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익명의 인터넷 공간이라지만 이런 글을 쓰는 건 솔직히 좀 부끄러운 일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새학기가 시작하고 입시생들이 다 자기 갈 길 가고 오르비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갔을 지금에 이르러서야, 3월의 새학기가 시작된 오늘에 이르러서야 밤늦게, 그리고 뒤늦게 이런 글을 써서 올리는 거기도 하다. 그러니 일단 군 제대해서 복학 후 2009년 2학기에 학고를 맞았다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이 먹고 재수 시작하는 점에 있어서 그리 자랑할 거리는 없다.
근데 솔직히, 이전에도 맞아봐서 그런지 꽤 무감각하더라. 아, 올 것이 왔구나.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런 생각 정도 들었다.
사실 대학서 왠만큼 출석 하고 교양만 들어줘도 학고 맞기 쉽잖다. 요즘 같은 학점 인플레 시대에, 아무리 아등바등 교수님 찾아다니고 도서관에서 밤 새우는 짓거리 안 해도, 간신히 턱걸이 출석하고 시험지 절반쯤 비우고 프로젝트 대충 제출하고 C+만 줄줄이 받아도 학고까지는 잘 안 나온다. 3학년 때 그런 거 받는 건 진짜 포기한 인간이 받는 거지. 공부 포기한 인간. 대학 포기한 인간. 취직 포기한 인간. 미래를 포기한 인간.
부산의 집으로 내려가는 동안 천천히 현실감각이 나를 따라잡았다. 이제 20대도 절반 넘게 지났는데, 군대도 갔다왔는데, 더 이상 젊지 않은데. 예전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학고 맞고 군대 갔다왔어도 또 학고다. 안 되니까 포기한 건지 아니면 포기했으니까 안 되는 건지를 고민해 보았다. 난 여전히 정신 못 차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왜 살아있는가를 궁금해했다. 난 뭘 하기 위해 살고 있지?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필요가 뭐지? 선로에 들어오는 부산행 KTX 열차를 보면서 저기 뛰어들면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들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아파트 계단 올라서 4층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집을 지나쳐 옥상에 올라갔다. 난간 너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내리지 못했다. 죽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총 한 자루라도 내 손에 있으면 정말 빠르고 간단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알약 하나라도 있으면 삼키면 끝일 텐데, 편하고 고통없이 죽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게으르게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배치고사에서 덜컥 1등 해버렸던 것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반에서 10등 안쪽에서 놀았는데 어쩌다 그 성적이 나와서 입학식 날 손 들고 선서했는가 모르겠다. 어쨌건 성적은 뭔 이유에선지 몰라도 제법 올랐고 그 뒤로도 전교에서 10등 안쪽은 지켰었다. 2학년 과 고를 때가 되어 부모님은 조금만 더 하면 의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고 이과를 고르라고 했었다. 나는 의대는 왠지 싫었다. 피 튀기는 것도 싫었고 사람 자르고 짼다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고 소독약 냄새 매캐한 병원 찾아가면 무감각한 표정으로 사람 죽고 살리는 것에 대해 직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 싫었다. 의대 붙은 친구 녀석의 요즘 모습이 어떤가 그때 알았더라면 그런 생각 따윈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과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과학잡지도 여러 권 봤었고 과학자니 기술직이니 하는 것도 왠지 매력있게 느껴졌다. 복잡한 기계장치나 멋진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것에서 남자로서 느끼는 매력 같은 것. 그래서 이과에 갔다. 그저 막연하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래되어 잘은 기억 안 나지만 2년 내내 모의고사 성적은 무난하게 나왔던 것 같다. 학원도 가고 내신도 따지고 가끔 야자 째고 PC방 가서 스타도 하고 고3으로서 할 건 다 했다.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전교 1등도 가끔 해봤다. 의대는 어쩌면 갈 수 있을 수도 있었고 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서울대 공대 정도는 무난히 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의대 못 간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능날도 무난했었다. 2003년 겨울에 친 수능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몇 가지는 기억난다. 특히 점심시간에 친구들하고 모여서 밥 먹고 수능 난이도에 대해 수다떨던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수학 쉽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맞장구쳤었다. 쉽다고 생각했다. 사실 쉬웠다. 뉴스에서도,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성적표가 나왔을 때 수리영역에 4등급이 찍혀 있었다. 요즘은 수험표 뒤에 번호 적어와서 가채점들 하는게 보편화되어 있던데 나 때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래서 성적 나오기를 기다리며 놀기 바빴기에 내게는 매우 비상식적인 성적이었고 마킹을 밀려썼나 하고 생각했다. 부랴부랴 확인해보니 죄다 계산실수였다. 1 더하기 1은 3. 위쪽에는 덧셈기호로 썼는데 옮겨적다가 나눗셈기호로 착각한 것. 자릿수 잘못 맞춰 계산한 것. 문제를 읽다가 조건 하나를 빠뜨린 것. 그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들밖에 없었다. 몰라서 틀렸고 내가 틀려야 마땅하다고 느낀 문제는 거의 없었다. 긴장해서 그랬을까? 중학교 때 보습학원 다니면서 여러 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서는 별로 그런 기억이 없다. 근데 왜 하필, 여기에서. 난 이과라서 수학에 가중치 들어가는데. 왜?
부모님은 재수를 원했다. 아버지는 특히 재수를 원했다. 수학만 벌충할 수 있으면 의대 원서 넣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백분위점수로 언어가 100% 나왔고 외국어는 만점이었지만 시험이 너무 쉬워서 97%가 나왔다. 애초에 나는 그 두 가지 과목만은 자신이 있었다. 수리를 제외하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었지만, 역시 이과니까 수리와 과탐에 최대 100%까지 가중치가 들어가는 건 큰 문제였다. 그럼 재수할까?
6차 교육과정 마지막 세대에 숙한 입장에서 앞으로 다가올 7차인지 뭐니 하는 이상한 것을 또 배워서 시험쳐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은 대학 가서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되면 뭐하지? 뭐가 좋을까. 다들 의사에 그렇게 목을 매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좋은 대학 가면 뭐하지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이름도 생소한 학과들을 훑어보면서 여기 가면 뭘 할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했다.
이전에도 농담처럼, 고등학교 친구들이 너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이 비정한 세상이 내 꿈을 앗아가버렸어 운운하며 쿨한 척 폼만 잡았었다. 내게 꿈이 있나? 없었다. 공부는 부모님이 시켰기에 그냥 했다. 성적은 높으면 좋고 낮으면 아쉬운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다. 기준점이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성적표 받아들고선 눈물이 났지만 그건 꿈을 이룰 수 없어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그러니 재수를 하고싶을 리가 없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여러 번 싸웠지만 결국 내 뜻을 관철시켰다. 부모님은 방구석에 무덤처럼 쌓여있는 문제집과 교과서를 거의 2월달까지 버리지 않고 놔둠으로서 미련을 잔뜩 갖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시위했지만, K대학교 전기전자공학과에 점수 맞춰 써넣은 결과로 합격 통지서가 날아오자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 대학 못 들어가서 슬퍼하는 사람도 얼마든 많았다. 공대 나와서 어디 회사에 공돌이 취직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가 있을까. 입학식날 내 마음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표면상으로 주된 문제는 수학이었다. 그게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공대 수학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잡을 생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수능 시험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수학이란 그 자체가 그냥 싫었던 것 같다. 애초에 문제도 잘 풀리지 않았고, 그래서 책 펴놓고 딴 생각하고 수업 시간에 졸았다.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지만 1학년 때는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2학년 올라가면서 문제는 커졌다. 공대에서 수학은 모든 과목의 기본이었다. 공부의 첫 단계를 빼먹으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두 배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았을 때 결과는 뻔했다. 그나마 교양과목이 있어서 아주 나쁜 성적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주로 나는 게임에 빠져 있었고 공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수능이란 목표가 있을 때도 어디 갈지 막연했는데 그 목표가 사라진 후에 내가 내 자신을 통제할 리가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전공 위주로 성적표를 편성하게 되면서 나는 거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 포기하다시피 수업을 들으며 학고를 맞았고 그거 맞아도 세상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F학점은 성적표에 찍힌 알파벳에 불과했다. 목표가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부모님의 질책을 받고 잊어버렸다. 휴학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 군대를 갔다왔다. 군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았다. 갔다오니 학교가 바뀌어 있었다.
