰다. 공신에서 도움을 받은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다시 공신이 되어 그 선배와 함께 교육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피할 수없는 고통이면 차라리 그것을 즐겨라.’ ‘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니까.’  해병대에서 뼈저리게 배운 이 말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중에 하나다. 사람을 가장 크게 성장시키는 것은 안정이라기 보다 역경이라는 뜻이다. 아직 살아온 날이 길지도 않지만 돌이켜 보니 나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나마 지금 내가있기 까지 나를 잘되게 해주었던 것은 사교육도 아니었고 잘난 머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괴롭혔던 친구들덕분이 었고 열심히 해도 나오지 않던성적 때문이었다.

 

 

열등하기 짝이 없는 나도공신이 되지 않았는가? 여러분이 지금부터 마음을 먹고 제대로 시작한다면 아마여러분은 나 같은 사람보다는 몇 배는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는가?일단 반드시 뭔가를 해내겠다는 마음부터 먹어라.

 

물론 지금 여러분에게많은 고난과 좌절이 있을 거라 믿는다. 내가 겪었던 것 이상으로 혹은 비슷한 어려움을느낄 것이며 공부라는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게도 단 한순간도 공부란 게 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께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바로 그것이, 그 고난들이 결국 여러분을 성장하게 하는 가장 큰 보약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부디 좌절하지않길 바란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큰 꿈을 가져라. 고작 대한민국이란 작은 나라에 입시 따위로 좌절하긴 여러분이 너무 아깝다. 어린 시절 가졌던꿈을 다시 꺼내고 세계를 호령할 인물이 될 준비를 지금부터 시작하자. 여러분은 절대 나약하지 않고 또한 이겨낼 힘도 충분히 있다. 그리고 여러분 곁엔 공신 선배들이 함께할 것이니까. 최소한, 이 찌질했던 공신 선배 한 명 만큼은 여러분을 믿고 박수를 쳐 줄 것이니까.

 


자신 있으신가요?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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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수능 직전에 그렇게 상태가 나빴는데 왜 성적이 잘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일까. 혹은 지난 1년간의 노력이 진실로 멋진 것이고 노력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기에? 학평의 모의평가에서 성적이 잘 나왔던 건 믿을만하지만, 그 뒤에 내가 치렀던 사설 모의고사는 형편없었고 거기서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도 하나도 믿을 게 못 되는 것일까? 

 솔직한 개인적 생각으로는 아마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신문에 나오는 학생처럼 국영수를 교과서 위주로 예습복습 철저히 공부한 탓이고 사실은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노력 없이 단지 운만으로 뭔가를 얻고 잃는다는 건 별 의미없는 일이지만, 가끔은 운이란 게 사람 인생에 있어서 꽤 큰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애매한 문제 한두 개 맞춘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반적인 수능 출제 양상은, 내가 자신있었던 언어와 외국어가 다소 어렵게 나오고 수학이 쉽게 나온 건 천운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또한 불행히도 그 운이란 게 실제로 있다면 약간의 아쉬움을 내게 남기기는 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거창한 해피엔딩은 못 된다. 나는 이 오르비 옵티머스라는, 7년 전에는 존재 여부도 몰랐던 사이트를 발견하고는 뭐 대단한 것이라도 찾아낸 양 생각했고 거기서 나오는 입시 관련 정보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으리라 철썩같이 믿었다. M모 사이트 같은 다른 곳의 유료 예상 서비스가 훨씬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음에도, 그리고 부모님 역시 그쪽을 믿는 게 훨씬 낫다고 내게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나는 싸우고 또 싸워서 과감히 상향지원을 했다. 

 재수는 있을 수 없으니 최대한 하향해서 가군 나군 넣고 혹시 모르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다군까지도 하향지원하자는 부모님의 말에 말 그대로 신경질을 냈던 것이다. 운 좀 붙어서 시험 하나 잘 치고 나니 뭐든지 문제없을 것 같았다. 성적 잘 나왔으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어디든 넣어도 문제없이 붙을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과욕이었고 내 자신의 희망에 내가 취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뭔가에 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최초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에야 나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2월 말까지 추가합격 통보가 오기를 기다리며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내가 가고 싶던 대학을 가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른 말 잘 들으면...으로 시작하는 속담이 아주 빈 말은 아닌가 보다. 안 들어서 손해본 게 입시 관련해서만 벌써 두 번째니까.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도 후회할 일은 얼마든 많다. 조금만 원서를 더 하향해서 넣었더라면, 수능의 그 수학문제에서 검산 한 번만 더 했더라면, 재수할 때 3월달부터 국사와 제2외국어를 했더라면, 군대 갔다와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졸업하려고 노력했더라면, 아니 대학 1학년 때 술먹고 놀러다니지 말고 공부를 했더라면, 점수 맞춰 아무 대학이나 등록하지 말고 바로 재수를 했더라면, 자연계가 아닌 인문계를 선택했더라면...이러다가는 젖먹던 시절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밤을 새우고 새워 방구석에 앉아 후회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랄 것이다. 아무리 아쉽고 후회되더라도,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 넘어가면 안 되는 무언가, 더 이상 후회하면 안 되는, 결국은 포기하고 깔끔히 잊어야만 순간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재수를 시작하면서 그 순간을 정했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튼 다행히도 다른 원서는 합격했고, 이전에 다니던 K대학보다는 평가가 좀 낮지만 그래도 인문계 자연계 차이를 고려하면 그닥 큰 차이없다고 할 만한 한 대학에는 장학금까지 받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디 붙었다고 말하자 친구가 "이번 수능 잘 쳤다며?"하고 반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속쓰리지만, 최소한 수능 성적 얼마와 맞바꾼 대가로 돈 걱정 덜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꽤 큰 의미가 있다. 원래 썼던 원서가 붙었더라도 어쩌면 진지하게 고려했을지 모를 옵션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 뿐이라고. 

 물론 단지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 위해 7년이란 시간을 낭비한 것은 분명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도록 내 발목을 잡고 손해를 끼칠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다. 남들이 앞으로 뛰어가는 동안 혼자 뒤로 갔으면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죽을둥 살둥 달려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리 행운 불운 핑계를 대봐야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가 내 공과 내 과로 인한 것이고,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일 뿐이다. 어쨌건 일이 결정난 지금은 후회하지 말아야 할 순간이 드디어 되고야 말았다. 




 2011년 3월의 서울. 27살 늦깎이 대학 1학년생에게도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봄이 왔다. 외모만 보고도 진작에 신입생 아닐 거라 지레 짐작하고 동아리 가입 권유 팜플렛 한 장 내게 주지 않는 2, 3학년 학생들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조잘대며 오가는 캠퍼스를 몇 번이고 걸어 보았다. 

 이 3월은 누군가에게는 닭장 같은 고등학교 교실이나 재수학원에서의 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개강파티가 즐거운 대학교 첫 경험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취업 스펙을 만들기 위해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로 밤을 지새는 날의 연속일 것이다. 혹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건, 인턴생활, 과외, 알바, 뭘 하건...이 글을 읽고 있는 이 땅 이 나라 위의 젊은이들 누구나에게 자신만의 사연으로,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짜증과, 희망과 좌절과 또 그 모든 것으로 점철된 수많은 길고긴 이야기가, 지나간 과거와 지나갈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현재 역시 매 순간순간마다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줍잖게 들리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뒤에 드리운 과거가 맘에 안 든다고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진 미래가 어두워 보인다고 미리 앞서 절망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치열하게 살자고 말이다. 최소한 타임머신은 아직 아무도 못 만들었지 않은가.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건투를 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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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익명의 인터넷 공간이라지만 이런 글을 쓰는 건 솔직히 좀 부끄러운 일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새학기가 시작하고 입시생들이 다 자기 갈 길 가고 오르비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갔을 지금에 이르러서야, 3월의 새학기가 시작된 오늘에 이르러서야 밤늦게, 그리고 뒤늦게 이런 글을 써서 올리는 거기도 하다. 그러니 일단 군 제대해서 복학 후 2009년 2학기에 학고를 맞았다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이 먹고 재수 시작하는 점에 있어서 그리 자랑할 거리는 없다. 

 근데 솔직히, 이전에도 맞아봐서 그런지 꽤 무감각하더라. 아, 올 것이 왔구나.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런 생각 정도 들었다. 

 사실 대학서 왠만큼 출석 하고 교양만 들어줘도 학고 맞기 쉽잖다. 요즘 같은 학점 인플레 시대에, 아무리 아등바등 교수님 찾아다니고 도서관에서 밤 새우는 짓거리 안 해도, 간신히 턱걸이 출석하고 시험지 절반쯤 비우고 프로젝트 대충 제출하고 C+만 줄줄이 받아도 학고까지는 잘 안 나온다. 3학년 때 그런 거 받는 건 진짜 포기한 인간이 받는 거지. 공부 포기한 인간. 대학 포기한 인간. 취직 포기한 인간. 미래를 포기한 인간. 

 부산의 집으로 내려가는 동안 천천히 현실감각이 나를 따라잡았다. 이제 20대도 절반 넘게 지났는데, 군대도 갔다왔는데, 더 이상 젊지 않은데. 예전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학고 맞고 군대 갔다왔어도 또 학고다. 안 되니까 포기한 건지 아니면 포기했으니까 안 되는 건지를 고민해 보았다. 난 여전히 정신 못 차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왜 살아있는가를 궁금해했다. 난 뭘 하기 위해 살고 있지?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필요가 뭐지? 선로에 들어오는 부산행 KTX 열차를 보면서 저기 뛰어들면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들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아파트 계단 올라서 4층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집을 지나쳐 옥상에 올라갔다. 난간 너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내리지 못했다. 죽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총 한 자루라도 내 손에 있으면 정말 빠르고 간단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알약 하나라도 있으면 삼키면 끝일 텐데, 편하고 고통없이 죽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게으르게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배치고사에서 덜컥 1등 해버렸던 것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반에서 10등 안쪽에서 놀았는데 어쩌다 그 성적이 나와서 입학식 날 손 들고 선서했는가 모르겠다. 어쨌건 성적은 뭔 이유에선지 몰라도 제법 올랐고 그 뒤로도 전교에서 10등 안쪽은 지켰었다. 2학년 과 고를 때가 되어 부모님은 조금만 더 하면 의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고 이과를 고르라고 했었다. 나는 의대는 왠지 싫었다. 피 튀기는 것도 싫었고 사람 자르고 짼다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고 소독약 냄새 매캐한 병원 찾아가면 무감각한 표정으로 사람 죽고 살리는 것에 대해 직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 싫었다. 의대 붙은 친구 녀석의 요즘 모습이 어떤가 그때 알았더라면 그런 생각 따윈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과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과학잡지도 여러 권 봤었고 과학자니 기술직이니 하는 것도 왠지 매력있게 느껴졌다. 복잡한 기계장치나 멋진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것에서 남자로서 느끼는 매력 같은 것. 그래서 이과에 갔다. 그저 막연하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래되어 잘은 기억 안 나지만 2년 내내 모의고사 성적은 무난하게 나왔던 것 같다. 학원도 가고 내신도 따지고 가끔 야자 째고 PC방 가서 스타도 하고 고3으로서 할 건 다 했다.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전교 1등도 가끔 해봤다. 의대는 어쩌면 갈 수 있을 수도 있었고 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서울대 공대 정도는 무난히 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의대 못 간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능날도 무난했었다. 2003년 겨울에 친 수능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몇 가지는 기억난다. 특히 점심시간에 친구들하고 모여서 밥 먹고 수능 난이도에 대해 수다떨던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수학 쉽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맞장구쳤었다. 쉽다고 생각했다. 사실 쉬웠다. 뉴스에서도,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성적표가 나왔을 때 수리영역에 4등급이 찍혀 있었다. 요즘은 수험표 뒤에 번호 적어와서 가채점들 하는게 보편화되어 있던데 나 때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래서 성적 나오기를 기다리며 놀기 바빴기에 내게는 매우 비상식적인 성적이었고 마킹을 밀려썼나 하고 생각했다. 부랴부랴 확인해보니 죄다 계산실수였다. 1 더하기 1은 3. 위쪽에는 덧셈기호로 썼는데 옮겨적다가 나눗셈기호로 착각한 것. 자릿수 잘못 맞춰 계산한 것. 문제를 읽다가 조건 하나를 빠뜨린 것. 그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들밖에 없었다. 몰라서 틀렸고 내가 틀려야 마땅하다고 느낀 문제는 거의 없었다. 긴장해서 그랬을까? 중학교 때 보습학원 다니면서 여러 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서는 별로 그런 기억이 없다. 근데 왜 하필, 여기에서. 난 이과라서 수학에 가중치 들어가는데. 왜? 