새로 지은 지하 열람실에 학생이 넘쳐흘렀다. 청년실업 이야기가 뉴스에서 밥먹듯 흘러나왔다. 후배 하나가 1학년 1학기에 C+학점 하나 있는 게 맘에 안 든다고 자퇴 후 재입학하면 수정이 되느냐고 묻는 걸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신입 대학생들은 과장 좀 보태서 거의 고3처럼 공부했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재수강 과목만 쌓였지만 2학년 수업을 재수강하는 교실에서 나는 고학번으로 출석부 앞쪽에 올라와 있었다. 일찌감치 복학한 과 동기들은 자기 수업 듣기도 바빴다. 군대 가기 전, 3년 전에 배웠던 것들은 거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노력했지만 부족했다. 나는 말 그대로 기초가 없었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생각되자 노력할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고 노력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시험에서 백지를 제출한 과목이 제법 많았다. 어느새 밑바닥에 이르러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공부해도 되지 않는, 혹은 할 생각조차 없는, 진짜 바닥. 타성에 젖어 강의실과 하숙집과 도서관을 매일 오갔지만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졸업은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였다. 하지만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총장이 말도 안 되게 높은 등록금이 적절하다고 말했던 것이 한때 이슈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군대 있는 동안 퇴직을 했고 나는 부모님이 두 손에 꼭 쥐고 앞으로 30년은 살아야 할 돈에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연 이천 만원씩 깎아먹고 있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게임을 하면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성적이 나왔다. 부산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와 한참을 주저하다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부모님께선 화를 내지 않으셨다.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 앞으로를 이야기하자고 했다. 두 분의 얼굴 표정을 보고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에 둘러앉아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 나눈 대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가지 없었다. 일단 다니던 대학은 포기해야 했다. 설령 간신히 졸업한다 쳐도 몇 년이 걸릴 것이며 그 다음엔 어떡할 것인가. 하릴없이 어디 시덥잖은 지방대학에 편입을 하던가, 아니면 당장 공장에라도 가던가, 혹은 26살 먹고 고시를 준비하던가 수능을 다시 한 번 더 치던가 정도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고르기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결국 재수하는 것밖에 선택이 없었다. 공대를 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의대는 가망도 없어 보였고, 남는 건 인문계로 재수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월 88만원 받고 살더라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했다.
집에서 공부하면서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다녔다. 수능 공부한지가 6년이나 지났는데 학원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비싼 돈 내고 기숙학원 다닐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통학 위주로 찾았다. 집 근처에 나름 유명한 A학원과 B학원이 있었고 걸어서 닿는 곳에 C학원이 있었다. A학원은 간판은 걸려 있었지만 알고보니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 듯 했다. B학원은 아주 가깝기는 했지만 작은 규모에 허름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에 부산에 지점이 새로 생겨 대폭적으로 광고를 하던 C학원은 시설도 꽤 그럴듯해 보였고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니 운동겸 걸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D학원을 추천했다. 어렸을 적에 얼굴도 몇 번 본 적 있는 아는 친척분이 거기서 강사를 하고 계셨지만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했고 시간이 40분은 걸렸다.
그 외에도 재수학원은 많았다. 부산에 재수학원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학원들을 둘러볼수록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인다는 서울의 유명 학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고작 부산인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진짜 유명 서울 강사면 대치동 가기도 바쁠 텐데 부산까지 누가 내려올까 하는 상담선생님의 이야기가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결국 아는 분 있으니 문제집이라도 하나 공짜로 주겠지 하는 생각에 D학원을 골랐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차마 이 나이 먹고 재수한다는 이야기를 할 용기를 내지는 못해서 그 이야기를 하진 못했고, 국민학교, 중학교적 몇 번 만나본 게 전부인 내 얼굴을 그분이 기억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도 처음엔 시간표에서 이름 찾아보기 전까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참고로 그분은 얼마 뒤 강사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셨다.
학원이 시작되기 전에 집에서 한 달여를 공부했다. 일단 오전 6시에 정확히 기상하는 연습부터 했다. 작년 수능시험 문제부터 한 번 풀어봤는데 바뀐 게 너무 많아 매우 당혹스러웠다. 언수외가 죄다 100점 만점이고 시간도 바뀌었고 시험 치는 순서도 바뀌어 있었다. 인문계는 사탐을, 자연계는 과탐만을 치고 그것도 수많은 과목 중에 최대 4개까지 골라 친다는 것도 역시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성적은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시작부터 좌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7차 교육과정이 6차 때보다 배우는 내용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시집 가서 애 낳고 잘 사는 누나에게 예전에 물려받은 덕에 1996년 발행이라고 찍혀있는 정석을, 고3 때 보았고 아직도 용케 책꽂이에 남아있는 정석을 연습문제 위주로 재빨리 보았다. 언어는 유명 현대시하고 소설 같은 것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백여 편 정도 간단히 보고 익혔다. 수학 이외의 과목은 문제집을 사야 했는데 대체 뭘 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EBS라 쓰여있는 것만 샀다. 사탐은 뭘 공부해야하는지 역시 알 수 없어서 상담 선생님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울대 갈 생각은 없으니 국사 빼고, 외울 게 많은 윤리 빼고, 하면서 한국지리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를 추천해주었다. 별달리 아는 게 없으니 역시 그렇게 공부했다. 알고보니 그 선생님이 경제 선생님이는데 막상 경제 공부를 해보니 속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3 때 사탐 공부한 것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다행히도 나는 제일 윗반에 편성되었다. 이름은 서울대반이지만 내가 그 반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개중 몇 명이나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를 의심했다. 그래도 수업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한때에는 부산 최고의 학원이었지만 학원 판도가 바뀌면서 D학원은 많이 황량해졌다. 학원 건물이 들어선 도로 건너편에는 임대 플랭카드를 건 커다란 빌딩이,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빌딩이 역시 같은 학원의 간판을 달고 텅 빈 채로 서 있었다. 그래도 수백 명이 다니는 학원이니 작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 한 마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아이들은, 재수생활 내내 공부 이외의 것은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던 애들은 서서히 자기들끼리 친해져갔다. 나는 학원에서는 왕따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6살 어린 애들하고 친해지면 뭐 좋나. 반 최고령자하고 대화 나누고 싶어하는 애들도 별 없었다. 말 없이 사니까 귀머거리라고 생각했는지 늙은 놈이 주책이다 이상한 인간이다 하는 식의 말을 뒤에서 하는 걸 종종 흘려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1년쯤 아웃사이더로 산다고 죽진 않는다. 좀 외로울 뿐이다.
기행도 많이 저질렀다. 아는 사람이 없으면 남을 신경쓸 이유가 없다. 나는 주로 학원에서 잤다. 자기 바빠서 남들하고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선 자기 바빴다. 밤에 공부하는 버릇이 든 덕택이다. 자습을 10시에 마치고 집에 오면 10시 40분은 된다. 11시부터 공부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2시까지. 오히려 한밤중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리 조용해도 옆자리 연필 사각대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자습실보다 정말 고요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 아무도 살아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자정의 공부 분위기는 거의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러고 나면 다음날 학원에서 존다는 것이다. 아침 자습 시간에 잤고 쉬는 시간에 잤고 오후 자습 시간에도 잤다. 물론 수업시간에도 침 질질 흘리며 잤다. 조금 수업이 지루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집중력을 잃었고 그럼 잤다. 다행히도 너무 많이 자면 옆에 앉은 누군가가 고맙게 깨워주기는 했다. 입시는 4당 5락이니 하는 말이 한때 유행했고 나폴레옹은 하루에 세 시간 자고도 거뜬했다지만 나는 나폴레옹이 아니었고 잠 많이 안 자면 종일 영향을 받었다. 새벽 네 시 반에 잤던 날은 오전 수업 하나도 안 듣고 내내 잔 적도 있었다. 이렇게 공부해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차라리 학원을 가지 않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제대로 자고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독학을 택하기엔 너무 부담이 컸다.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인상 좋은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자기소개서의 나이 란을 눈으로 훑고는 내가 왜 솔직히 적었는지 의문인 부모님 나이와 무직이라 적힌 아버지의 직업란 역시 훑었다. 그 나이 먹고 재수하냐고, 늦게 낳은 자식보고 부모님이 돈 벌어오라고 안 하시더냐고 농담조로 물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수업시간에 자느냐고 물었다. 역시 웃었다. 괜찮은 공대 다니다가 이제 와서 재수하는 이유는 뭔지, 학교 자퇴는 했는지도 물었다. 농담이 아닌 건 알았지만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생소한 재수학원 생활에는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이름도 모르고 대화도 없다 하더라도 매일 보는 애들 얼굴은 눈에 익는다. 복도 구조나 교실 구조가 눈에 익고, 시간표와 점심 메뉴가 기억에 익고, 선생님들의 제각기 다른 목소리가 귀에 익고, 교재의 빳빳한 종이도 손에 익고 책상의 높낮이나 화장실 냄새조차도 익숙해진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공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집이 되어갔다.
학원 분위기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으냐는 건 주관적인 판단일 것이지만 내게는 충분했다. 최고의 강사진 밑에서 최고의 학원 다닌다고 최고의 성적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선생님들의 경우도, 인터넷으로 뜬 스타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비교할 수는 없었다. 7년 전에는 메가스터디를 필두로 해서 인강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보지 않았었고, 인강이 보편화된 지금에도 볼 생각은 없었다. 어느 선생이 좋은지 어떤 업체가 좋은지 알 수도 없었고 인터넷 강의에 돈 내는 건 어쩐지 아깝게 느껴졌다. 조그만 액정이 달린 MP3를 쓰던 터라 원하면 깨알만한 글씨로 칠판에 판서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배터리 수명도 짧고 화면도 작아서 인강을 본격적으로 보기는 역부족이었다. PMP를 사려도 돈이 없었다. 주로 주말에 집에서 컴퓨터로 공짜 EBS 강의를 몇 개 정도 보았다.
수업 시간에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는 꼬박꼬박 자고, 자다가 누가 고맙게도 깨워주면 일어나서 공부하고, 공부가 막히면 MP3으론 음악을 듣고 점심시간이나 통학시 남는 시간에 영어공부 겸 해서 토렌트로 받은 미쓰버스터즈(이전부터 한 번 끝까지 보고 싶었던)를 보았다. 자막이 없었지만 대사를 매우 또박또박 말해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듣기 쉬웠다. 그렇게 8개 시즌 보는 동안 작은 화면 보느라고 눈 많이 나빠졌을 것이다.