 부모님은 재수를 원했다. 아버지는 특히 재수를 원했다. 수학만 벌충할 수 있으면 의대 원서 넣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백분위점수로 언어가 100% 나왔고 외국어는 만점이었지만 시험이 너무 쉬워서 97%가 나왔다. 애초에 나는 그 두 가지 과목만은 자신이 있었다. 수리를 제외하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었지만, 역시 이과니까 수리와 과탐에 최대 100%까지 가중치가 들어가는 건 큰 문제였다. 그럼 재수할까? 

 6차 교육과정 마지막 세대에 숙한 입장에서 앞으로 다가올 7차인지 뭐니 하는 이상한 것을 또 배워서 시험쳐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은 대학 가서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되면 뭐하지? 뭐가 좋을까. 다들 의사에 그렇게 목을 매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좋은 대학 가면 뭐하지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이름도 생소한 학과들을 훑어보면서 여기 가면 뭘 할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했다. 

 이전에도 농담처럼, 고등학교 친구들이 너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이 비정한 세상이 내 꿈을 앗아가버렸어 운운하며 쿨한 척 폼만 잡았었다. 내게 꿈이 있나? 없었다. 공부는 부모님이 시켰기에 그냥 했다. 성적은 높으면 좋고 낮으면 아쉬운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다. 기준점이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성적표 받아들고선 눈물이 났지만 그건 꿈을 이룰 수 없어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그러니 재수를 하고싶을 리가 없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여러 번 싸웠지만 결국 내 뜻을 관철시켰다. 부모님은 방구석에 무덤처럼 쌓여있는 문제집과 교과서를 거의 2월달까지 버리지 않고 놔둠으로서 미련을 잔뜩 갖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시위했지만, K대학교 전기전자공학과에 점수 맞춰 써넣은 결과로 합격 통지서가 날아오자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 대학 못 들어가서 슬퍼하는 사람도 얼마든 많았다. 공대 나와서 어디 회사에 공돌이 취직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가 있을까. 입학식날 내 마음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표면상으로 주된 문제는 수학이었다. 그게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공대 수학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잡을 생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수능 시험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수학이란 그 자체가 그냥 싫었던 것 같다. 애초에 문제도 잘 풀리지 않았고, 그래서 책 펴놓고 딴 생각하고 수업 시간에 졸았다.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지만 1학년 때는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2학년 올라가면서 문제는 커졌다. 공대에서 수학은 모든 과목의 기본이었다. 공부의 첫 단계를 빼먹으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두 배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았을 때 결과는 뻔했다. 그나마 교양과목이 있어서 아주 나쁜 성적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주로 나는 게임에 빠져 있었고 공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수능이란 목표가 있을 때도 어디 갈지 막연했는데 그 목표가 사라진 후에 내가 내 자신을 통제할 리가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전공 위주로 성적표를 편성하게 되면서 나는 거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 포기하다시피 수업을 들으며 학고를 맞았고 그거 맞아도 세상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F학점은 성적표에 찍힌 알파벳에 불과했다. 목표가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부모님의 질책을 받고 잊어버렸다. 휴학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 군대를 갔다왔다. 군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았다. 갔다오니 학교가 바뀌어 있었다. 

 새로 지은 지하 열람실에 학생이 넘쳐흘렀다. 청년실업 이야기가 뉴스에서 밥먹듯 흘러나왔다. 후배 하나가 1학년 1학기에 C+학점 하나 있는 게 맘에 안 든다고 자퇴 후 재입학하면 수정이 되느냐고 묻는 걸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신입 대학생들은 과장 좀 보태서 거의 고3처럼 공부했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재수강 과목만 쌓였지만 2학년 수업을 재수강하는 교실에서 나는 고학번으로 출석부 앞쪽에 올라와 있었다. 일찌감치 복학한 과 동기들은 자기 수업 듣기도 바빴다. 군대 가기 전, 3년 전에 배웠던 것들은 거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노력했지만 부족했다. 나는 말 그대로 기초가 없었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생각되자 노력할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고 노력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시험에서 백지를 제출한 과목이 제법 많았다. 어느새 밑바닥에 이르러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공부해도 되지 않는, 혹은 할 생각조차 없는, 진짜 바닥. 타성에 젖어 강의실과 하숙집과 도서관을 매일 오갔지만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졸업은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였다. 하지만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총장이 말도 안 되게 높은 등록금이 적절하다고 말했던 것이 한때 이슈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군대 있는 동안 퇴직을 했고 나는 부모님이 두 손에 꼭 쥐고 앞으로 30년은 살아야 할 돈에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연 이천 만원씩 깎아먹고 있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게임을 하면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성적이 나왔다. 부산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와 한참을 주저하다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부모님께선 화를 내지 않으셨다.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 앞으로를 이야기하자고 했다. 두 분의 얼굴 표정을 보고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에 둘러앉아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 나눈 대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가지 없었다. 일단 다니던 대학은 포기해야 했다. 설령 간신히 졸업한다 쳐도 몇 년이 걸릴 것이며 그 다음엔 어떡할 것인가. 하릴없이 어디 시덥잖은 지방대학에 편입을 하던가, 아니면 당장 공장에라도 가던가, 혹은 26살 먹고 고시를 준비하던가 수능을 다시 한 번 더 치던가 정도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고르기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결국 재수하는 것밖에 선택이 없었다. 공대를 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의대는 가망도 없어 보였고, 남는 건 인문계로 재수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월 88만원 받고 살더라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했다. 




 집에서 공부하면서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다녔다. 수능 공부한지가 6년이나 지났는데 학원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비싼 돈 내고 기숙학원 다닐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통학 위주로 찾았다. 집 근처에 나름 유명한 A학원과 B학원이 있었고 걸어서 닿는 곳에 C학원이 있었다. A학원은 간판은 걸려 있었지만 알고보니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 듯 했다. B학원은 아주 가깝기는 했지만 작은 규모에 허름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에 부산에 지점이 새로 생겨 대폭적으로 광고를 하던 C학원은 시설도 꽤 그럴듯해 보였고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니 운동겸 걸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D학원을 추천했다. 어렸을 적에 얼굴도 몇 번 본 적 있는 아는 친척분이 거기서 강사를 하고 계셨지만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했고 시간이 40분은 걸렸다. 

 그 외에도 재수학원은 많았다. 부산에 재수학원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학원들을 둘러볼수록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인다는 서울의 유명 학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고작 부산인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진짜 유명 서울 강사면 대치동 가기도 바쁠 텐데 부산까지 누가 내려올까 하는 상담선생님의 이야기가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결국 아는 분 있으니 문제집이라도 하나 공짜로 주겠지 하는 생각에 D학원을 골랐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차마 이 나이 먹고 재수한다는 이야기를 할 용기를 내지는 못해서 그 이야기를 하진 못했고, 국민학교, 중학교적 몇 번 만나본 게 전부인 내 얼굴을 그분이 기억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도 처음엔 시간표에서 이름 찾아보기 전까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참고로 그분은 얼마 뒤 강사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셨다. 

 학원이 시작되기 전에 집에서 한 달여를 공부했다. 일단 오전 6시에 정확히 기상하는 연습부터 했다. 작년 수능시험 문제부터 한 번 풀어봤는데 바뀐 게 너무 많아 매우 당혹스러웠다. 언수외가 죄다 100점 만점이고 시간도 바뀌었고 시험 치는 순서도 바뀌어 있었다. 인문계는 사탐을, 자연계는 과탐만을 치고 그것도 수많은 과목 중에 최대 4개까지 골라 친다는 것도 역시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성적은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시작부터 좌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7차 교육과정이 6차 때보다 배우는 내용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시집 가서 애 낳고 잘 사는 누나에게 예전에 물려받은 덕에 1996년 발행이라고 찍혀있는 정석을, 고3 때 보았고 아직도 용케 책꽂이에 남아있는 정석을 연습문제 위주로 재빨리 보았다. 언어는 유명 현대시하고 소설 같은 것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백여 편 정도 간단히 보고 익혔다. 수학 이외의 과목은 문제집을 사야 했는데 대체 뭘 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EBS라 쓰여있는 것만 샀다. 사탐은 뭘 공부해야하는지 역시 알 수 없어서 상담 선생님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울대 갈 생각은 없으니 국사 빼고, 외울 게 많은 윤리 빼고, 하면서 한국지리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를 추천해주었다. 별달리 아는 게 없으니 역시 그렇게 공부했다. 알고보니 그 선생님이 경제 선생님이는데 막상 경제 공부를 해보니 속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3 때 사탐 공부한 것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다행히도 나는 제일 윗반에 편성되었다. 이름은 서울대반이지만 내가 그 반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개중 몇 명이나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를 의심했다. 그래도 수업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한때에는 부산 최고의 학원이었지만 학원 판도가 바뀌면서 D학원은 많이 황량해졌다. 학원 건물이 들어선 도로 건너편에는 임대 플랭카드를 건 커다란 빌딩이,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빌딩이 역시 같은 학원의 간판을 달고 텅 빈 채로 서 있었다. 그래도 수백 명이 다니는 학원이니 작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 한 마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아이들은, 재수생활 내내 공부 이외의 것은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던 애들은 서서히 자기들끼리 친해져갔다. 나는 학원에서는 왕따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6살 어린 애들하고 친해지면 뭐 좋나. 반 최고령자하고 대화 나누고 싶어하는 애들도 별 없었다. 말 없이 사니까 귀머거리라고 생각했는지 늙은 놈이 주책이다 이상한 인간이다 하는 식의 말을 뒤에서 하는 걸 종종 흘려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1년쯤 아웃사이더로 산다고 죽진 않는다. 좀 외로울 뿐이다. 

 기행도 많이 저질렀다. 아는 사람이 없으면 남을 신경쓸 이유가 없다. 나는 주로 학원에서 잤다. 자기 바빠서 남들하고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선 자기 바빴다. 밤에 공부하는 버릇이 든 덕택이다. 자습을 10시에 마치고 집에 오면 10시 40분은 된다. 11시부터 공부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2시까지. 오히려 한밤중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리 조용해도 옆자리 연필 사각대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자습실보다 정말 고요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 아무도 살아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자정의 공부 분위기는 거의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러고 나면 다음날 학원에서 존다는 것이다. 아침 자습 시간에 잤고 쉬는 시간에 잤고 오후 자습 시간에도 잤다. 물론 수업시간에도 침 질질 흘리며 잤다. 조금 수업이 지루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집중력을 잃었고 그럼 잤다. 다행히도 너무 많이 자면 옆에 앉은 누군가가 고맙게 깨워주기는 했다. 입시는 4당 5락이니 하는 말이 한때 유행했고 나폴레옹은 하루에 세 시간 자고도 거뜬했다지만 나는 나폴레옹이 아니었고 잠 많이 안 자면 종일 영향을 받었다. 새벽 네 시 반에 잤던 날은 오전 수업 하나도 안 듣고 내내 잔 적도 있었다. 이렇게 공부해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차라리 학원을 가지 않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제대로 자고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독학을 택하기엔 너무 부담이 컸다.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인상 좋은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자기소개서의 나이 란을 눈으로 훑고는 내가 왜 솔직히 적었는지 의문인 부모님 나이와 무직이라 적힌 아버지의 직업란 역시 훑었다. 그 나이 먹고 재수하냐고, 늦게 낳은 자식보고 부모님이 돈 벌어오라고 안 하시더냐고 농담조로 물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수업시간에 자느냐고 물었다. 역시 웃었다. 괜찮은 공대 다니다가 이제 와서 재수하는 이유는 뭔지, 학교 자퇴는 했는지도 물었다. 농담이 아닌 건 알았지만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생소한 재수학원 생활에는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이름도 모르고 대화도 없다 하더라도 매일 보는 애들 얼굴은 눈에 익는다. 복도 구조나 교실 구조가 눈에 익고, 시간표와 점심 메뉴가 기억에 익고, 선생님들의 제각기 다른 목소리가 귀에 익고, 교재의 빳빳한 종이도 손에 익고 책상의 높낮이나 화장실 냄새조차도 익숙해진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공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집이 되어갔다. 

 학원 분위기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으냐는 건 주관적인 판단일 것이지만 내게는 충분했다. 최고의 강사진 밑에서 최고의 학원 다닌다고 최고의 성적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선생님들의 경우도, 인터넷으로 뜬 스타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비교할 수는 없었다. 7년 전에는 메가스터디를 필두로 해서 인강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보지 않았었고, 인강이 보편화된 지금에도 볼 생각은 없었다. 어느 선생이 좋은지 어떤 업체가 좋은지 알 수도 없었고 인터넷 강의에 돈 내는 건 어쩐지 아깝게 느껴졌다. 조그만 액정이 달린 MP3를 쓰던 터라 원하면 깨알만한 글씨로 칠판에 판서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배터리 수명도 짧고 화면도 작아서 인강을 본격적으로 보기는 역부족이었다. PMP를 사려도 돈이 없었다. 주로 주말에 집에서 컴퓨터로 공짜 EBS 강의를 몇 개 정도 보았다. 

 수업 시간에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는 꼬박꼬박 자고, 자다가 누가 고맙게도 깨워주면 일어나서 공부하고, 공부가 막히면 MP3으론 음악을 듣고 점심시간이나 통학시 남는 시간에 영어공부 겸 해서 토렌트로 받은 미쓰버스터즈(이전부터 한 번 끝까지 보고 싶었던)를 보았다. 자막이 없었지만 대사를 매우 또박또박 말해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듣기 쉬웠다. 그렇게 8개 시즌 보는 동안 작은 화면 보느라고 눈 많이 나빠졌을 것이다. 

 영어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적에도 그랬고 대학 다닐 적에도 그랬다. 취미생활에 있어 영어는 꽤 유용한 도구다. EPL의 최신 소식이 궁금하면 영문 공식 홈페이지 가면 되고 국내 개봉 안 한 신작 영화에 대해 알고 싶으면 IMDB 접속해서 글 읽으면 된다. 상식이 고프면 위키피디아 영문판도 있고 외국 유머 사이트도 재밌는 곳이 많다. 하다못해 게임하면서 대사 읽을 때도 도움이 된다. 사실 내 첫 영어공부의 절실한 첫 동기는 게임, 그것도 C&C였다. 미션 시작하기 전 브리핑에서 뭐라고 하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충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동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학교 수업 외적으로 영어공부를 많이 했었다. 6차 때는 만점자가 상위 4% 나올 정도로 영어가 워낙 쉽게 출제되기는 했지만...그래도 고3 때는 모의고사 치면 시간이 남아서 20~30분 정도 항상 잤었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를 쳤다. 시험 끝나는 시간이 생소해서 몇 번이고 확인해가며 시험을 치렀다. 사탐 치다가 과목 바꾸라는 벨 소리를 듣고는 순간적으로 저게 뭐지 하고 생각했다가 눈치를 챘다. 채점하려고 하는데 문항 옆에 점수가 표시 안된 건 몇 점짜리인지도 알 수 없어서 옆에 앉은 애에게 물어봐야 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성적은 맘에 들었다. 사실 두어 달 공부한 것 치고는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적이 나왔다. 언어는 꽤 빠르게 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학원 언어영역 최고점이 95점이라고 했는데 내 채점 결과로는 내가 96점이었다. 선생님께 당당히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채점하다가 문항 점수를 착각한 것이었다. 외국어는 쉬웠다. 쉬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는 카투사 들어가려고 토익 공부를 했었는데 만점은 못 받아보고 만점 바로 아래 점수는 받아본 적이 있었다. 물론 카투사 선발 확률과 토익 점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증명해보였다. 그 뒤로 영어 공부 별로 안 해서 많이 녹슬었지만 부잣집 망해도 삼대는 간다. 문제 다 풀고 20분쯤 남아서 그냥 잤다. 학기 초에는 사회탐구도 범위가 좁아서 역시 할만했다. 

 문제는 수리였다. 70점이란 점수가 나왔는데 몰라서 틀린 문제도 많았지만, 채점 결과 2, 3점짜리의 대여섯 문제를 단순 계산실수로 틀렸던 것이었다. 2004년 수능 때 그랬던 것처럼, 아주 단순한 실수들을 수도 없이 저지른 끝에 나온 결과였다. 이걸 여태껏 못 고치나 싶어 걱정이 되었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수능 전까지 완벽히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어와 외국어가 괜찮으니 성적 상승을 생각하면 서울대 정도는 문제없이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목표를 잡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물론 틀린 생각이었다. 

 한참을 공부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내가 국어와 영어 시험에 자신이 있는 것은 글을 빨리 읽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몰라도 글을 언제나 빨리 읽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나는 천재가 아니었으므로 글을 빨리 읽기 위해서는 대충 읽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충대충, 설렁설렁 읽는다. 소설을 읽으면 줄거리만 대충 알 정도로 읽고 신문기사도 요점만 대충 본다. 관심이 생기면 그제서야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본다. 하지만 대충 읽어도 문제는 풀 수 있다. 문제 풀면서 해당 부분만 다시 찾아 정독하면 되니까. 부호 하나하나 숫자 하나하나 빈틈없이 신경쓰지 않으면 틀리는 수학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을 치면 항상 끝까지 한 번 풀고, 앞으로 돌아가서 모든 문제를 한 번씩 더 풀었다. 시험이 특별히 어렵지 않다면 두 번씩 풀고도 보통 20분 정도 남아서 좀 헷갈리는 문제 서너 개를 고민해볼 시간이 된다. 그리고 마킹하면 끝이었다. 외국어 영역의 경우는 주로 듣기 들으면서 사이사이에 빠르게 10문제 정도를 풀어두었다. 이어서 두 번 훑고 마킹하면 역시 20분 정도 남아서 잘 수 있었다. 2004년 수능 때도 이렇게 시간이 남았었다. 재수 첫 모의고사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모의고사 몇 번 더 치르자 예전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영어 시험을 치다가 항상 자니까 이상하게 보는 애들이 많았다. 왠지 으쓱해졌지만, 수능 영어 정도 잘한다고 자랑할 거리는 못 되었다. 고등학생 때라면 모를까 내 나이가 몇인데. 토익 텝스 공부해서 취직 걱정할 나이 아닌가. 

 아무튼 수학도 그렇게 대충 읽고 대충 푼다는 게 문제였고 그게 언제나 실수로 이어졌다. 다른 과목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수학만 정독하려고 고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년 내내 날 괴롭힌 문제였다. 실수를 하는 것도 특정한 패턴이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 데서나 하는지라 잡기가 어려웠다. 집중해서 천천히 하려고 해도 막상 모르는 문제가 나와서 시간이 부족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모르는 문제가 결코 적지 않았기에 그럼 결과는 빤했다. 대여섯 문제씩 실수한 문제를 좍좍 그으면서는 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하면서도 이거 영영 못 고치는 거 아니냐, 이전 수능 때와 똑같이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래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3월 말에는 EBS 연계율이 70%까지 높아진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학원 선생님들이 비현실적인 정책이라며 코웃음쳤지만 입시제도가 사실 현실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수험생 입장에서 안 풀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여전히 뭔 문제집이 좋은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차라리 이쪽이 속 편했다. 학원에서 교재로 주는 것들을 싹 다 풀었고, EBS에서 수능 대비용으로 나오는 것들을 전부 다 샀다. 그 이외의 문제집은 전혀 사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정리한 것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문제집을 한 번 풀고는 틀린 것만 표시했다. 맞은 문제에 동그라미 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고 모의고사 채점할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뭘 모르느냐지 뭘 아느냐가 아니었다. 한 권 다 푼 다음에 틀린 문제만 한 번 더 풀면서 정리했고 다른 문제집 다 풀고 난 뒤에 돌아와 다시 복습했다. 사탐의 경우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EBS 문제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오답노트를 예쁘게 만드는 학생이 많던데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적은 좀체 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수학에 투자했다. 지상과제는 수학 1등급을 안정적으로 받는 것이었다. 언어는 수업 열심히 듣고 문제집 풀면서 감각만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반면 영어는 문법은 대부분 잊어버린 터라 신경을 좀 썼지만, 나머지 분야는 체면치레 수준으로만 공부했고 수업시간에는 주로 잤다. 담임선생님이 영어선생님이었고 수업을 잘했는데 좀 미안했다. 사탐에도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처음에는 정치를 얼마간 공부했지만 사탐 네 과목 공부할 이유가 없어서 정치를 그만두었다. 나중에 만에 하나 성적이 오르면 국사를 그 칸에 대신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학원에 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잠이 부족해서 언제나 피곤했고, 슬슬 지겹고 힘들고 짜증이 났다. 밖은 지독하게 더웠지만 학원 안은 시원했다. 너무 시원해서 탈이었다. 교실이 넓어서 에어컨 주변은 춥고 벽쪽은 더웠다. 며칠을 에어컨 바로 밑에서 찬바람 맞다가 코감기에 걸렸다. 체력이 저하되어서 그런지 도무지 낫지를 않았다.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흘러내려 너무나 괴로웠다. 모의고사를 치면서 한 문제 풀고 코 풀고 한 문제 풀고 코 풀기를 반복했다. 휴지의 산이 책상 위에 쌓였고 코가 빨갛게 헐어 아파왔다. 식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살은 미친 듯이 찌고 있었고 장염인지 뭔지 화장실에 하루에 세 번씩 갔다. 건강 완전히 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결국 감기가 낫기는 했지만 그 뒤로도 건강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가끔 친구들을 보면 우울해졌다. 나는 1년을 휴학했기 때문에, 군 제대 후 칼복학한 경우의 친구들은 이미 4학년 마치고 졸업해서 LG니 삼성이니 하는 대기업 취직해서 떵떵거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고시니 취직자리 알아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어찌되었건 다들 나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내가 설령 이 재수를 성공한다 치더라도 대학 졸업하면 나의 20대는 끝난다. 비싼 돈 들이고 노력 들이고 시간 들여서 그런저런 대학 졸업장 하나 얻는 것 이외의 의미가 있을까? 준비 없이 30대에 들어서게 될 내게 미래가 있을까?

 그럼 지금 죽지 그래. 하루 두 번 지하철이 플랫폼에 들어설 때마다 철로를 내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앞을 향해 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간단히 끝난다. 그 뒤에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모님 슬퍼하고 친구 장례식 와 봐야 너 죽은 뒤의 일이다. 죽은 뒤에 천국이 있냐 지옥이 있냐. 하느님이 있냐 부처님이 있냐 뭐가 있어. 그냥 끝이지. 물론 나는 죽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미국서는 강도에게 머리에 권총 여섯 발 맞고 병원까지 기어가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팔다리 없이 태어난 사람도 책까지 내고 즐겁게 잘만 살더라다. 대학 잘리다시피 스물 여섯 살에 재수한다고 하면 더더욱 죽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신문을 펼쳤는데 광고에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늦었을 때 맞다'고 적혀 있었다. 유명한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빠른 거'라는 말은 사실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너는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 죽을 수는 없잖아. 늦었다는 걸 직시하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우고 살아야지. 문제는 성적보다는 결국 어딜 가서 무얼 하겠느냐는 것이다. 문과가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어쨌건 이건 내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였다. 성적이 아무리 엉망으로 나오더라도 1년 더 재수할 수는 없으니 지방대라도 가야 했다. 그럼 어디 가서 뭘 해야지 먹고 살 수 있는 걸까. 사실 성적보다 골치아픈 문제는 이것이었다. 서른 한 살 먹고 대기업 취직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교대 가서 요즘 경쟁이 치열하다는 임용고시라도 노려볼까. 통번역과라도 들어가서 번역가로 박봉에 시달리며라도 살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성적부터 안정시키고 보자고 생각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GvQkl7qa6RQ 

 Bill Conti - Going The Distance (Rocky) 
 이 음악의 의미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재수 내내 음악을 많이 들었다. 음악 들으면서 공부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공부가 막히고 기분이 우울할 때면 별 수 없이 듣게 되었다. 공부에 지장이 덜 되도록 타협안으로서 가사 없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근사한 영화 OST 같은 거 들으면 기분이 확 풀렸다. 하지만 집중력에는 확실히 손해였고,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기억에 새겨지면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그 노래가 계속 맴돌아 방해했다. 별 도리 없이 끊는 수밖에 없었다. MP3에 들어있는 모든 음악 파일을 지우고 정 음악이 듣고싶으면 가끔 라디오로 KBS 클래식 FM을 들었다. 고3 때도 많이 들었던 채널이었다. 정말 좋은 음악이 많았지만 대부분 가사가 없고 생소한 물건이었으며 같은 곡이 계속 나오는 경우가 없었기에 머릿속을 맴돌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 원서접수 전날 동네 할인마트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부루퉁한 표정의 남자 직원이 왜 왔냐는 식으로 묻길래 선뜻 말이 안 나와, 아...그, 여권 사진 같은...하고 운을 떼니까 수능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 하고 말을 가로채고는 몇 장 찍어주었다. 언뜻 불쾌했지만, 지금 나이 먹고 수능 치는게 쪽팔리면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서 접수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7년만에 찾아간 모교는 겉보기는 똑같았지만 어느새 운동장 구석에 지하주차장이 딸린 체육관이 들어서고 바닥에 마루장판을 깔고 교실 학생 밀도도 많이 성글어지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4층 진학지도실에서 재수생 원서 접수한다는 글이 쓰인 A4 용지 아래에는 실내화를 신고 올라오세요 하는 문구가 붙어있기에 솔직히 망설였다. 둘러봐도 실내화가 보이지 않았고 덧신조차 없었다. 내 앞에는 역시 재수생이 틀림없는 자그마한 꽁지머리의 여자 하나가 역시 원서 접수하려는 듯 건물에 막 들어서고 있었는데, 조금 주저하다가 신발을 벗더니 양말만 신고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게 아닌가. 당연히 나도 따라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바닥은 매우 매우 더러웠다. 나처럼 마루장판 깔기 전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인 게 틀림없었다. 