영어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적에도 그랬고 대학 다닐 적에도 그랬다. 취미생활에 있어 영어는 꽤 유용한 도구다. EPL의 최신 소식이 궁금하면 영문 공식 홈페이지 가면 되고 국내 개봉 안 한 신작 영화에 대해 알고 싶으면 IMDB 접속해서 글 읽으면 된다. 상식이 고프면 위키피디아 영문판도 있고 외국 유머 사이트도 재밌는 곳이 많다. 하다못해 게임하면서 대사 읽을 때도 도움이 된다. 사실 내 첫 영어공부의 절실한 첫 동기는 게임, 그것도 C&C였다. 미션 시작하기 전 브리핑에서 뭐라고 하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충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동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학교 수업 외적으로 영어공부를 많이 했었다. 6차 때는 만점자가 상위 4% 나올 정도로 영어가 워낙 쉽게 출제되기는 했지만...그래도 고3 때는 모의고사 치면 시간이 남아서 20~30분 정도 항상 잤었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를 쳤다. 시험 끝나는 시간이 생소해서 몇 번이고 확인해가며 시험을 치렀다. 사탐 치다가 과목 바꾸라는 벨 소리를 듣고는 순간적으로 저게 뭐지 하고 생각했다가 눈치를 챘다. 채점하려고 하는데 문항 옆에 점수가 표시 안된 건 몇 점짜리인지도 알 수 없어서 옆에 앉은 애에게 물어봐야 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성적은 맘에 들었다. 사실 두어 달 공부한 것 치고는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적이 나왔다. 언어는 꽤 빠르게 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학원 언어영역 최고점이 95점이라고 했는데 내 채점 결과로는 내가 96점이었다. 선생님께 당당히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채점하다가 문항 점수를 착각한 것이었다. 외국어는 쉬웠다. 쉬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는 카투사 들어가려고 토익 공부를 했었는데 만점은 못 받아보고 만점 바로 아래 점수는 받아본 적이 있었다. 물론 카투사 선발 확률과 토익 점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증명해보였다. 그 뒤로 영어 공부 별로 안 해서 많이 녹슬었지만 부잣집 망해도 삼대는 간다. 문제 다 풀고 20분쯤 남아서 그냥 잤다. 학기 초에는 사회탐구도 범위가 좁아서 역시 할만했다.
문제는 수리였다. 70점이란 점수가 나왔는데 몰라서 틀린 문제도 많았지만, 채점 결과 2, 3점짜리의 대여섯 문제를 단순 계산실수로 틀렸던 것이었다. 2004년 수능 때 그랬던 것처럼, 아주 단순한 실수들을 수도 없이 저지른 끝에 나온 결과였다. 이걸 여태껏 못 고치나 싶어 걱정이 되었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수능 전까지 완벽히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어와 외국어가 괜찮으니 성적 상승을 생각하면 서울대 정도는 문제없이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목표를 잡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물론 틀린 생각이었다.
한참을 공부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내가 국어와 영어 시험에 자신이 있는 것은 글을 빨리 읽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몰라도 글을 언제나 빨리 읽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나는 천재가 아니었으므로 글을 빨리 읽기 위해서는 대충 읽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충대충, 설렁설렁 읽는다. 소설을 읽으면 줄거리만 대충 알 정도로 읽고 신문기사도 요점만 대충 본다. 관심이 생기면 그제서야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본다. 하지만 대충 읽어도 문제는 풀 수 있다. 문제 풀면서 해당 부분만 다시 찾아 정독하면 되니까. 부호 하나하나 숫자 하나하나 빈틈없이 신경쓰지 않으면 틀리는 수학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을 치면 항상 끝까지 한 번 풀고, 앞으로 돌아가서 모든 문제를 한 번씩 더 풀었다. 시험이 특별히 어렵지 않다면 두 번씩 풀고도 보통 20분 정도 남아서 좀 헷갈리는 문제 서너 개를 고민해볼 시간이 된다. 그리고 마킹하면 끝이었다. 외국어 영역의 경우는 주로 듣기 들으면서 사이사이에 빠르게 10문제 정도를 풀어두었다. 이어서 두 번 훑고 마킹하면 역시 20분 정도 남아서 잘 수 있었다. 2004년 수능 때도 이렇게 시간이 남았었다. 재수 첫 모의고사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모의고사 몇 번 더 치르자 예전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영어 시험을 치다가 항상 자니까 이상하게 보는 애들이 많았다. 왠지 으쓱해졌지만, 수능 영어 정도 잘한다고 자랑할 거리는 못 되었다. 고등학생 때라면 모를까 내 나이가 몇인데. 토익 텝스 공부해서 취직 걱정할 나이 아닌가.
아무튼 수학도 그렇게 대충 읽고 대충 푼다는 게 문제였고 그게 언제나 실수로 이어졌다. 다른 과목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수학만 정독하려고 고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년 내내 날 괴롭힌 문제였다. 실수를 하는 것도 특정한 패턴이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 데서나 하는지라 잡기가 어려웠다. 집중해서 천천히 하려고 해도 막상 모르는 문제가 나와서 시간이 부족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모르는 문제가 결코 적지 않았기에 그럼 결과는 빤했다. 대여섯 문제씩 실수한 문제를 좍좍 그으면서는 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하면서도 이거 영영 못 고치는 거 아니냐, 이전 수능 때와 똑같이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래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3월 말에는 EBS 연계율이 70%까지 높아진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학원 선생님들이 비현실적인 정책이라며 코웃음쳤지만 입시제도가 사실 현실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수험생 입장에서 안 풀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여전히 뭔 문제집이 좋은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차라리 이쪽이 속 편했다. 학원에서 교재로 주는 것들을 싹 다 풀었고, EBS에서 수능 대비용으로 나오는 것들을 전부 다 샀다. 그 이외의 문제집은 전혀 사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정리한 것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문제집을 한 번 풀고는 틀린 것만 표시했다. 맞은 문제에 동그라미 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고 모의고사 채점할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뭘 모르느냐지 뭘 아느냐가 아니었다. 한 권 다 푼 다음에 틀린 문제만 한 번 더 풀면서 정리했고 다른 문제집 다 풀고 난 뒤에 돌아와 다시 복습했다. 사탐의 경우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EBS 문제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오답노트를 예쁘게 만드는 학생이 많던데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적은 좀체 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수학에 투자했다. 지상과제는 수학 1등급을 안정적으로 받는 것이었다. 언어는 수업 열심히 듣고 문제집 풀면서 감각만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반면 영어는 문법은 대부분 잊어버린 터라 신경을 좀 썼지만, 나머지 분야는 체면치레 수준으로만 공부했고 수업시간에는 주로 잤다. 담임선생님이 영어선생님이었고 수업을 잘했는데 좀 미안했다. 사탐에도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처음에는 정치를 얼마간 공부했지만 사탐 네 과목 공부할 이유가 없어서 정치를 그만두었다. 나중에 만에 하나 성적이 오르면 국사를 그 칸에 대신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학원에 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잠이 부족해서 언제나 피곤했고, 슬슬 지겹고 힘들고 짜증이 났다. 밖은 지독하게 더웠지만 학원 안은 시원했다. 너무 시원해서 탈이었다. 교실이 넓어서 에어컨 주변은 춥고 벽쪽은 더웠다. 며칠을 에어컨 바로 밑에서 찬바람 맞다가 코감기에 걸렸다. 체력이 저하되어서 그런지 도무지 낫지를 않았다.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흘러내려 너무나 괴로웠다. 모의고사를 치면서 한 문제 풀고 코 풀고 한 문제 풀고 코 풀기를 반복했다. 휴지의 산이 책상 위에 쌓였고 코가 빨갛게 헐어 아파왔다. 식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살은 미친 듯이 찌고 있었고 장염인지 뭔지 화장실에 하루에 세 번씩 갔다. 건강 완전히 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결국 감기가 낫기는 했지만 그 뒤로도 건강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가끔 친구들을 보면 우울해졌다. 나는 1년을 휴학했기 때문에, 군 제대 후 칼복학한 경우의 친구들은 이미 4학년 마치고 졸업해서 LG니 삼성이니 하는 대기업 취직해서 떵떵거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고시니 취직자리 알아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어찌되었건 다들 나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내가 설령 이 재수를 성공한다 치더라도 대학 졸업하면 나의 20대는 끝난다. 비싼 돈 들이고 노력 들이고 시간 들여서 그런저런 대학 졸업장 하나 얻는 것 이외의 의미가 있을까? 준비 없이 30대에 들어서게 될 내게 미래가 있을까?