 원서 접수하면서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신분증을 슬쩍 훔쳐봤는데 주민번호 앞자리가 84로 시작하는데다가 그 신분증이라는 게 부산교대 학생증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것도 여자니까 군대도 안 갔다왔으니 지금쯤은 대학 졸업한지 오래일 거 아냐. 교대 나왔지만 임용고시 줄줄이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어디 한의대라도 가고 싶어하나? 왜 수능을 다시 치려고 하지? 왠지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안도 되었다. 지금도 수능을 어떻게 쳤을까 궁금하지만, 나는 사실 그 여자 이름이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1년 선배였으니까 내가 아는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볼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D 데이가 300대에서 200대로, 또 100대로 줄어들었다. 군대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하루는 느리게 가더라도 한 달은 빠르게 간다. 하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고, 한 달은 내가 이미 떠나보낸 과거니까. 찬바람이 불어도 모기가 기승을 피웠지만 가을이 오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수시접수한다고 바쁜 애들이 많았지만 내가 접수할 이유는 없었다. 

 9월 모평 이후로 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수업만 대충대충 듣는 수준이었고 별도 공부는 거의 안 했었다. 모의고사 문제는 풀었지만 거의 아는 것만 찍는 수준이었다. 공부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9월 모평에서 드디어 수학이 1등급이 나왔고, 2주 뒤의 다른 모의고사에도 1등급이었다. 수학이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착각해서 사탐 위주로 공부해야겠다 싶어졌다. 조금만 성적 올리면 서울대학교도 도전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값도 물론 중요했지만 현실적으로 국립대니까 등록금이 쌌다. 등록금이 걱정이라면 장학금 받으면 된다는 말은 하질 말기 바란다. 아무튼 문제는 내게 국사는 기초조차 없다는 거였고 국사 수업은 기초 넉넉한 재수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내겐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업을 포기하고 자습을 시작했다. 

 국사 공부는 매우 단순하게 했다. EBS에서 50강쯤 되는 인강을 MP3에 다운로드받았다. 웬 뚱뚱한 남자 선생님이 나오는 거였는데 알고보니 2010년이 아니라 2009년 거였다. 큰 상관은 없었다. 통학하는 데만 40분 정도 걸렸는데 주로 오가면서 말하는 것만 들었다. 어차피 단순암기과목이고, MP3의 조그만한 화면 봐야 별 소용도 없었다. 가끔 칠판에 지도라도 그리는 성 싶으면 잠깐씩 화면을 켜서 봤다. 한 화씩 보고 교과서를 펴서 해당 분량을 그냥 외웠다. 교과서 나오는 모든 문장을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 무작정 외웠다. 길거리 다니면서 중얼중얼하자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교과서에 없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 이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외우고 나면 마지막으로 문제집을 풀었다. 효과는 있기는 있었다. 다만 너무 늦게 시작했고 진도 역시 너무 느렸다. 

 슬슬 수능일이 다가오면서 학원을 그만두는 애들이나 다른 학원 다니다 때려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많아졌다. 재수학원에서 여자 여자 사귀고는 노닥거리는 애들도 많았다. 사실 나는 애들 이름조차 거의 모르는 편이었지만 매일 보는 얼굴이 익지 않을 리는 없었다. 처음엔 재미있던 선생님 농담도 슬슬 질려가고 맘에 안 드는 수업이라고, 독학하겠다고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는 애들이 줄줄이 늘어났다. 사탐의 경우 한 시간에 세 명밖에 안 듣는 처참한 경우마저 보였다. 선생님이 불쌍해 보였고 어차피 독학 따위 자신없었기에 나는 국사를 제하고는 수업을 꾸준히 들었다. 물론 종종 자기는 했다. 




 D-100일 이후로는 거의 정형화된 틀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명확히 시간표와 달성분량 같은 걸 짜서 공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얼마만큼 공부해야겠다 하는 양과 규칙은 확연히 잡혀 있었다. 다만 이제는 일찍 자려고 애썼다. 수능 전날도 새벽 2시에 잘 건 아니니까. 하지만 버릇이 잡혀 있어서 막상 일찍 자기가 쉽지 않았고 낮에 조는 버릇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불안했다. 

 더 불안한 건 성적이었다.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그나마도 자꾸 미끄러졌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 성적을 자신만만하게 받아들고 생각했을 때는 지금 내가 이런 성적 받는 상황에 처해 있을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성적은 오히려 내려가기만 했다. 수리 성적은 계속 널뛰기만을 반복했다. 쉬울 때는 1등급이 나왔지만 조금만 어려워지면 3등급까지도 떨어졌다. 공부를 더 한다고 꼭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물론 수학적 기초가 많이 약하긴 해도 어려워서 못 푸는 건 아니었다. 문제가 어려우면 풀긴 풀더라도 검산할 시간이 없어서 계산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어 틀리는 것이다. 두 번씩 검산할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고칠 수 있었고 9월 모평 때처럼 1등급이 나왔다. 하지만 수능이 그렇게 쉽게 출제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또 두 번 검산한다 치더라도 한 번 실수했는데 두 번 연달아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어느 문제를 실수했는지 알 수 없으니 모든 문제를 다 검산할 시간이 없는 한은 검산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객관식의 경우는 내가 실수하면 보기에 답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다고 보고 주관식 위주로 검산을 실시했지만, 제일 앞페이지의 객관식 문제를 실수로 틀리는 경우도 많았다. 한 선생님은 그 문제를 자살 방지용 문제라고 부르기까지 했었는데도 그랬다. 충분히 풀 줄 알면서 틀린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고, 2004년 수능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들었다. 

 국사에도 시간을 꾸준히 투자하고 있었지만 외울 분량이 너무 많아 성적이 오르는 속도는 너무 느렸고, 타 과목들의 성적도 그닥 동향이 없었기에 서울대 갈 가망도 없는데 왜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자기만족이었을 것이다. 올라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희망 하나는 걸고 싶은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 

 그래도 차마 제2외국어까지는 공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했었고 재수 시작하면서 수능 기출문제를 풀어봤긴 했다. 문제가 너무 쉬워서 고등학교 적의 희미한 기억만으로도 몇 개를 풀 수 있었다. 걱정 덜었다고 좋아했지만 알고보니 내가 봤던 건 2003년의 기출문제였고 요즘의 독일어 수능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아랍어를 하려고 EBS 프린트물만 잔뜩 뽑아두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인강 하나 제대로 안 보고 포기해버렸다. 입맛이 썼다. 




 수능을 한 달여 앞두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쳤는데 결과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떨어지지 않는 건 영어 성적 밖에 없었다. 언어가 2등급 나오고 수학이 3등급 나왔을 적에는 한 번은 웃고 넘길 수 있었는데 그 다음번 모의고사엔 성적이 더 떨어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오르기는커녕 사탐을 포함한 전 과목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까지 쳤던 모든 모의고사 문제지를 모아두었다가 계속 복습에 활용했다. 외국어 영역은 문법 관련 문제만 스크랩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언젠가 한 번은 모의고사에 좀 까다로운 수학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틀렸다. 푸는 법은 정말 쉽지만 단순 계산이 짜증나게 복잡한, 그야말로 지저분한 문제였고 그래서 틀렸다. 복습한다고 이때에 다시 풀어 보았지만 또 틀렸다. 세 번 네 번을 풀었지만 여전히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풀 때마다 죄다 다른 곳들에서 참으로 개성있게 계산이 틀린 부분이 나왔다. 검산해도 어디서 실수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지와 일일이 대조해야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가 있었다. 여섯 번째 풀다 여전히 답이 안 나오자 포기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럴까. 수학 공부가 정말 하기 싫어졌다. 수학이란 존재를 저주하고 싶었다. 왜 내 발목을 이렇게도 몇 년씩 잡는 걸까. 물론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사실 수학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문제였지. 그게 더 골치 아팠다. 

 딴에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수능 전날 긴장으로 밤잠을 못 잘까봐 일부러 두 시간만 자고 시험을 쳐보기도 했다.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 적어와야 할 테니까 시험 치고 시간을 남겨서 그거 옮겨적는 연습도 몇 번 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에는 문제가 풀렸다. 지금은 풀리지 않는다. 이게 분명히 답일 거라 생각했는데 매겨보니 아니었다. 대체 왜지? 슬럼프가 온 것이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일까?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뜯었다. 가망 없는 국사 공부 따위 때려친 지 오래였다. 

 뚜렷한 해결책 없는 채로 아까운 시간만 줄어들어갔다. 300대였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두 자리, 그리고 한 자리가 되었다. 재수학원이 종강했고 사물함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교재들을 마대자루에 넣어 버리고 집처럼 익숙했던 교실을 떠났다. 작별인사할 애들조차 없었다. 아웃사이더짓 너무 심각하게 했었나 생각했지만 사실 눈앞에 닥친 문제에 그런 거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EBS 최종 모의고사 언어/수리 3회짜리를 수능 바로 직전에 차례로 풀려고 아껴두었다. 수능 삼일 전에 그거 언어영역을 펼쳤는데 지문이 안 읽혔다. 또 틀리면 어쩌지, 또 그러면 어쩌지. 몇 문제 풀다가 그만두고 수리를 펼쳤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문제 풀고 바로 그 문제 답을 확인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서너 문제를 줄줄이 틀리고 나자 더 이상 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 사소한 계산실수였다. 그 뒤로도 계속 그랬다. 




 수능 바로 전날은 아무 것도 하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상황에 다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실패할 수는 없었다. 이 나이에 또 일 년을 더 투자해 재수할 수는 없었다. 성적이 나오면 어디든 가야 했다. 거기에 만족해야 했다. 거기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시험 못 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조차도 차마 들지 않았다. 최종 정리할 때는 수능 전날에 이거 요약해놓은 거 총복습하고 저 책 보고 해야지 하고 한 달 전에만 해도 계획했는데 수능 전날이 막상 닥치니 정말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가방에 수정테이프를 두 개 넣고 사인펜을 세 자루 넣고 잘 깎은 연필도 두 자루씩 넣고 샤프심도 세 통을 넣고 지우개도 새 걸 하나 더 샀다. 혹시 모르니 많이 가져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고 서랍 안에 집어넣고 MP3도 역시 서랍 안에 넣고 아예 잠가버렸다. 성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런 건 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일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하는둥 마는둥 하다 밤 9시에 이불을 폈다. 잠자리에 누워서 내일은 수능치는 날이 아니야 하고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며 관련된 모든 생각에서 도피하려고 시도했다. 어차피 못 칠 바에야 긴장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잠은 금새 들었지만 여러 차례 깨었다. 악몽을 꿔서였는지 뭐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차례 깨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새벽 다섯 시였던가, 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와서는 조용히 기도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수능 한파가 오지 않아 특이하게도 전혀 춥지 않았던 시험일 아침. 나는 여전히 오늘이 수능일이란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거의 아홉 시간을 잤지만 매우 피곤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이뇨제라고들 하니 참았다. 수험장은 걸어서 20분 걸리는 꽤 가까운 곳이었지만 부모님께서 태워다주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승용차들과 도시락을 든 수많은 수험생들과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와 경찰들, 호들갑피우며 선배들 응원하는 고1 고2 학생들까지, 이 광경을 내가 다시 보게 되다니. 

 달라진 건 지난 7년간 부모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하고 흰머리 뿐이었다. 못난 아들을 먹이겠다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하고 점심 도시락을 싸던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방 안에 몰래 들어와 자는 척 했던 내 얼굴 옆에서 기도를 올리던 아버지의 얼굴 역시. 이미 환갑도 지나신 분들이다. 나는 무어가 잘나서 번듯한 월급봉투 하나 받아오지 못하고 이렇게 부모님을 고생시키고 있는가. 목에 뭔가가 걸려 흔해빠진 잘 치고 올게요 같은 말도 못하고 묵묵히 차에서 내렸다. 

 부모님 작별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데 한 학생이 손 들고 뭔가를 하다가 내 얼굴을 때려서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 순간 든 생각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학생 뒤통수에 대고 뭐라 화를 낼 생각도 못했다. 깨진 거 아냐? 안경은 멀쩡했지만, 만약 깨지기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비 안경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언제나 모든 상황에선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운이 좋건 안 좋건 상관없다. 나는 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불안해졌다. 