그럼 지금 죽지 그래. 하루 두 번 지하철이 플랫폼에 들어설 때마다 철로를 내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앞을 향해 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간단히 끝난다. 그 뒤에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모님 슬퍼하고 친구 장례식 와 봐야 너 죽은 뒤의 일이다. 죽은 뒤에 천국이 있냐 지옥이 있냐. 하느님이 있냐 부처님이 있냐 뭐가 있어. 그냥 끝이지. 물론 나는 죽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미국서는 강도에게 머리에 권총 여섯 발 맞고 병원까지 기어가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팔다리 없이 태어난 사람도 책까지 내고 즐겁게 잘만 살더라다. 대학 잘리다시피 스물 여섯 살에 재수한다고 하면 더더욱 죽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신문을 펼쳤는데 광고에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늦었을 때 맞다'고 적혀 있었다. 유명한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빠른 거'라는 말은 사실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너는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 죽을 수는 없잖아. 늦었다는 걸 직시하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우고 살아야지. 문제는 성적보다는 결국 어딜 가서 무얼 하겠느냐는 것이다. 문과가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어쨌건 이건 내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였다. 성적이 아무리 엉망으로 나오더라도 1년 더 재수할 수는 없으니 지방대라도 가야 했다. 그럼 어디 가서 뭘 해야지 먹고 살 수 있는 걸까. 사실 성적보다 골치아픈 문제는 이것이었다. 서른 한 살 먹고 대기업 취직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교대 가서 요즘 경쟁이 치열하다는 임용고시라도 노려볼까. 통번역과라도 들어가서 번역가로 박봉에 시달리며라도 살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성적부터 안정시키고 보자고 생각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GvQkl7qa6RQ
Bill Conti - Going The Distance (Rocky)
이 음악의 의미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재수 내내 음악을 많이 들었다. 음악 들으면서 공부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공부가 막히고 기분이 우울할 때면 별 수 없이 듣게 되었다. 공부에 지장이 덜 되도록 타협안으로서 가사 없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근사한 영화 OST 같은 거 들으면 기분이 확 풀렸다. 하지만 집중력에는 확실히 손해였고,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기억에 새겨지면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그 노래가 계속 맴돌아 방해했다. 별 도리 없이 끊는 수밖에 없었다. MP3에 들어있는 모든 음악 파일을 지우고 정 음악이 듣고싶으면 가끔 라디오로 KBS 클래식 FM을 들었다. 고3 때도 많이 들었던 채널이었다. 정말 좋은 음악이 많았지만 대부분 가사가 없고 생소한 물건이었으며 같은 곡이 계속 나오는 경우가 없었기에 머릿속을 맴돌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 원서접수 전날 동네 할인마트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부루퉁한 표정의 남자 직원이 왜 왔냐는 식으로 묻길래 선뜻 말이 안 나와, 아...그, 여권 사진 같은...하고 운을 떼니까 수능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 하고 말을 가로채고는 몇 장 찍어주었다. 언뜻 불쾌했지만, 지금 나이 먹고 수능 치는게 쪽팔리면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서 접수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7년만에 찾아간 모교는 겉보기는 똑같았지만 어느새 운동장 구석에 지하주차장이 딸린 체육관이 들어서고 바닥에 마루장판을 깔고 교실 학생 밀도도 많이 성글어지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4층 진학지도실에서 재수생 원서 접수한다는 글이 쓰인 A4 용지 아래에는 실내화를 신고 올라오세요 하는 문구가 붙어있기에 솔직히 망설였다. 둘러봐도 실내화가 보이지 않았고 덧신조차 없었다. 내 앞에는 역시 재수생이 틀림없는 자그마한 꽁지머리의 여자 하나가 역시 원서 접수하려는 듯 건물에 막 들어서고 있었는데, 조금 주저하다가 신발을 벗더니 양말만 신고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게 아닌가. 당연히 나도 따라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바닥은 매우 매우 더러웠다. 나처럼 마루장판 깔기 전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인 게 틀림없었다.
원서 접수하면서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신분증을 슬쩍 훔쳐봤는데 주민번호 앞자리가 84로 시작하는데다가 그 신분증이라는 게 부산교대 학생증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것도 여자니까 군대도 안 갔다왔으니 지금쯤은 대학 졸업한지 오래일 거 아냐. 교대 나왔지만 임용고시 줄줄이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어디 한의대라도 가고 싶어하나? 왜 수능을 다시 치려고 하지? 왠지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안도 되었다. 지금도 수능을 어떻게 쳤을까 궁금하지만, 나는 사실 그 여자 이름이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1년 선배였으니까 내가 아는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볼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D 데이가 300대에서 200대로, 또 100대로 줄어들었다. 군대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하루는 느리게 가더라도 한 달은 빠르게 간다. 하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고, 한 달은 내가 이미 떠나보낸 과거니까. 찬바람이 불어도 모기가 기승을 피웠지만 가을이 오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수시접수한다고 바쁜 애들이 많았지만 내가 접수할 이유는 없었다.
9월 모평 이후로 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수업만 대충대충 듣는 수준이었고 별도 공부는 거의 안 했었다. 모의고사 문제는 풀었지만 거의 아는 것만 찍는 수준이었다. 공부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9월 모평에서 드디어 수학이 1등급이 나왔고, 2주 뒤의 다른 모의고사에도 1등급이었다. 수학이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착각해서 사탐 위주로 공부해야겠다 싶어졌다. 조금만 성적 올리면 서울대학교도 도전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값도 물론 중요했지만 현실적으로 국립대니까 등록금이 쌌다. 등록금이 걱정이라면 장학금 받으면 된다는 말은 하질 말기 바란다. 아무튼 문제는 내게 국사는 기초조차 없다는 거였고 국사 수업은 기초 넉넉한 재수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내겐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업을 포기하고 자습을 시작했다.
국사 공부는 매우 단순하게 했다. EBS에서 50강쯤 되는 인강을 MP3에 다운로드받았다. 웬 뚱뚱한 남자 선생님이 나오는 거였는데 알고보니 2010년이 아니라 2009년 거였다. 큰 상관은 없었다. 통학하는 데만 40분 정도 걸렸는데 주로 오가면서 말하는 것만 들었다. 어차피 단순암기과목이고, MP3의 조그만한 화면 봐야 별 소용도 없었다. 가끔 칠판에 지도라도 그리는 성 싶으면 잠깐씩 화면을 켜서 봤다. 한 화씩 보고 교과서를 펴서 해당 분량을 그냥 외웠다. 교과서 나오는 모든 문장을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 무작정 외웠다. 길거리 다니면서 중얼중얼하자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교과서에 없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 이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외우고 나면 마지막으로 문제집을 풀었다. 효과는 있기는 있었다. 다만 너무 늦게 시작했고 진도 역시 너무 느렸다.
슬슬 수능일이 다가오면서 학원을 그만두는 애들이나 다른 학원 다니다 때려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많아졌다. 재수학원에서 여자 여자 사귀고는 노닥거리는 애들도 많았다. 사실 나는 애들 이름조차 거의 모르는 편이었지만 매일 보는 얼굴이 익지 않을 리는 없었다. 처음엔 재미있던 선생님 농담도 슬슬 질려가고 맘에 안 드는 수업이라고, 독학하겠다고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는 애들이 줄줄이 늘어났다. 사탐의 경우 한 시간에 세 명밖에 안 듣는 처참한 경우마저 보였다. 선생님이 불쌍해 보였고 어차피 독학 따위 자신없었기에 나는 국사를 제하고는 수업을 꾸준히 들었다. 물론 종종 자기는 했다.
D-100일 이후로는 거의 정형화된 틀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명확히 시간표와 달성분량 같은 걸 짜서 공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얼마만큼 공부해야겠다 하는 양과 규칙은 확연히 잡혀 있었다. 다만 이제는 일찍 자려고 애썼다. 수능 전날도 새벽 2시에 잘 건 아니니까. 하지만 버릇이 잡혀 있어서 막상 일찍 자기가 쉽지 않았고 낮에 조는 버릇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불안했다.
더 불안한 건 성적이었다.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그나마도 자꾸 미끄러졌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 성적을 자신만만하게 받아들고 생각했을 때는 지금 내가 이런 성적 받는 상황에 처해 있을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성적은 오히려 내려가기만 했다. 수리 성적은 계속 널뛰기만을 반복했다. 쉬울 때는 1등급이 나왔지만 조금만 어려워지면 3등급까지도 떨어졌다. 공부를 더 한다고 꼭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물론 수학적 기초가 많이 약하긴 해도 어려워서 못 푸는 건 아니었다. 문제가 어려우면 풀긴 풀더라도 검산할 시간이 없어서 계산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어 틀리는 것이다. 두 번씩 검산할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고칠 수 있었고 9월 모평 때처럼 1등급이 나왔다. 하지만 수능이 그렇게 쉽게 출제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또 두 번 검산한다 치더라도 한 번 실수했는데 두 번 연달아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어느 문제를 실수했는지 알 수 없으니 모든 문제를 다 검산할 시간이 없는 한은 검산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객관식의 경우는 내가 실수하면 보기에 답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다고 보고 주관식 위주로 검산을 실시했지만, 제일 앞페이지의 객관식 문제를 실수로 틀리는 경우도 많았다. 한 선생님은 그 문제를 자살 방지용 문제라고 부르기까지 했었는데도 그랬다. 충분히 풀 줄 알면서 틀린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고, 2004년 수능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들었다.
국사에도 시간을 꾸준히 투자하고 있었지만 외울 분량이 너무 많아 성적이 오르는 속도는 너무 느렸고, 타 과목들의 성적도 그닥 동향이 없었기에 서울대 갈 가망도 없는데 왜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자기만족이었을 것이다. 올라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희망 하나는 걸고 싶은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
그래도 차마 제2외국어까지는 공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했었고 재수 시작하면서 수능 기출문제를 풀어봤긴 했다. 문제가 너무 쉬워서 고등학교 적의 희미한 기억만으로도 몇 개를 풀 수 있었다. 걱정 덜었다고 좋아했지만 알고보니 내가 봤던 건 2003년의 기출문제였고 요즘의 독일어 수능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아랍어를 하려고 EBS 프린트물만 잔뜩 뽑아두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인강 하나 제대로 안 보고 포기해버렸다. 입맛이 썼다.