 복도로 들어서니 선생님이 비닐로 된 덧신을 나눠주며 신으라고 했다. 잘 맞지 않는 덧신을 신발에 찢어져라고 우겨넣다가 문득 옆을 보니 다른 몇몇은 자신있게 쇼핑백에서 슬리퍼를 꺼내 신고는 계단을 올라가는 게 아닌가. 덧신을 씌운다 해도 운동화를 종일 신고 있으면 발에 땀 차니까 불편한데. 재수학원에서 쓰던 슬리퍼 가져왔으면 되는데. 대비가 되어 있기는 뭐가 되어 있어. 

 그것보다 좀 더 큰 문제는 시계였다. 알람 기능 같은 거 있는 디지털 손목시계는 안 된다기에 항상 쓰던 것 대신에 집에 굴러다니던 싸구려 증정품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가져왔었다. 고등학교 중학교 때 나는 항상 시계를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학교 종 치는 순간에 맞추는 버릇이 있었다. 방송 시보에 맞춘다고 해도 학교 시계가 그것과 몇 초쯤 차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만약 시험 치는 중에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면, 지금 대략 3분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2분 37초 남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건 꽤 큰 차이가 있다. 재수할 때에는 모의고사 칠 때마다 그렇게 했다. 수능날도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근데 이 망할 놈의 싸구려 시계가 시간을 맞추려고 용두를 돌리니까 툭 빠져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사인펜 세 자루 챙기지 말고 시계를 두 개 가져와야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1교시 시작할 때까지 거의 시계와 씨름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더 열받는 건, 정작 시험이 시작되자 상당수의 수험생이 차고있는 디지털 시계에 대해서 감독관이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디어 감독관이 들어오고 시험 준비가 시작되었다. 여러 모로 찜찜했지만 최대한 노력한 건 지금 이 시험이 수능이 아니라고 내 자신을 착각시키려고 애쓴 것, 그리고 긴장을 풀고 문제에 집중하기로 한 것 두 가지였다. 시험 망해도 부산대학 정도는 갈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집에서 가깝고 하숙비 안 들고 국립대라 등록금도 싸고 얼마나 좋은가. 거짓 생각이라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던 것 같았다. 참고로 부산대학에 불만은 없다. 누나가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언어는 처음엔 집중이 안 되어 당황했지만, 곧 익숙해져 풀다보니 꽤 무난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반가운 건 공과대학 2학년 때 들었던 데이터구조/알고리듬 수업에서 어레이하고 링크드 리스트가 난데없이 지문으로 나왔던 것 정도였다. 시간 아낄 수 있다고 즐겁게 생각했지만, 배운 지 오래되서 결국 지문 읽고 풀어야 했으니 별 소용은 없었다. 어쨌건 무난하게 두 바퀴를 돌았고, 끝날 무렵에는 헷갈리는 선택지가 몇 개 남았다. 바로 며칠 전의 실패가 머릿속에 남아 과연 점수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되었다. 내가 정답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란 보장은 없었다. 시계를 정확히 맞추지 못했으므로 불안해서 여유시간을 좀 많이 잡고 마킹을 시작했다. 덕분에 OMR 마킹을 보고 가채점용 답안을 수험표에 옮겨적은 뒤 확인까지 하고도 시간이 좀 남았다. 

 수리 나형은 쉽게 느껴질 정도여서 꽤 빨리 풀었고 남은 시간에 주관식 문항은 모두 검산을 실시했다. 물론 이야기했듯이 쉽다고 해서 잘 친다는 보장은 내겐 없었다. 검산을 했는데 틀린 문제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맘에 무척 걸렸다. 9월 모의평가 때는 검산해서 5문제의 답을 고쳐서 맞췄고 1등급을 받았었다. 답안지 걷어갈 때 앞자리 앉은 학생(얼핏 듣기로 강남대성 출신인 것 같았다)의 주관식을 슬쩍 보다가 내 것과 답이 몇 개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또 사소한 덧셈 같은 거 줄줄이 틀리고 쟤가 맞았겠지, 아무렴 내가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있어 하는 생각에 또 우울해졌다. 

 점심 시간에는 과자류라면 질색을 하시는 어머니가 웬일로 초콜렛을 도시락에 넣어주셔서 먹었는데, 둘러보니 수험생들이 죄다 단 거 하나씩 들고 먹고 있었다. 아마 어디 방송에서 전문가니 하는 사람이 나와서 초콜렛이 수험생에 좋다 같은 이야기를 최근에 했었던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점심은 조금만 먹었고, 목이 말랐지만 물은 최소한도로 마셨고 화장실에는 쉬는 시간마다 두 번씩 갔다. 사탐 시간에 화장실 가고싶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재수학원에서 모의고사 치다가 사탐 시간에 두 번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던 적이 있었다. 

 외국어는 만만하게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빈칸추론에 까다로운 문제가 하나 있어서 살짝 당황할 뻔 했었다. 해석은 되는데 답이 헷갈리는 것이다. 세 번째 풀 때 답을 고쳤지만 조금 불안했다. 사탐은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에 꽤 편한 마음으로 쳤다. 국사는 아는 것만 빠르게 풀었고, 한국지리와 경제는 헷갈리는 문제가 몇 개 있어서 시간이 빠듯했다. 시계가 시보에 몇 분 몇 초 늦는지 시험지에 적어놓고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썼다. 사회문화는 예상대로 쉬워서 사탐 다 푼 다음에 지리와 경제의 마킹을 수험표 뒷면에 옮겨적고도 시간이 남았다. 

 아랍어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치지 말고 일찍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그리고 나 같은 생각을 한 수험생들이 십여 명이나 교실서 빠져나가 포기각서 쓰고 집으로 갔지만 그러기엔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각서 쓴다 하더라도 안 치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왠지모르게 들어서 치기는 쳤다. 예상대로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고, 풀 수 있는 것도 하나도 없었지만 왠지 다 찍고 자기엔 쪽팔려서 열심히 푸는 척 했다. 그 짓도 몇 분이나 할 수는 없으니 결국은 OMR에 적당히 예쁜 모양이 되도록 마킹하고, 괜스레 페이지를 넘겨 고2 때 제2외국어로 공부했던 독일어나 몇 개 풀어보려 애써 보았다. 2004년 수능 독일어는 정말 쉽게 출제되어서 지금도 몇 문제쯤은 맞출 수 있었는데 2010년엔 그렇지 않았다. 결국 그래도 시간이 남아 엎드려 잤다. 잠이 안 왔지만 고개 박고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종료 종 치고 시험지 거두고 감독관이 모두 확인한 후 퇴실해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 왜 그리도 시간이 길게 느껴지던지 모르겠다. 




 거의 뛰다시피 수험장을 떠났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부모님이 중국요릿집에 데려다주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 박혀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M모 사이트에 접속했다. 의외로 컴퓨터로 가채점하는 방법을 몰라서 한참 헤맸다. 제일 불안한 수리 나부터 채점하기로 했다. 92점. 한 문제는 계산 실수고 다른 한 문제는 풀이 자체가 잘못되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채점해 보았다. 결과는 동일했다. 운 좋으면 1등급도 나올 수 있는 점수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서 충분히 대박이다. 1 더하기 1을 실수해서 6문제 7문제 틀리고 70점대 점수 받지 않는 것만 해도 천운이다. 

 고함지르고픈 생각을 억누르고 언어를 채점했다. 막상 어렵다고 느낀 문제보다는 애매하다고 느낀 문제를 두 개 틀렸다. 외국어는 97점 이상은 나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었다. 사탐이 걱정이었는데 거의 만점 아니면 하나씩 틀렸다. 국사는 3등급 턱걸이할 수준까지로 오르긴 했지만 좋은 점수는 못 되었었고(중간에 공부를 포기하면서 근현대사 관련 부분을 거의 공부 안 했던 게 제일 큰 문제였다. 빠짐없이 다 틀렸으니.) 아랍어는 채점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종합해보면 언수외에 사탐 3과목이 1등급이니 여태껏 친 모든 모의고사와 수능을 통틀어 가장 잘 친 점수였다. 서울대야 물 건너갔지만 연고대 웬만한 과 정도는 문제없이 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야. 나도 운이 좀 따라주는구나 하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의심도 좀 들었다. OMR 마킹 다 한 뒤에 OMR 카드 보면서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을 옮겨적고 난 뒤 확인까지 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부실한 인간에겐.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고로 지금 기뻐해선 나중에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경험해본 적이 있잖은가. 부모님조차도 내 성적을 믿고는 싶지만 믿어도 될까 하는 눈치였다. 

 성적 발표날까지는 주로 그런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 물론 입시 관련 인터넷 사이트도 열심히 뒤지고 M모 사이트 사장이 하는 입시설명회 가서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부당함에 대한 장광설을 듣기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1년 동안 살 많이 붙었다. 젠장.) 맛있는 것도 먹고 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성적 발표날에 모교 찾아가서는 원서 접수날처럼 양말발로 더러운 마룻바닥 위를 걷는 대신에 자신있게 구석의 신발장을 열고 귀빈용이라 표시된 슬리퍼를 꺼냈다. 진로상담실에서 명부에 내 이름을 서명하면서 심장이 잔뜩 쿵쾅거리는데, 내 것을 찾기 위해 성적표를 뒤적이던 선생님이 내 성적표를 주기 전에 한 번 슥 보고는 한 마디 던졌다. 학생 공부 잘하네 하고 말했다. 긴장한 마음에 그럼 대체 얼마나 잘해야 정말 잘하는 거죠? 하고 따질 뻔 했다. 낚아채다시피 성적표를 받았다. 

 의외로 나는 성적표에 표준점수하고 백분위, 등급만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성적표 받아들고도 이게 원점수로는 얼마나 차이난다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성적 같아 보였고, 사실 나중에 집에 와서 대조해보니 가채점한 것하고 단 1점의 차이도 없었다.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사하고 제2외국어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서울대 중하위권 정도는 턱걸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좀 남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히 과욕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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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수능 치는 사람들이 한번 봐줬으면 좋겠음





난 청주대 다녔다

근데 그냥간건 아니고 재수해서 간거였다



가고 나서도 맨날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창피해서 친척집엔 가지도 않곤 했다

대학 오티 같은건 가지도 않아서 아싸였고

일주일도 안되서 슬슬 학교수업도 빠지기 시작했다


정말 말그대로 21살이 될때까지 한게 아무것도 없었음




어느날인지 정확히는 기억 안나는데,

눈 존나게 오던 3월이였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여태 허송세월로 허비해온 시간들과

어떻게 살아나가야 될지 막연할 뿐인 현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흘러만 가고있는 인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여지껏 난 특별한 새낀줄 알았는데 말야.


자퇴하던날 마지막으로 교실에 들어온 나에게 학우였던 이들이 한 말들..

'공부 안하다 나중에 보스캥거루처럼 되고 싶냐'고 떠들고 다닌다는 전 담임선생..

자퇴한 날로부터 한마디도 말을 해본적 없는 아버지..

재수시절 수능 전날에 컴퓨터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시던 어머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밖에 없는 과거의 날들을 생각하면서

난 집에 들어가기 전 소주 한병을 들이켰다

그리곤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지




난 다음날 묶고 다닐 정도로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지난 인생에 대한 반성과

마지막으로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냈어

그리고 다음날부터 학원에 들어갔지

2010년 3월 말이였다





그때부터 하루 13시간정도의 시간을 학원에서 보내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공부했더니

뭐 하급반이였지만

2달 안가서 반에서 1등을 하게 되더라고.
 
평생 해본적도 없었던 1등을 해보니까

노력하는 만큼 보답해주는 이 공부란 것에 대해 재미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6월.. 9월..

계속 날들이 지나가면서

점수는 계속 올라갔고,

슬럼프를 겪는다던지

공부에 대한 싫증을 느낀다던지 하는 일이 없었던 나는

별 문제없이 수능날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수능날.

이미 2번이나 봤던 수능이였는데

이번에야 비로소 긴장되고 떨렸다
 
정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오늘 내가 노력해온 것들이 보답받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뭐 곧 시험은 시작됬고..

시간은 느낄새도 없이 흘러갔음





지금도 의자에 앉아서 생각하면 그 삼수시절이 꿈만같다.

게임하고만 얽혀온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줄이야

수능이란 시험을 겪으면서
 
단순한 성적표 이외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무언가를 얻은것만 같은 기분이다




정말 공부 하라는 말이 틀린말은 아닌거 같아

공부를 시작하면서

학교도 자퇴했고

게임밖에 모르던 21살 별볼일 없던 놈이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잖아

학교를 자퇴한 새끼가 언젠가 학교선생을 하게 될 처지가 되었다니 정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임.
.
.
.