수능을 한 달여 앞두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쳤는데 결과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떨어지지 않는 건 영어 성적 밖에 없었다. 언어가 2등급 나오고 수학이 3등급 나왔을 적에는 한 번은 웃고 넘길 수 있었는데 그 다음번 모의고사엔 성적이 더 떨어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오르기는커녕 사탐을 포함한 전 과목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까지 쳤던 모든 모의고사 문제지를 모아두었다가 계속 복습에 활용했다. 외국어 영역은 문법 관련 문제만 스크랩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언젠가 한 번은 모의고사에 좀 까다로운 수학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틀렸다. 푸는 법은 정말 쉽지만 단순 계산이 짜증나게 복잡한, 그야말로 지저분한 문제였고 그래서 틀렸다. 복습한다고 이때에 다시 풀어 보았지만 또 틀렸다. 세 번 네 번을 풀었지만 여전히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풀 때마다 죄다 다른 곳들에서 참으로 개성있게 계산이 틀린 부분이 나왔다. 검산해도 어디서 실수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지와 일일이 대조해야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가 있었다. 여섯 번째 풀다 여전히 답이 안 나오자 포기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럴까. 수학 공부가 정말 하기 싫어졌다. 수학이란 존재를 저주하고 싶었다. 왜 내 발목을 이렇게도 몇 년씩 잡는 걸까. 물론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사실 수학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문제였지. 그게 더 골치 아팠다.
딴에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수능 전날 긴장으로 밤잠을 못 잘까봐 일부러 두 시간만 자고 시험을 쳐보기도 했다.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 적어와야 할 테니까 시험 치고 시간을 남겨서 그거 옮겨적는 연습도 몇 번 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에는 문제가 풀렸다. 지금은 풀리지 않는다. 이게 분명히 답일 거라 생각했는데 매겨보니 아니었다. 대체 왜지? 슬럼프가 온 것이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일까?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뜯었다. 가망 없는 국사 공부 따위 때려친 지 오래였다.
뚜렷한 해결책 없는 채로 아까운 시간만 줄어들어갔다. 300대였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두 자리, 그리고 한 자리가 되었다. 재수학원이 종강했고 사물함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교재들을 마대자루에 넣어 버리고 집처럼 익숙했던 교실을 떠났다. 작별인사할 애들조차 없었다. 아웃사이더짓 너무 심각하게 했었나 생각했지만 사실 눈앞에 닥친 문제에 그런 거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EBS 최종 모의고사 언어/수리 3회짜리를 수능 바로 직전에 차례로 풀려고 아껴두었다. 수능 삼일 전에 그거 언어영역을 펼쳤는데 지문이 안 읽혔다. 또 틀리면 어쩌지, 또 그러면 어쩌지. 몇 문제 풀다가 그만두고 수리를 펼쳤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문제 풀고 바로 그 문제 답을 확인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서너 문제를 줄줄이 틀리고 나자 더 이상 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 사소한 계산실수였다. 그 뒤로도 계속 그랬다.
수능 바로 전날은 아무 것도 하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상황에 다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실패할 수는 없었다. 이 나이에 또 일 년을 더 투자해 재수할 수는 없었다. 성적이 나오면 어디든 가야 했다. 거기에 만족해야 했다. 거기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시험 못 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조차도 차마 들지 않았다. 최종 정리할 때는 수능 전날에 이거 요약해놓은 거 총복습하고 저 책 보고 해야지 하고 한 달 전에만 해도 계획했는데 수능 전날이 막상 닥치니 정말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가방에 수정테이프를 두 개 넣고 사인펜을 세 자루 넣고 잘 깎은 연필도 두 자루씩 넣고 샤프심도 세 통을 넣고 지우개도 새 걸 하나 더 샀다. 혹시 모르니 많이 가져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고 서랍 안에 집어넣고 MP3도 역시 서랍 안에 넣고 아예 잠가버렸다. 성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런 건 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일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하는둥 마는둥 하다 밤 9시에 이불을 폈다. 잠자리에 누워서 내일은 수능치는 날이 아니야 하고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며 관련된 모든 생각에서 도피하려고 시도했다. 어차피 못 칠 바에야 긴장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잠은 금새 들었지만 여러 차례 깨었다. 악몽을 꿔서였는지 뭐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차례 깨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새벽 다섯 시였던가, 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와서는 조용히 기도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수능 한파가 오지 않아 특이하게도 전혀 춥지 않았던 시험일 아침. 나는 여전히 오늘이 수능일이란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거의 아홉 시간을 잤지만 매우 피곤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이뇨제라고들 하니 참았다. 수험장은 걸어서 20분 걸리는 꽤 가까운 곳이었지만 부모님께서 태워다주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승용차들과 도시락을 든 수많은 수험생들과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와 경찰들, 호들갑피우며 선배들 응원하는 고1 고2 학생들까지, 이 광경을 내가 다시 보게 되다니.
달라진 건 지난 7년간 부모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하고 흰머리 뿐이었다. 못난 아들을 먹이겠다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하고 점심 도시락을 싸던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방 안에 몰래 들어와 자는 척 했던 내 얼굴 옆에서 기도를 올리던 아버지의 얼굴 역시. 이미 환갑도 지나신 분들이다. 나는 무어가 잘나서 번듯한 월급봉투 하나 받아오지 못하고 이렇게 부모님을 고생시키고 있는가. 목에 뭔가가 걸려 흔해빠진 잘 치고 올게요 같은 말도 못하고 묵묵히 차에서 내렸다.
부모님 작별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데 한 학생이 손 들고 뭔가를 하다가 내 얼굴을 때려서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 순간 든 생각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학생 뒤통수에 대고 뭐라 화를 낼 생각도 못했다. 깨진 거 아냐? 안경은 멀쩡했지만, 만약 깨지기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비 안경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언제나 모든 상황에선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운이 좋건 안 좋건 상관없다. 나는 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불안해졌다.
복도로 들어서니 선생님이 비닐로 된 덧신을 나눠주며 신으라고 했다. 잘 맞지 않는 덧신을 신발에 찢어져라고 우겨넣다가 문득 옆을 보니 다른 몇몇은 자신있게 쇼핑백에서 슬리퍼를 꺼내 신고는 계단을 올라가는 게 아닌가. 덧신을 씌운다 해도 운동화를 종일 신고 있으면 발에 땀 차니까 불편한데. 재수학원에서 쓰던 슬리퍼 가져왔으면 되는데. 대비가 되어 있기는 뭐가 되어 있어.
그것보다 좀 더 큰 문제는 시계였다. 알람 기능 같은 거 있는 디지털 손목시계는 안 된다기에 항상 쓰던 것 대신에 집에 굴러다니던 싸구려 증정품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가져왔었다. 고등학교 중학교 때 나는 항상 시계를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학교 종 치는 순간에 맞추는 버릇이 있었다. 방송 시보에 맞춘다고 해도 학교 시계가 그것과 몇 초쯤 차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만약 시험 치는 중에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면, 지금 대략 3분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2분 37초 남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건 꽤 큰 차이가 있다. 재수할 때에는 모의고사 칠 때마다 그렇게 했다. 수능날도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근데 이 망할 놈의 싸구려 시계가 시간을 맞추려고 용두를 돌리니까 툭 빠져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사인펜 세 자루 챙기지 말고 시계를 두 개 가져와야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1교시 시작할 때까지 거의 시계와 씨름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더 열받는 건, 정작 시험이 시작되자 상당수의 수험생이 차고있는 디지털 시계에 대해서 감독관이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디어 감독관이 들어오고 시험 준비가 시작되었다. 여러 모로 찜찜했지만 최대한 노력한 건 지금 이 시험이 수능이 아니라고 내 자신을 착각시키려고 애쓴 것, 그리고 긴장을 풀고 문제에 집중하기로 한 것 두 가지였다. 시험 망해도 부산대학 정도는 갈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집에서 가깝고 하숙비 안 들고 국립대라 등록금도 싸고 얼마나 좋은가. 거짓 생각이라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던 것 같았다. 참고로 부산대학에 불만은 없다. 누나가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언어는 처음엔 집중이 안 되어 당황했지만, 곧 익숙해져 풀다보니 꽤 무난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반가운 건 공과대학 2학년 때 들었던 데이터구조/알고리듬 수업에서 어레이하고 링크드 리스트가 난데없이 지문으로 나왔던 것 정도였다. 시간 아낄 수 있다고 즐겁게 생각했지만, 배운 지 오래되서 결국 지문 읽고 풀어야 했으니 별 소용은 없었다. 어쨌건 무난하게 두 바퀴를 돌았고, 끝날 무렵에는 헷갈리는 선택지가 몇 개 남았다. 바로 며칠 전의 실패가 머릿속에 남아 과연 점수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되었다. 내가 정답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란 보장은 없었다. 시계를 정확히 맞추지 못했으므로 불안해서 여유시간을 좀 많이 잡고 마킹을 시작했다. 덕분에 OMR 마킹을 보고 가채점용 답안을 수험표에 옮겨적은 뒤 확인까지 하고도 시간이 좀 남았다.
수리 나형은 쉽게 느껴질 정도여서 꽤 빨리 풀었고 남은 시간에 주관식 문항은 모두 검산을 실시했다. 물론 이야기했듯이 쉽다고 해서 잘 친다는 보장은 내겐 없었다. 검산을 했는데 틀린 문제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맘에 무척 걸렸다. 9월 모의평가 때는 검산해서 5문제의 답을 고쳐서 맞췄고 1등급을 받았었다. 답안지 걷어갈 때 앞자리 앉은 학생(얼핏 듣기로 강남대성 출신인 것 같았다)의 주관식을 슬쩍 보다가 내 것과 답이 몇 개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또 사소한 덧셈 같은 거 줄줄이 틀리고 쟤가 맞았겠지, 아무렴 내가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있어 하는 생각에 또 우울해졌다.
점심 시간에는 과자류라면 질색을 하시는 어머니가 웬일로 초콜렛을 도시락에 넣어주셔서 먹었는데, 둘러보니 수험생들이 죄다 단 거 하나씩 들고 먹고 있었다. 아마 어디 방송에서 전문가니 하는 사람이 나와서 초콜렛이 수험생에 좋다 같은 이야기를 최근에 했었던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점심은 조금만 먹었고, 목이 말랐지만 물은 최소한도로 마셨고 화장실에는 쉬는 시간마다 두 번씩 갔다. 사탐 시간에 화장실 가고싶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재수학원에서 모의고사 치다가 사탐 시간에 두 번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던 적이 있었다.
외국어는 만만하게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빈칸추론에 까다로운 문제가 하나 있어서 살짝 당황할 뻔 했었다. 해석은 되는데 답이 헷갈리는 것이다. 세 번째 풀 때 답을 고쳤지만 조금 불안했다. 사탐은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에 꽤 편한 마음으로 쳤다. 국사는 아는 것만 빠르게 풀었고, 한국지리와 경제는 헷갈리는 문제가 몇 개 있어서 시간이 빠듯했다. 시계가 시보에 몇 분 몇 초 늦는지 시험지에 적어놓고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썼다. 사회문화는 예상대로 쉬워서 사탐 다 푼 다음에 지리와 경제의 마킹을 수험표 뒷면에 옮겨적고도 시간이 남았다.
아랍어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치지 말고 일찍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그리고 나 같은 생각을 한 수험생들이 십여 명이나 교실서 빠져나가 포기각서 쓰고 집으로 갔지만 그러기엔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각서 쓴다 하더라도 안 치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왠지모르게 들어서 치기는 쳤다. 예상대로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고, 풀 수 있는 것도 하나도 없었지만 왠지 다 찍고 자기엔 쪽팔려서 열심히 푸는 척 했다. 그 짓도 몇 분이나 할 수는 없으니 결국은 OMR에 적당히 예쁜 모양이 되도록 마킹하고, 괜스레 페이지를 넘겨 고2 때 제2외국어로 공부했던 독일어나 몇 개 풀어보려 애써 보았다. 2004년 수능 독일어는 정말 쉽게 출제되어서 지금도 몇 문제쯤은 맞출 수 있었는데 2010년엔 그렇지 않았다. 결국 그래도 시간이 남아 엎드려 잤다. 잠이 안 왔지만 고개 박고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종료 종 치고 시험지 거두고 감독관이 모두 확인한 후 퇴실해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 왜 그리도 시간이 길게 느껴지던지 모르겠다.
거의 뛰다시피 수험장을 떠났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부모님이 중국요릿집에 데려다주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 박혀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M모 사이트에 접속했다. 의외로 컴퓨터로 가채점하는 방법을 몰라서 한참 헤맸다. 제일 불안한 수리 나부터 채점하기로 했다. 92점. 한 문제는 계산 실수고 다른 한 문제는 풀이 자체가 잘못되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채점해 보았다. 결과는 동일했다. 운 좋으면 1등급도 나올 수 있는 점수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서 충분히 대박이다. 1 더하기 1을 실수해서 6문제 7문제 틀리고 70점대 점수 받지 않는 것만 해도 천운이다.
고함지르고픈 생각을 억누르고 언어를 채점했다. 막상 어렵다고 느낀 문제보다는 애매하다고 느낀 문제를 두 개 틀렸다. 외국어는 97점 이상은 나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었다. 사탐이 걱정이었는데 거의 만점 아니면 하나씩 틀렸다. 국사는 3등급 턱걸이할 수준까지로 오르긴 했지만 좋은 점수는 못 되었었고(중간에 공부를 포기하면서 근현대사 관련 부분을 거의 공부 안 했던 게 제일 큰 문제였다. 빠짐없이 다 틀렸으니.) 아랍어는 채점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종합해보면 언수외에 사탐 3과목이 1등급이니 여태껏 친 모든 모의고사와 수능을 통틀어 가장 잘 친 점수였다. 서울대야 물 건너갔지만 연고대 웬만한 과 정도는 문제없이 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야. 나도 운이 좀 따라주는구나 하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의심도 좀 들었다. OMR 마킹 다 한 뒤에 OMR 카드 보면서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을 옮겨적고 난 뒤 확인까지 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부실한 인간에겐.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고로 지금 기뻐해선 나중에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경험해본 적이 있잖은가. 부모님조차도 내 성적을 믿고는 싶지만 믿어도 될까 하는 눈치였다.
성적 발표날까지는 주로 그런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 물론 입시 관련 인터넷 사이트도 열심히 뒤지고 M모 사이트 사장이 하는 입시설명회 가서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부당함에 대한 장광설을 듣기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1년 동안 살 많이 붙었다. 젠장.) 맛있는 것도 먹고 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성적 발표날에 모교 찾아가서는 원서 접수날처럼 양말발로 더러운 마룻바닥 위를 걷는 대신에 자신있게 구석의 신발장을 열고 귀빈용이라 표시된 슬리퍼를 꺼냈다. 진로상담실에서 명부에 내 이름을 서명하면서 심장이 잔뜩 쿵쾅거리는데, 내 것을 찾기 위해 성적표를 뒤적이던 선생님이 내 성적표를 주기 전에 한 번 슥 보고는 한 마디 던졌다. 학생 공부 잘하네 하고 말했다. 긴장한 마음에 그럼 대체 얼마나 잘해야 정말 잘하는 거죠? 하고 따질 뻔 했다. 낚아채다시피 성적표를 받았다.
의외로 나는 성적표에 표준점수하고 백분위, 등급만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성적표 받아들고도 이게 원점수로는 얼마나 차이난다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성적 같아 보였고, 사실 나중에 집에 와서 대조해보니 가채점한 것하고 단 1점의 차이도 없었다.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사하고 제2외국어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서울대 중하위권 정도는 턱걸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좀 남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히 과욕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근데 솔직히, 이전에도 맞아봐서 그런지 꽤 무감각하더라. 아, 올 것이 왔구나.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런 생각 정도 들었다.
사실 대학서 왠만큼 출석 하고 교양만 들어줘도 학고 맞기 쉽잖다. 요즘 같은 학점 인플레 시대에, 아무리 아등바등 교수님 찾아다니고 도서관에서 밤 새우는 짓거리 안 해도, 간신히 턱걸이 출석하고 시험지 절반쯤 비우고 프로젝트 대충 제출하고 C+만 줄줄이 받아도 학고까지는 잘 안 나온다. 3학년 때 그런 거 받는 건 진짜 포기한 인간이 받는 거지. 공부 포기한 인간. 대학 포기한 인간. 취직 포기한 인간. 미래를 포기한 인간.