너희들도 언젠가 느끼겠지만

교육청에서 성적표를 받고 

하늘을 보면서 집으로 걸어올때 느껴지는 그 기분은

정말로 진정하게 노력해온 사람만이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번 후회없이 공부해봐

닌 레알존나시발멋지게성공할수있다고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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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야 뭐 사캬형처럼 감동적인 계기나, 목적을 가지고 공부해온 것도 아니고
성적이 극적으로 향상된 케이스도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날보고 도움되는 사람 있을까 싶어서 수기 써볼게

중학교

사실 나는 물론 어렸을때부터 물론 상위권에 속하는 학생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1등만하는 그런(지금 내가 입학한 대학의 이미지에 맞는) 학생은 아니였어.
게다가 중학교 2학년 시절 흔히말하는 사춘기를 겪었어.

여자문제, 부모님과의 갈등, 게임중독 같은 것들 때문에 이미 남부럽지 않은 시기를 거치고 중3이라는
나이에 들어서게됬었지. 사실 우리 중학교가 그래도 이 지역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이 오던 학교라서
상위권은 나름 튼튼했어. 지금도 보면 그때 최상위권은 모두 서울대에 입갤해있어.

그런 애들 사이에서 나는 그냥 반에서 1등정도 하는 수준이였고 전교에서는 한 10등안에만 드는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어. 물론 객관적 입장에서 보기엔 잘하는 수치였지. 근데 중학교 그당시에는 내가
별로 성적이나 대학에 대한 욕심도없고 그냥 막연하게 의사를 꿈꾸던 시절이여서 내 기준에서 하는 얘기지만
내 성적에 비해 공부를 정말 안했던거같아.

성적은 실업계나 겨우 갈만한애들이랑 놀았고, 그당시 공부를 안하는데 성적이 잘나온다고 학교에 소문이 났었으니
아마 내 개인적인 기준만으로 공부를 안한건 아닐거야.. 

그렇게 공부에 대한 욕심없이 지내다가 중3시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 3년동안 공부 잘한다 잘한다 소리 듣던 내가
전교1등한번 못해보고 중학생시절을 끝낼 순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때 처음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해봤어.
아마 내 공부방법은 이때 확립된거같아. 도서관에 앉아서 문제집을 몇권이고 풀었지..

그리고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왔어. 중3 2학기 기말고사 중간고사를 모두 전교1등으로 졸업했어. 
졸업당시 성적은 전교 6등이였지 아마 이게 내가 고등학교 가서 공부를 하게된 계기가 아닐까 싶어.


고등학교 1학년

고등학교에 입학할때 성적은 전교2등이였어.
나름 우리 고등학교가 시내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만 모이는 고등학교라서 내가 2등을 했다는게 
신기하고 꽤나 자랑스러웠어. 

그리고 자만에 빠져서 공부를 안했지. 1학년때는 공부한 기억이 수학공부밖에 없어. 수학공부도 딱히 수능을
겨냥하고 했다기보단 그냥 수1까지만 끝내보자 라는 생각으로 정석책을 공부했지..

그리고 가끔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얘기하는건데 나는 절대 선행을 빠르게 한 타입은 아니였어.
고1 들어오기전 겨울방학에 10-가,나를 공부했을 정도니깐.. 내 생각에 선행은 빨리했다고해서 좋은것도 아니고
늦게했다고해서 나쁜것도 아닌거같아.

어차피 뭔가를 배운다고해도 계속해서 접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되는게 당연하거든. 만일 선행을 해도 고1때 수1이나 수2를
계속해서 공부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고1들어가기전에 고1꺼 정도만 해두고 이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물론 선행을 더 앞서서 했다면 계속해서 잊지않게 복습해주는거 잊지말구

이런식으로 고1이 지나갔는데, 신기하게도 모의고사 공부한번 한적 없었던 내가
1학년 모의고사에선 모두1등급을 맞았어. 기본적으로 중학교때 쌓아놓은게 있어서 그런지 별 무리가 없더라구.

그리고 1학년때는 내신공부는 시험 2주일전부터 시작했는데, 중학교때도 그랬지만 난 수업을 열심히 듣는 타입이기보단
뒤에앉아서 열심히 자는 타입이였어.. 그리고 1학년때는 자만에 빠져서 시험기간에 피시방다니면서 카오스하느라고
내신이 썩 좋은 편도 아니였지.. 그러다가 1학년 기말고사때 수학시험을 봤는데 이때 내가 평생 상상치도 못했던 점수를
맞았어. 78점이였지. 

태어나서 수학을 70점대로 맞아보긴 처음이였어. 수학 시험공부는 살면서 해본적이 없었는데, 다행히 1등급은 나오긴 했지만
70점대를 맞았다는거 자체가 내겐 큰 충격이였어. 그때부터 수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지

고등학교 2학년

충격적인 점수를 받은 이후로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학교 보충교재부터 손을 댔어. 학교에서 하는 수업은 안듣고
보충교재를 수업시간에 혼자 풀어나가기 시작했지. 그렇게 해서 보충교재를 모두 푸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어.
그리고 학원을 다니면서 학원에서 주는 문제외에도 선생님께 문제를 더 달라고해서 엄청난 양의 문제를 풀기 시작했지.

그리고 개념은 항상 정석(기본,실력)으로 다졌어. 뭔가 특별히 이로운점을 느꼇다기보단 그냥 정석을 많이 푸니깐 나도
정석을 풀었고 정석이 개인적으로 내 맘에 들기도 했고.. 그리고 이때 딱히 수학공부법이라고 할게 없는게, 그냥 말그대로
정석풀고, 문제지풀고 이렇게 공부했거든..

그런식으로 진도를 수2까지 뺐어. 그런데 이때 정말 수학이라는 학문에 빠지게 되었어.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면서
putnam, imo, kmo, 등등 여러가지 경시대회 문제를 혼자 풀어대고, 나가지도 않을 경시대회 책을사서 풀고..
심지어 대학교 수학 학부서적까지 빌리거나 사서 보곤했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내 수학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시간낭비였다고봐. 개인적으로 후회하는건 아니지만
후배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하면 '수리 가형이나 잘해라'이렇게 말해주고싶어..

그리고 저런 학습위주의 수학을 해서 그런지 문제풀이에서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어.
바로 '실수'야.

수학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부분인데, 정말 이때부터 실수가 날 괴롭히기 시작했어.
수리영역에서 공부를하면서 그때까지 모르는문제는 단 한문제도 없었어. 그치만 그게 틀린문제가 한문제도 없다는 뜻은 아니였지
이건 고3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해볼게

그리고, 고2때까지 딱히 외국어공부를 특별히 한적은 없는데, 나는 TEPS를 준비했어.
고3되기전까지만 공부하려고 했던 TEPS라서 단어를 좀 무식하게 외웠는데, 내가 단어외우는 방법은 이랬어
하루에 딱 외울양을 정해. 나는 300개였어. 이걸 수업시간이나 짬짬이시간에 계속 외우면서 다외웠다고 생각된
단어는 포스트잇에 적어서 책상위에 붙여놨어(뜻은 말고 pneumonia 이렇게 단어만) 계속해서 접할 수 있게. 
그렇게 해서 다음날 학교에오고 포스트잇을 다시봐서 단어를 모두 아는 포스트잇만 책상에서 뗏어.
만일 확실하게 안외웠다면 포스트잇만 늘어나고 점점 힘들어지니깐 확실하게 외워야 되는거지. 이렇게 한달을 하니깐
거의 10000단어를 외울 수 있더라고

그리고 다른 영역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L/C는 반복과 꾸준함 만큼 좋은게 없어. 매일매일 55분씩 듣는거야.
시험전날까지. L/C는 들으면 들을수록 오르고 영어를 듣는데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시험은 쉬워져.
그리고 R/C는 항상 시간을 재고 문제를 푸는연습. 만일 점수가 700이 안된다면 기본기를 먼저익혀. 문법공부와 독해공부. 그때는
시험시간에 맞춰서 문제푸는게 아니고 한문제 한문제 꼼꼼하게 해석해야될때야. 그 이후부터는 실전같은 문제풀이.
책은 그냥 How to teps로 공부했고.. 

그리고 항상 모든 시험에 있어서 중요한건 실전과 같은 연습이라고 생각해.
수리 영역은 수리를 보는 시험이지 절대 수학을 보는 시험이 아니야. 수학을 잘하는사람 ≠수리를 잘하는사람 이라고 생각해.
물론 Teps도 마찬가지고. 항상 시간에 맞춰서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해야되. 이게 가장 중요한거야. 공부를 열심히 하기만 한다고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게 아니고 그때 그 분위기에 맞춰서, 시간에 맞춰서 평소에 푸는 연습을 해두어야 시험장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고2때는 공부량이 많은 편은 아니였어. 이때가 제일 틈틈히 시간을 많이써서(?) 놀았는데,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야자, 보충 다튀고 쓸모없는 기타과목수업이 많은 목요일 같은경우는 매일 점심시간에 땡땡이치고
피방가고 그랬어.. 대신 그 외에시간은 확실히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였지.

고등학교 3학년

난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좆같이 보냈어. 독서실을 끊어놓고 엄마 핸드폰에는 독서실 문자를 스팸차단해놓고(문자열차단)
내가 번호를 바꿔서 보내면서 자유자재로 독서실을 드나들었지. 그렇게 겨울방학을 보내고보니
고3 모의고사에 들어와서 꽤나 충격적인 점수가 나왔어. 그게 수리였어. 아마 2갠가 틀렸었을거야..

그때부터 내가 내걸은 모토는 실수와의 싸움이였지. 이때부터 실전과같이 수리영역푸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
100분을 딱 내걸고 긴장되는 분위기속에서 매일매일 하나씩 모의고사를 풀었어. 그리고 내가 실수를 하게되는 사고방식이 어떤건지
공책에 다적어놓았어. 예를들어 ●정적분할때 밑끝을 계산안함.. 이런식으로 말이야

흔히말하는 오답노트는 아니구, 내가 스스로 찾아낸 공부방법이라고 해야되나.. 이렇게 한달 하고나니깐 내가 자주 틀리는
부분과, 내가 문제가 있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어. 신기하게도 실수를 하는 건 몇개의 포인트에서 자꾸자꾸 반복되고 있더라구.
그리고 내가 찾아낸 주된 문제점은,

'문제를 꼼꼼히 읽지 않고 푼다'

라는 점이였어. 이건 대다수의 학생들도 아마 나와같은 입장일 거라고 생각해. 나는 문제를 몇가지 수치만 보고 쉭넘겨서
이게 어떤문제다 내 멋대로 파악해버리고 바로 풀어버리는 타입이였어. 그래서 꼭 조건을 빠트리거나 내멋대로 문제해석을
해서풀었을 때가 있곤 했거든.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고친 습관이 '모든 문제를 밑줄치면서 읽는다'였어. 밑줄치면서 그냥
생각없이 읽는건 절대아니고, 조건에 동그라미 쳐가면서 밑줄치면서 읽었어.

그리고 몇개의 포인트를 항상 시험시작전에 유념해가면서 그 포인트를 놓치는 유형의 문제가 나오면 긴장하면서 풀었어.
이런식으로 실수를 고쳐나가면서 나중에는 넘겨가면서 푸는 문제집있잖아? 그걸 푸는데 10회 모두 만점을 맞고 그런적도 있었어.
물론 수능전까지 실수를 적는 노트는 계속 써나갔지.

그리고 언어영역 공부에 관해서인데, 나는 3년동안 언어영역 2등급이 나와본적은 없어. 그런데 3학년와서 안정적인 점수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가 그때 공부한 방법은 이래.

먼저 내가 모의고사를 풀고 틀린영역을 구별해서 체크해둬. 예를들어 비문학과학/비문학사회/고전시가/... 이런식으로 영역별로
몇개의 문제를 틀렸는지 기록해. 그렇게 기록하다 보면 분명히 자기가 약한 부분이 있어. 그럼 그부분의 문제집을 사다가 (시중에 영역별문제는 넘쳐)
푸는거야. 그렇게 보완하고 또 보완해. 그리고 기본적으로 기출문제집(난 2번풀었어)이랑 EBS문제집 푸는건 잊지말구.

그리고 외국어영역은 계속 1개 틀리거나 다맞는 수준이다 보니깐 그냥 기출에 EBS몇권으로 되더라구..