부산의 집으로 내려가는 동안 천천히 현실감각이 나를 따라잡았다. 이제 20대도 절반 넘게 지났는데, 군대도 갔다왔는데, 더 이상 젊지 않은데. 예전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학고 맞고 군대 갔다왔어도 또 학고다. 안 되니까 포기한 건지 아니면 포기했으니까 안 되는 건지를 고민해 보았다. 난 여전히 정신 못 차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왜 살아있는가를 궁금해했다. 난 뭘 하기 위해 살고 있지?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필요가 뭐지? 선로에 들어오는 부산행 KTX 열차를 보면서 저기 뛰어들면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들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아파트 계단 올라서 4층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집을 지나쳐 옥상에 올라갔다. 난간 너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내리지 못했다. 죽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총 한 자루라도 내 손에 있으면 정말 빠르고 간단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알약 하나라도 있으면 삼키면 끝일 텐데, 편하고 고통없이 죽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게으르게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배치고사에서 덜컥 1등 해버렸던 것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반에서 10등 안쪽에서 놀았는데 어쩌다 그 성적이 나와서 입학식 날 손 들고 선서했는가 모르겠다. 어쨌건 성적은 뭔 이유에선지 몰라도 제법 올랐고 그 뒤로도 전교에서 10등 안쪽은 지켰었다. 2학년 과 고를 때가 되어 부모님은 조금만 더 하면 의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고 이과를 고르라고 했었다. 나는 의대는 왠지 싫었다. 피 튀기는 것도 싫었고 사람 자르고 짼다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고 소독약 냄새 매캐한 병원 찾아가면 무감각한 표정으로 사람 죽고 살리는 것에 대해 직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 싫었다. 의대 붙은 친구 녀석의 요즘 모습이 어떤가 그때 알았더라면 그런 생각 따윈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과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과학잡지도 여러 권 봤었고 과학자니 기술직이니 하는 것도 왠지 매력있게 느껴졌다. 복잡한 기계장치나 멋진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것에서 남자로서 느끼는 매력 같은 것. 그래서 이과에 갔다. 그저 막연하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래되어 잘은 기억 안 나지만 2년 내내 모의고사 성적은 무난하게 나왔던 것 같다. 학원도 가고 내신도 따지고 가끔 야자 째고 PC방 가서 스타도 하고 고3으로서 할 건 다 했다.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전교 1등도 가끔 해봤다. 의대는 어쩌면 갈 수 있을 수도 있었고 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서울대 공대 정도는 무난히 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의대 못 간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능날도 무난했었다. 2003년 겨울에 친 수능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몇 가지는 기억난다. 특히 점심시간에 친구들하고 모여서 밥 먹고 수능 난이도에 대해 수다떨던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수학 쉽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맞장구쳤었다. 쉽다고 생각했다. 사실 쉬웠다. 뉴스에서도,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성적표가 나왔을 때 수리영역에 4등급이 찍혀 있었다. 요즘은 수험표 뒤에 번호 적어와서 가채점들 하는게 보편화되어 있던데 나 때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래서 성적 나오기를 기다리며 놀기 바빴기에 내게는 매우 비상식적인 성적이었고 마킹을 밀려썼나 하고 생각했다. 부랴부랴 확인해보니 죄다 계산실수였다. 1 더하기 1은 3. 위쪽에는 덧셈기호로 썼는데 옮겨적다가 나눗셈기호로 착각한 것. 자릿수 잘못 맞춰 계산한 것. 문제를 읽다가 조건 하나를 빠뜨린 것. 그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들밖에 없었다. 몰라서 틀렸고 내가 틀려야 마땅하다고 느낀 문제는 거의 없었다. 긴장해서 그랬을까? 중학교 때 보습학원 다니면서 여러 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서는 별로 그런 기억이 없다. 근데 왜 하필, 여기에서. 난 이과라서 수학에 가중치 들어가는데. 왜?
부모님은 재수를 원했다. 아버지는 특히 재수를 원했다. 수학만 벌충할 수 있으면 의대 원서 넣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백분위점수로 언어가 100% 나왔고 외국어는 만점이었지만 시험이 너무 쉬워서 97%가 나왔다. 애초에 나는 그 두 가지 과목만은 자신이 있었다. 수리를 제외하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었지만, 역시 이과니까 수리와 과탐에 최대 100%까지 가중치가 들어가는 건 큰 문제였다. 그럼 재수할까?
6차 교육과정 마지막 세대에 숙한 입장에서 앞으로 다가올 7차인지 뭐니 하는 이상한 것을 또 배워서 시험쳐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은 대학 가서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되면 뭐하지? 뭐가 좋을까. 다들 의사에 그렇게 목을 매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좋은 대학 가면 뭐하지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이름도 생소한 학과들을 훑어보면서 여기 가면 뭘 할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했다.
이전에도 농담처럼, 고등학교 친구들이 너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이 비정한 세상이 내 꿈을 앗아가버렸어 운운하며 쿨한 척 폼만 잡았었다. 내게 꿈이 있나? 없었다. 공부는 부모님이 시켰기에 그냥 했다. 성적은 높으면 좋고 낮으면 아쉬운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다. 기준점이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성적표 받아들고선 눈물이 났지만 그건 꿈을 이룰 수 없어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그러니 재수를 하고싶을 리가 없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여러 번 싸웠지만 결국 내 뜻을 관철시켰다. 부모님은 방구석에 무덤처럼 쌓여있는 문제집과 교과서를 거의 2월달까지 버리지 않고 놔둠으로서 미련을 잔뜩 갖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시위했지만, K대학교 전기전자공학과에 점수 맞춰 써넣은 결과로 합격 통지서가 날아오자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 대학 못 들어가서 슬퍼하는 사람도 얼마든 많았다. 공대 나와서 어디 회사에 공돌이 취직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가 있을까. 입학식날 내 마음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표면상으로 주된 문제는 수학이었다. 그게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공대 수학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잡을 생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수능 시험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수학이란 그 자체가 그냥 싫었던 것 같다. 애초에 문제도 잘 풀리지 않았고, 그래서 책 펴놓고 딴 생각하고 수업 시간에 졸았다.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지만 1학년 때는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2학년 올라가면서 문제는 커졌다. 공대에서 수학은 모든 과목의 기본이었다. 공부의 첫 단계를 빼먹으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두 배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았을 때 결과는 뻔했다. 그나마 교양과목이 있어서 아주 나쁜 성적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주로 나는 게임에 빠져 있었고 공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수능이란 목표가 있을 때도 어디 갈지 막연했는데 그 목표가 사라진 후에 내가 내 자신을 통제할 리가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전공 위주로 성적표를 편성하게 되면서 나는 거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 포기하다시피 수업을 들으며 학고를 맞았고 그거 맞아도 세상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F학점은 성적표에 찍힌 알파벳에 불과했다. 목표가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부모님의 질책을 받고 잊어버렸다. 휴학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 군대를 갔다왔다. 군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았다. 갔다오니 학교가 바뀌어 있었다.
새로 지은 지하 열람실에 학생이 넘쳐흘렀다. 청년실업 이야기가 뉴스에서 밥먹듯 흘러나왔다. 후배 하나가 1학년 1학기에 C+학점 하나 있는 게 맘에 안 든다고 자퇴 후 재입학하면 수정이 되느냐고 묻는 걸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신입 대학생들은 과장 좀 보태서 거의 고3처럼 공부했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재수강 과목만 쌓였지만 2학년 수업을 재수강하는 교실에서 나는 고학번으로 출석부 앞쪽에 올라와 있었다. 일찌감치 복학한 과 동기들은 자기 수업 듣기도 바빴다. 군대 가기 전, 3년 전에 배웠던 것들은 거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노력했지만 부족했다. 나는 말 그대로 기초가 없었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생각되자 노력할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고 노력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시험에서 백지를 제출한 과목이 제법 많았다. 어느새 밑바닥에 이르러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공부해도 되지 않는, 혹은 할 생각조차 없는, 진짜 바닥. 타성에 젖어 강의실과 하숙집과 도서관을 매일 오갔지만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졸업은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였다. 하지만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총장이 말도 안 되게 높은 등록금이 적절하다고 말했던 것이 한때 이슈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군대 있는 동안 퇴직을 했고 나는 부모님이 두 손에 꼭 쥐고 앞으로 30년은 살아야 할 돈에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연 이천 만원씩 깎아먹고 있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게임을 하면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성적이 나왔다. 부산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와 한참을 주저하다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부모님께선 화를 내지 않으셨다.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 앞으로를 이야기하자고 했다. 두 분의 얼굴 표정을 보고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에 둘러앉아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 나눈 대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가지 없었다. 일단 다니던 대학은 포기해야 했다. 설령 간신히 졸업한다 쳐도 몇 년이 걸릴 것이며 그 다음엔 어떡할 것인가. 하릴없이 어디 시덥잖은 지방대학에 편입을 하던가, 아니면 당장 공장에라도 가던가, 혹은 26살 먹고 고시를 준비하던가 수능을 다시 한 번 더 치던가 정도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고르기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결국 재수하는 것밖에 선택이 없었다. 공대를 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의대는 가망도 없어 보였고, 남는 건 인문계로 재수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월 88만원 받고 살더라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했다.
집에서 공부하면서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다녔다. 수능 공부한지가 6년이나 지났는데 학원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비싼 돈 내고 기숙학원 다닐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통학 위주로 찾았다. 집 근처에 나름 유명한 A학원과 B학원이 있었고 걸어서 닿는 곳에 C학원이 있었다. A학원은 간판은 걸려 있었지만 알고보니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 듯 했다. B학원은 아주 가깝기는 했지만 작은 규모에 허름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에 부산에 지점이 새로 생겨 대폭적으로 광고를 하던 C학원은 시설도 꽤 그럴듯해 보였고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니 운동겸 걸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D학원을 추천했다. 어렸을 적에 얼굴도 몇 번 본 적 있는 아는 친척분이 거기서 강사를 하고 계셨지만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했고 시간이 40분은 걸렸다.
그 외에도 재수학원은 많았다. 부산에 재수학원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학원들을 둘러볼수록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인다는 서울의 유명 학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고작 부산인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진짜 유명 서울 강사면 대치동 가기도 바쁠 텐데 부산까지 누가 내려올까 하는 상담선생님의 이야기가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결국 아는 분 있으니 문제집이라도 하나 공짜로 주겠지 하는 생각에 D학원을 골랐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차마 이 나이 먹고 재수한다는 이야기를 할 용기를 내지는 못해서 그 이야기를 하진 못했고, 국민학교, 중학교적 몇 번 만나본 게 전부인 내 얼굴을 그분이 기억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도 처음엔 시간표에서 이름 찾아보기 전까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참고로 그분은 얼마 뒤 강사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셨다.