과탐은 인강들었어. 과탐인강은 꼭 들어. 내가 3학년 들어가서야 인강을 처음 듣기시작했는데(시작이 백인덕), 과탐 인강만큼 좋은게 없더라구.
과탐 공부를 물론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인강을 들으면 포인트를 집어주니깐 훨씬 공부하기가 쉬워. 모르는 길을 가는거보다 
어느쪽으로 가라고 가르쳐주면 가기 더 쉽잖아. 과탐이 그 영향을 다른 과목보다 많이받거든. 과탐은 그렇게 기출풀고 인강만 들어도
1등급 나왔어 나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6월모평때 좋은 점수를 맞았어. 이건 인증한적있으니깐 찾아보면 나올거야..
그런데 여기서 또 자만한게 실수였어. 자만하고 이때부터 다시 카오스의 시작이였어..카오스 악마의게임이야 카오스때매
조지는애들 정말많다.. 이때 애들이랑 PC방다녔는데 (어메이징PC방이라고 있어..) 어메이징PC에서 도원결의를 맺었지..
우리는 다른날 다른시에 태어났으나 한날한시에 이 PC방에서 나가기로.. 

그리고 9월 결과는 처참했지.. 9월모의평가 하루는 충격으로 그냥 집에서 하루종일 누워있었어.
그치만 좌절하지는 않았어.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런생각을 했어. 독기를 품고 그 다음날부터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을 정했지.
기상시간 6시반에 취침시간 2시반쯤... 흔히말하는 4시간자고 풀공부, 고승덕모드에 들어갔어. 아마 내 인생에서 공부를 열심히한건
이때뿐일거야. 그 전까지만해도 놀면서 공부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이때부터 내가 공부안한다는 소리는 아무도 못했거든.

이때 내공부방식은 먼저 학교에 가기전에 문제집을 하나 정해. 그 다음 학교에가서 언어 1교시 시간이 될때까지 문제집을 
풀다가, 언어 1교시 종치는 시간부터 모의고사 시간표에 맞춰서 수능시험처럼 시험을 한번 보는거야. 하루에 한번. 이렇게 
과탐까지 풀고(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아침에 정한 문제집을 풀어) 그다음 문제집 1권을 12시까지 다풀어. 만약 문제집이
너무많으면 과탐은 안 풀때도 있었어. 이렇게 하면 하루에 1권 문제집을 풀 수 있고 그다음 집에가서 자기전까지 오답을해.
물론 학교수업은 하나도 안들었어. 이렇게 하기전에도 안들었지만..

이렇게 수능전날까지 거의 매일 안빠지고 이 패턴을 반복했어.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방향은 아니지만 지금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지 ^^
어떤 방향이던, 지금 내 결과는 내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해. 어떤방식이더라도 흘린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걸 다시한번 깨달았지.

모든 수기를 읽으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나도 이말에 동의해. 니들이 이 수기를 읽던 안읽던간에 정말로 니들이 깨닫고 바뀌지 않는다면 변하는건 아무것도 없어.
공부법은 내가 찾아주는게 아니라 니들이 찾는거야. 마이클 조던이 너희들한테 농구를 가르쳐 준다고 너희들이 프로농구선수가 될 수 있는게
아니잖아? 

중요한건 너희 자신이고. 수기를 읽으면서 나도 뭔가 변하고 나도 뭔가 노력해봐야겠다라고 조금이라도 생각한 사람있으면
이글에 댓글만 달고 얼른 컴퓨터 꺼서 공부해!

내일내일 미루다가는 정말 내일은 커녕 공부시작이 수능 일주일 전이 될 수 도 있어. 오늘부터 시작해
진정으로 땀흘려 공부한사람이라면 하늘이 절대 배신하지 않을거야. 너희들 대입에도 좋은 결과 있기를 빌게!
Posted by 박현수4s
,

#1. 2010년 11월 18일 12:08

어제 스트레스를 좀 받는 일이 생겨서 낮에 수영장에 가서

한 1km정도 수영을 했더니 몸이 피곤했는지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다.

오늘도 평상시처럼 6시에 일어났다가 결국 뻗어버렸다.

큰일이다.

워크샵 이후 달라지려고 했지만 그 각오가 다시 사라지고 있다.

안된다.

빨리 회사로 나가자.


오늘 수능이라서 회사가 바쁠텐데....

가면서 공신닷컴에 올라온 글들을 봐야겠다 싶어서 아이폰을 꺼냈다.

일단 자유게시판으로 갔다.


이상하다.

가장 윗글(가장 새 글)에 한 회원이 쓴 글이 있다.

이 아이 분명히 재수생인데...

지금 이 글을 쓸리가 없는데...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클릭을 했는데 아뿔싸...


10월에 생일이라고 글 썼는데 축하한다는 말과 격려말을 해주지 못해서

내심 미안한 생각으로 있던 아이였는데...

그런 미안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이 아이의 지금이 9년전의 나와 오버랩 되면서

먼저 이런 감정을 겪은 선배로써 도움이 못 된 것 같은 감정이 온 몸을 감싼다.


그리고 다시 생각나는 9년 전의 기억.



#2. 2001년 11월 7일 19:00

시험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이제 지금쯤이면 인터넷으로 가채점을 할 수 있도록 정답이 나왔을 것이다.

야후에 들어가서(그 때는 야후가 지금의 네이버 같은 존재) "수능 정답"을 쳤다.


수능을 보고 나오면서 언어를 본 다음에 조금 혼란스러운 느낌은 있었지만

다행히 그 기분을 잊은채로 수리랑 수탐2(지금의 사탐과 과탐을 합친 영역)을 봤고,

외국어도 듣기가 거지 같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게 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듣기 1문제는 찍었지만 그 정도야 하면서 나왔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니 난리다.

직전 수능에 비해서 급상승한 난이도 탓에 예측이 안된다는 말이 많았다.

그랬다.

분명히 작년 수능에 비해서 어려웠다.

1년 동안 봤던 어떤 시험보다 어려웠다.

단 한 번도 어려운 수능에 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9월 대성 모의고사

10월 대성 모의고사

10월 중앙 모의고사

평가원 모의가 없던 시절에 9월과 10월의 사설 모의는 마지막 담금질의 기회였다.


그리고 저 3번의 모의고사에서

단 한 번도 5점 이상의 감점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분명히 쉬웠다고는해도,

기출인 2001학년도 수능.

만점자가 전국에서 66명이 나왔던 시험에서 고2 때 봤을 때, 398점.

고3때 봤을 때는 399점이었다.


고3 1년 동안 작년에 비해서 조금 어렵다는 난이도에 맞게 설계된 모의고사를 치뤘고,

그런 수능을 준비해왔다.


하지만

작년이랑 비교하면 평균이 40점 정도의 하락이 예상된다는 얘기가 나왔다.

1교시가 끝나고 자살한 학생이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1교시 언어영역의 정답을 보면서 수험표 뒷면에 적어온 답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96점.

100점 만점인 지금과 다르게 120점 만점 시절이다.

언어가 120, 수리가 80, 수탐2(사탐 48, 과탐 72, 윤리 국사 일반사회 한지 12점씩, 공통과학 4과목 각 12점, 과탐 선택 24점), 외국어 80.

이렇던 시절이다.


그런데..

96점.

이건 말이 안된다.

내가 언어를 좀 못하긴했지만

지금 이건 너무 말이 안되는 점수다.


2교시 수리영역

다행이다.

이건 다 맞았다.


3교시 수탐2.

사탐이 앞부분이라 매기는데 난리가 아니다.

역시나 못하는 국사에서 대거 점수가 깎였다.

거기다가 간신히 모의고사를 버텨오던 윤리에서도 틀렸다.

사탐에서만 12점 감점.

과탐을 매길 엄두조차 나지 않는 감점 수준이다.

다행히 과탐은 1점 감점으로 끝이 났다.

선택과목에서 터무니 없는 실수를 했다.


4교시 외국어영역

역시나 틀릴 것이라 생각했던 듣기에서 틀렸다.

2점 감점.


총점 361점.


마지막 모의고사에 비하면 38점이나 떨어졌다.

보통 어려운 시험에서 감점은 상위권 학생들은 평균 이하로 감점되고,

하위권에서 평균 이상 감점되는 것을 감안하면 많이 떨어진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하다.

이를 어쩌나 싶다.


오늘 엄마는 수능 고사장 밖에서 그냥 기다리고 있질 않고

아픈 무릎을 감싸쥐면서 절에 가서 2000배를 했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기고 있는 동안 밖에 있던 엄마한테 점수를 얘기했다.

충격이 큰 모양이다.

어제 수능 전날이라고 특별히 공부할 것이 없다고 거만하게 생각해서

국사책 상,하 2권이랑 국어사전을 가져와서 맞춤범 공부만 했는데...

거만했던 덕을 보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에 출장을 간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한테서 점수를 들은 아버지는 충격이 컸지만.

일단 내일 학교 가서 더 자세히 알아보자..하고 전화를 끊으셨다.

역시나 미안한 감정은 끝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결국 화가 난 나머지.

이 점수를 가지고 무슨 대학에 가느냐고 바로 재수학원에 등록하라고 화를 내시고는

머리를 싸매고 자리를 펴고 누우셨다.


그리고 주변의 지인들의 전화가 오는 것을 받지 않기 위해서,

아예 전화벨도 울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 전화코드마저 뽑아버리고 방에 들어가셨다.


절망적이다.

수능을 앞두고 연이은 모의고사의 고득점이 방심을 낳았나...

아니면 정말 공부할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닐텐데...


억울했다.

그 동안 정말 노력했는데..

공부를 누구보다 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나보다 노력한 사람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는데...

억울했다.


다시 오늘 수능 문제들을 인쇄해서 풀어봤다.

언어 104점

수리 80점

수탐2 112점

외국어는 풀지 않았다.


빌어먹을.

평소에 시험을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긴장에 얼었나보다.

언어는 다시 보니까 푼 기억은 나지도 않았으면서도 8점이나 올랐다.

수탐2도 5점 상승..

이 정도면 그나마 후회는 없을 점수였다.


난 그렇게..

지금 2010년 11월 19일 02시의 수험생들의 심정으로.

2001년 11월 8일 02시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3. 2010년 11월 18일 14:33

"실장님, 수리영역 19 나왔어요."

사무실에서 룰루랄라하면서 뉴스들을 보고 있는 내게 고영건 공신님이 한 말이다.

공신닷컴 본부에서 가장 순수한 고영건 공신님은 본부의 분위기 메이커인데,

강성태 공신님이 지난 금요일에 촬영해서 올린 수리영역 주관식 정답 예측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뭐 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일단 안 나온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혼자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회사 앞 까페에 갔다.

일이 안될 때 자주 가서 있는 곳이다.

갔더니 벌써 소문이 나있었다.


"대표님이 예측하신 주관식 답이 진짜로 나왔다면서요. 축하해요~"

"네 감사합니다."


축하라..

축하 받을 일인가..


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난 수능 격려 영상이나 만화 중에서 이 만화를 가장 좋아한다.


너만 잘봐라.

분명히 우리 사이트 들어와서

글 자주 보는 애고,

우리를 믿는 학생들이라면 분명히 19를 찍었을 것이다.

그러면 분명히 25번이니까 4점짜리일테니까 도움이 되었겠지.


분명히 단순히 찍은 것은 아니다.

몸살 기운이 있으면서,

회사일에 치이고,

집에도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와중에

그 바쁜 와중에 계속 수리영역 주관식 답들을 분석하고

최대한의 규칙성을 찾고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강성태 공신이다.


존경하는 선배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생의 동지이기에,

기쁨도 컸지만,

그만큼 이것이 맞아떨어진 현실도 찝찝했다.


강성태 공신이 2006년 공신을 시작하고 난 다음부터,

자신이 꼭 공부법에서는 한국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

온갖 공부법 글을 보고, 책을 보고, 분석하고, 분석하고 공부법 이론을 생각하고,

또 고치는 과정을 겪으면서 피나는 노력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난 정답이 맞은 것이 슬프기보다...

평가원이 우리가 생각한 로직대로 움직였던 것이 좀 서글펐다.

이번에는 우리의 분석이 맞았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이트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조회수 2000에서 시작했던 강성태 공신의 수리영역 정답 예측 글은 이미 조회수 7000을 넘었다.

그리고 임베디드 된 네이버 플레이어의 재생 수는 50000이 넘었다.


평가원이 가지고 있는 로직이 우리의 분석이 들어맞을만큼 약한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분석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내년 요맘때가 아찔해진다.

모든 인강사이트에서 이런 정답 예측을 하면?

그리고 그런 정답 예측 강의는 분명히 학생들이 사게 되어 있다.

그것은 과연 옳은가?

오늘 우리가 겪은 이 경험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 되지 않을까...

사실 이 고민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머리를 사로잡고 있다.


지난번 한 인강사이트에서 한 외국어 강사가 EBS해설강의를 했을 때,

난 쌍욕을 했었다.

그냥 해설을 읽어주는 정도 밖에 안되는 강의로 돈을 받아 먹는 장사치의 수단에

치를 떨면서 분노하기도 했다.

물론 저것이 업계 2위 사이트의 외국어영역 강사가 할 수 있는 네거티브 마케팅이라고 생각햇지만.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 강의를 봤던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궁금한 나머지 나도 결제를 해서 봤으니까..


이것은 과연 옳은가.


사실 지금 우리가 정답을 예측했고,

그 정답이 적중한 것은.

물론 학생들의 정보력 싸움이라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지만,

엄중히 따져 평가원의 문제 출제 로직 자체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큰 이슈가 되어야 하고,

평가원의 무능력함이 문제제기가 되어야 한다.


오늘 기자인 후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내가 너한테 제보를 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물론 그러고선 수능 시험 문제를 풀어보느라 결국 그 후배의 전화를 받지는 못 했다.



평가원의 로직은,

예측이 불가능해야 한다.

특히 문제의 출제경향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답안의 정렬 혹은 배치 경향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2011학년도 수능을 바라본 나의 수능 후기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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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제가 이렇게 성공한 여러분의 성공수기나 좋은 글을 적는 신성한 공간에 더러운 실패수기를 적는 것에
우선 상당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수기를 적는 것은 여러분에게 성공수기 못지 않게 도움이 될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공자깨서도 앞에 세사람이 지나가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스승이 될거라 하셨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을 흘려 듣지 마시고 반드시 상기하여 주십시오.


서론-간단한 자기 소개
우선 전 예비 삼수생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삼수이상은 일명 장수라고 하여 사회적  냉대와 자기 불신감에 절어 사는 그러한 계층입니다.
전 고등학교 시절 3년내내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괴수 라 불리는 인간이었습니다.
특히 고3 시절 제 몸을 헌신하는 투혼을 발휘하여 현역시절 수능에 기대이상의 점수를 맞았습니다.(일명 480점대라고 하죠)
하지만 수능에 비해 논술 공부가 취약이었던 저는 서울대 법학과 1차 합격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2배수에서 정원을 가리는 2차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불거져 나왔습니다.
저는 서울대 법대 아니면 죽는다는 오기로 공부하였기에 당당히 재수라는 출사표를 던졌고 사람들은 저의 그런 도전정신에 박수를 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후로 저는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불량 정신 상태로 오만과 편견 속에서 재수실패라는 고배를 마시게 된것입니다.
재수때 수능점수는 고3시절 점수에 턱없이 부족한 점수였습니다.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누군가가 그 기대에 배신을 하게 되면 세상에서 버려진다는 사실입니다.


본론
1.수험생에게 있어 인간다워 지고 싶다는 생각은 자살행위와 같다.
저는 중3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뒤쳐졌다는 생각에 한마디로 미치도록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내내 저는 인간이하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에관한 전설시리즈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수능을 마치고 사회를 경험하게 되면서 인간답지 못하게 살았던 제가 너무나도 억울했습니다. 학교에 관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낭만이 피어나는데 저는 낭만은커녕 책과의 결투와 형광등아래의 글자에 관한 기억밖에 없었으니까요.
우선 전 잠을 늘리게 되었습니다. 고3때 평균3-4시간밖에 자지못한 저는 한동안 집중력부족으로 고3때 위기를 겪기도 했고 심각한 다크써클로 몰골로 말이아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집중력 싸움이라고 생각했기에 잠을 7-8시간은 족히 잤고 그이상도 넘게 잔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죄책감은 자기합리화에 자리를 내주게 되어 저는 마냥 행복했고 일종의 특권의식조차 가지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4시간자야 성적이 고득점이 나온다는데 저는 그 배이상을 자도 그들보다 점수가 잘 나오니 말압니다. 잠이란검 정말 신기합니다. 자면 잘수록 늘고 줄일수록 그에맞게 줄어듭니다.
더욱이 수헙생이 전략의도 외로 잠을 늘리는 것에는 반드시 게으름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 게으름으로 인해 저는 학원가는 것이 점점 귀찮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지각 조퇴 결석 한번도 안한 제가 지각 조퇴 결석을 밥먹듯이 하는 불량학생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저는 이제 낭만의 꽃인 이성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여자보기를 돌같이 하던 저는 이 여자 저 여자 저울질하며 공부하는 것 이상의 재미를 두었습니다. 이성과 낭만적인 사랑을 해보겠다고 외모를 꾸며가며, 옷을 멋있게 입어가며 제 눈에 맞는 여인들에게 접근도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아! 드디어 나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겪는 어엿한 로망의 남자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은근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저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공부에 열광하는가라는 보고서를 얼핏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는데 그 핵심이 남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의 발현이라고 하더군요. 남들에게 사랑하며 사랑받는 저는 더이상 공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막판엔 육체만 공부하고 있고 정신은 연애의 맛에 빠진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한마디로 집중상태 제로 인거죠.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오락문화에 맛을 들였다는 것입니다.고등학교 시절 저는 tv는커녕 컴터도 전혀 손도 안댄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부로 무장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tv도 즐겨보고 컴터 게임에도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한마디로 정말 미친거죠. 특히 토요일 새벽에 밤새도록 게임도 해본적도 있을 정도에요.
이렇듯 인간다워지고 싶은 욕구는 그 좋은 의도와는 반대로 역설적으로 오히려 인간답지 못한 쓰레기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더군요.여러분은 이 점을 항상 경계하였으면 합니다. 재수를 결심한 분도 대학에 합격하셔 여유를 가지게 되신 분들도 이 점 명심했으면 해요.

2.어설픈 자만은 나의 영혼을 잠재우는 마약과도 같다.
제가 이렇게 망가진 이유의 핵심에는 자만심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수능에서 고배를 마신 다른 여타 재수생들과는 달리 저는 수능합격 논술 실패라는 것에 지나칠 정도의 자만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난 최고야, 난 엘리트야, 난 감만 유지해도 올해 꼭 성공하게 되어 있어, 난 놀아도돼. 왜냐하면 난 이미 공신의 경지에 올랐으니까'라는 어설픈 생각, 저는 작년 한해를 자만심이라는 마약을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생태는 해이해질정도로 해이해지고 공부는 이미 제 관심에서 멀어져갔습니다. 공부이외의 삶이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이렇게 놀면서도 성적이 올라가는 저는 막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잠,놀이,여자 등등등. 수험생 본연의 자세를 벗어난 것이죠. 제 생각에 어설픈 자만에도 그 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자기합리화입니다. 말도 안되는 자기 합리화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제가 노는 것은 진이보를 위한 퇴일보로 항상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습니다.제가 지금 시점에서 자기 합리화를 정의해본다면 저는 자기기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죠. 제 자신을 속이고 부모님을 속이고 선생님들을 속이고,,, 거짓말의 연속인 거죠. 여러분도 자기 합리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신다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져보세요. 자신을 객관화해보세요. 나는 지금 전략적 휴식을 취하고 있는지, 나태와 게으름으로 무장된 놂을 하고 있는건지.난 오늘하루 과연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는지. 끊임없이 자기반성과 성찰을 하세요.
실패의 아픔을 겪은 제 입장으로서 자만과 자기합리화에 대한 처방전을 내린다면 부단한 자기 반성,자신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줄 아는 객관적 시각(일명 자아의 객관화),그리고 자신에게 현재 주어진 본분과 실제 현실 삶과의 부합성을 따져보는 계속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3.시간관리의 실패.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중금속
여러분은 지금 시간관리를 제대로 하고 계신가요? 저는 이 시간관리의 실패로 결국 수능 실패를 맛보게 되었답니다. 이미 알다시피 잠자는 것에서부터 시간관리에 실패를 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저는 식사시간을 엄청나게 늘렸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주말에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 데 무려 4시간이 걸렸습니다. 점심먹고 수다떨고 잠깐놀고 후식먹고 이러다 해가 저물기 일쑤였습니다. 참고로 저 고3때 밥빨리먹기로 유명했습니다. 공부시간 확보를 위해  단 한번도 5분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점심 굶기를 밥먹듯이 했구요.시간이 아까워서요. 그리고 저에게 자투리시간 활용를 저 전설시리즈를 빛나게 했던 저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자투리시간마다 단어를 외우기 시작하여 한달만에 단어장을 독파하고 화장실에서 볼 일 볼때 간단한 연산연습 가령 '78*123 ,96578/32의 몫과 나머지 구하기' 등을 했었어요.
그런 제가 재수 시절엔 자투리시간 활용율이 제로에 가까워지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친구들이랑 매점가고 여인들에게 작업걸고 집에서는 tv보고 게임하고...
정말 이렇게 쓰고 있는제가 한심할 정도네요.ㅠ.ㅠ
여러분은 과연 시간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고싶네요.

4.아마추어 정신은 나의 가치를 평가절하시킨다
저는 먼저 들어가기전에 프로정신과 아마추어 정신에 관해 설명하도록하겠습니다.
프로정신은 자신의 삶 1분 1초에도 투혼을 발휘하여 치열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이것은 극도의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중,그리고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산물이죠. 쉽게 비유할게요. 혹시 '킹오브 파이터즈'라는 게임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거기서 게이지가 차올라 기를 발산하면 온몸에 반짝반짝불이 들어옵니다.그 상태가 바로 프로정신의 발현입니다. 그 상태가 되야만이 소위 말하는 초필살기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런 상태야만이 성적이 급상승하고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랍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송창식이라는 가수 아시나요? 이분은 자신의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기로 유명하신분입니다. 이 분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무대가 열리기 2시간 전부터 정신 집중을 하며 말한마디 하지 않고 생각을 비운 데 있답니다. 드디어 그 집중상태가 최고조에 이르었을때 무아지경에 빠지는 거죠.
그 밖에 이승엽선수가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하루에 수천 수만번 타자를 치는 연습을 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그의 반대가 바로 아마추어 정신이에요. 현재의 순간에 치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해도 공부를 해도 하는둥 마는둥 하는 것입니다. 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육체만 그 장소에 있는 거죠.
저는 고3때 프로정신에는 훨씬 못 미치지지만 그와 유사하게 되기위해 항상 노력했습니다. 제 좌우명도 '프로가 되자'였으니까요. 공부하기 위해 공부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공부에 방해가 되는 환경을 제거해나갔습니다.그리고 공부 전에 하는 명상을 잊지 않고요. 머리를 비워두는 거죠. 그 일화로 고1때 학원에서 자습을 하는데 학원문이 닫힌지도 모른채 공부하다가 세콤에 걸려서 경비원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재수 때는 1년 내내 아마추어 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루하루를 그냥 아무 목적없이 살아가는 거죠. 제 기억에 작년 한 해에는 공부할 때 항상 다른것에 정신이 팔렸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공부에 재미를 잃고 계속 시계를 쳐다보기 일쑤였죠.  1년 동안 제 정신이 어디 멀리 여행갔다온 기분이에요. 


5.초심을 잃는 순간 나를 잃는다
프로정신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 시행여부에서 판가름 납니다.
프로들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은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들은 절대 자기 변명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누구보다도 엄격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신뢰와 사랑에 충만한거죠.
전 재수하기 전 약속을 단 한번도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죠. 프로들이 자신과의 약속을 그렇게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초심을 잃지 않아서입니다.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십시오. 자기가 처음에 굳데 다짐했던 각오와 신념들을 잊지말고 각골난망 하십시오. 초심을 잃는 순간 여러분 자신을 잃게 됩니다.


결론
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 없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신다면 그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손자께서도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험치 않다. 적을 모르고 나만 알면 승패가 없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그 싸움은 반드시 위험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모르는데 적만 알면 뭐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상대는 실패한 입장에서 봤을 때 단연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주위의 라이벌은 하등 두렵거나 중요치 않습니다.자기 자신을 이겼을 때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세 졌을 때 필패하는 것입니다.
제 실패원인이 여러분도 겪고 있는 문제라서 그 해결에 도움이 되셨다면 그것만큼 바랄게 없겠습니다.제가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저처럼 실패한 후에 후회하면 이미 늦는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제 인생은 2년 늦어졌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려분은 지금 이 순간 당장 자기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래서 제 전철을 밟지마시고 미리 경계하여 반드시 성공하길 기원합니다.


epilogue
작년엔 실패했지만 올해는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각오로 부끄러움을 무릅쓴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를 2가지로 요약하려합니다.
첫째, 60만명에 육박하는 여러분께 걸고 하는 약속임을 분명히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이렇게 단연코 맹세합니다. 올해는 진짜 열심히 공부하여 내년에 성공후기로 다시 찾아 뵙겠다고.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둘째,여러분과 함께 성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겪은 실패 요인들은 아마도 여러분들도 겪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서 내년에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과 함께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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