학원이 시작되기 전에 집에서 한 달여를 공부했다. 일단 오전 6시에 정확히 기상하는 연습부터 했다. 작년 수능시험 문제부터 한 번 풀어봤는데 바뀐 게 너무 많아 매우 당혹스러웠다. 언수외가 죄다 100점 만점이고 시간도 바뀌었고 시험 치는 순서도 바뀌어 있었다. 인문계는 사탐을, 자연계는 과탐만을 치고 그것도 수많은 과목 중에 최대 4개까지 골라 친다는 것도 역시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성적은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시작부터 좌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7차 교육과정이 6차 때보다 배우는 내용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시집 가서 애 낳고 잘 사는 누나에게 예전에 물려받은 덕에 1996년 발행이라고 찍혀있는 정석을, 고3 때 보았고 아직도 용케 책꽂이에 남아있는 정석을 연습문제 위주로 재빨리 보았다. 언어는 유명 현대시하고 소설 같은 것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백여 편 정도 간단히 보고 익혔다. 수학 이외의 과목은 문제집을 사야 했는데 대체 뭘 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EBS라 쓰여있는 것만 샀다. 사탐은 뭘 공부해야하는지 역시 알 수 없어서 상담 선생님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울대 갈 생각은 없으니 국사 빼고, 외울 게 많은 윤리 빼고, 하면서 한국지리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를 추천해주었다. 별달리 아는 게 없으니 역시 그렇게 공부했다. 알고보니 그 선생님이 경제 선생님이는데 막상 경제 공부를 해보니 속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3 때 사탐 공부한 것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다행히도 나는 제일 윗반에 편성되었다. 이름은 서울대반이지만 내가 그 반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개중 몇 명이나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를 의심했다. 그래도 수업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한때에는 부산 최고의 학원이었지만 학원 판도가 바뀌면서 D학원은 많이 황량해졌다. 학원 건물이 들어선 도로 건너편에는 임대 플랭카드를 건 커다란 빌딩이,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빌딩이 역시 같은 학원의 간판을 달고 텅 빈 채로 서 있었다. 그래도 수백 명이 다니는 학원이니 작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 한 마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아이들은, 재수생활 내내 공부 이외의 것은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던 애들은 서서히 자기들끼리 친해져갔다. 나는 학원에서는 왕따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6살 어린 애들하고 친해지면 뭐 좋나. 반 최고령자하고 대화 나누고 싶어하는 애들도 별 없었다. 말 없이 사니까 귀머거리라고 생각했는지 늙은 놈이 주책이다 이상한 인간이다 하는 식의 말을 뒤에서 하는 걸 종종 흘려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1년쯤 아웃사이더로 산다고 죽진 않는다. 좀 외로울 뿐이다.
기행도 많이 저질렀다. 아는 사람이 없으면 남을 신경쓸 이유가 없다. 나는 주로 학원에서 잤다. 자기 바빠서 남들하고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선 자기 바빴다. 밤에 공부하는 버릇이 든 덕택이다. 자습을 10시에 마치고 집에 오면 10시 40분은 된다. 11시부터 공부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2시까지. 오히려 한밤중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리 조용해도 옆자리 연필 사각대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자습실보다 정말 고요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 아무도 살아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자정의 공부 분위기는 거의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러고 나면 다음날 학원에서 존다는 것이다. 아침 자습 시간에 잤고 쉬는 시간에 잤고 오후 자습 시간에도 잤다. 물론 수업시간에도 침 질질 흘리며 잤다. 조금 수업이 지루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집중력을 잃었고 그럼 잤다. 다행히도 너무 많이 자면 옆에 앉은 누군가가 고맙게 깨워주기는 했다. 입시는 4당 5락이니 하는 말이 한때 유행했고 나폴레옹은 하루에 세 시간 자고도 거뜬했다지만 나는 나폴레옹이 아니었고 잠 많이 안 자면 종일 영향을 받었다. 새벽 네 시 반에 잤던 날은 오전 수업 하나도 안 듣고 내내 잔 적도 있었다. 이렇게 공부해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차라리 학원을 가지 않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제대로 자고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독학을 택하기엔 너무 부담이 컸다.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인상 좋은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자기소개서의 나이 란을 눈으로 훑고는 내가 왜 솔직히 적었는지 의문인 부모님 나이와 무직이라 적힌 아버지의 직업란 역시 훑었다. 그 나이 먹고 재수하냐고, 늦게 낳은 자식보고 부모님이 돈 벌어오라고 안 하시더냐고 농담조로 물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수업시간에 자느냐고 물었다. 역시 웃었다. 괜찮은 공대 다니다가 이제 와서 재수하는 이유는 뭔지, 학교 자퇴는 했는지도 물었다. 농담이 아닌 건 알았지만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생소한 재수학원 생활에는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이름도 모르고 대화도 없다 하더라도 매일 보는 애들 얼굴은 눈에 익는다. 복도 구조나 교실 구조가 눈에 익고, 시간표와 점심 메뉴가 기억에 익고, 선생님들의 제각기 다른 목소리가 귀에 익고, 교재의 빳빳한 종이도 손에 익고 책상의 높낮이나 화장실 냄새조차도 익숙해진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공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집이 되어갔다.
학원 분위기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으냐는 건 주관적인 판단일 것이지만 내게는 충분했다. 최고의 강사진 밑에서 최고의 학원 다닌다고 최고의 성적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선생님들의 경우도, 인터넷으로 뜬 스타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비교할 수는 없었다. 7년 전에는 메가스터디를 필두로 해서 인강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보지 않았었고, 인강이 보편화된 지금에도 볼 생각은 없었다. 어느 선생이 좋은지 어떤 업체가 좋은지 알 수도 없었고 인터넷 강의에 돈 내는 건 어쩐지 아깝게 느껴졌다. 조그만 액정이 달린 MP3를 쓰던 터라 원하면 깨알만한 글씨로 칠판에 판서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배터리 수명도 짧고 화면도 작아서 인강을 본격적으로 보기는 역부족이었다. PMP를 사려도 돈이 없었다. 주로 주말에 집에서 컴퓨터로 공짜 EBS 강의를 몇 개 정도 보았다.
수업 시간에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는 꼬박꼬박 자고, 자다가 누가 고맙게도 깨워주면 일어나서 공부하고, 공부가 막히면 MP3으론 음악을 듣고 점심시간이나 통학시 남는 시간에 영어공부 겸 해서 토렌트로 받은 미쓰버스터즈(이전부터 한 번 끝까지 보고 싶었던)를 보았다. 자막이 없었지만 대사를 매우 또박또박 말해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듣기 쉬웠다. 그렇게 8개 시즌 보는 동안 작은 화면 보느라고 눈 많이 나빠졌을 것이다.
영어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적에도 그랬고 대학 다닐 적에도 그랬다. 취미생활에 있어 영어는 꽤 유용한 도구다. EPL의 최신 소식이 궁금하면 영문 공식 홈페이지 가면 되고 국내 개봉 안 한 신작 영화에 대해 알고 싶으면 IMDB 접속해서 글 읽으면 된다. 상식이 고프면 위키피디아 영문판도 있고 외국 유머 사이트도 재밌는 곳이 많다. 하다못해 게임하면서 대사 읽을 때도 도움이 된다. 사실 내 첫 영어공부의 절실한 첫 동기는 게임, 그것도 C&C였다. 미션 시작하기 전 브리핑에서 뭐라고 하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충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동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학교 수업 외적으로 영어공부를 많이 했었다. 6차 때는 만점자가 상위 4% 나올 정도로 영어가 워낙 쉽게 출제되기는 했지만...그래도 고3 때는 모의고사 치면 시간이 남아서 20~30분 정도 항상 잤었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를 쳤다. 시험 끝나는 시간이 생소해서 몇 번이고 확인해가며 시험을 치렀다. 사탐 치다가 과목 바꾸라는 벨 소리를 듣고는 순간적으로 저게 뭐지 하고 생각했다가 눈치를 챘다. 채점하려고 하는데 문항 옆에 점수가 표시 안된 건 몇 점짜리인지도 알 수 없어서 옆에 앉은 애에게 물어봐야 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성적은 맘에 들었다. 사실 두어 달 공부한 것 치고는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적이 나왔다. 언어는 꽤 빠르게 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학원 언어영역 최고점이 95점이라고 했는데 내 채점 결과로는 내가 96점이었다. 선생님께 당당히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채점하다가 문항 점수를 착각한 것이었다. 외국어는 쉬웠다. 쉬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는 카투사 들어가려고 토익 공부를 했었는데 만점은 못 받아보고 만점 바로 아래 점수는 받아본 적이 있었다. 물론 카투사 선발 확률과 토익 점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증명해보였다. 그 뒤로 영어 공부 별로 안 해서 많이 녹슬었지만 부잣집 망해도 삼대는 간다. 문제 다 풀고 20분쯤 남아서 그냥 잤다. 학기 초에는 사회탐구도 범위가 좁아서 역시 할만했다.
문제는 수리였다. 70점이란 점수가 나왔는데 몰라서 틀린 문제도 많았지만, 채점 결과 2, 3점짜리의 대여섯 문제를 단순 계산실수로 틀렸던 것이었다. 2004년 수능 때 그랬던 것처럼, 아주 단순한 실수들을 수도 없이 저지른 끝에 나온 결과였다. 이걸 여태껏 못 고치나 싶어 걱정이 되었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수능 전까지 완벽히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어와 외국어가 괜찮으니 성적 상승을 생각하면 서울대 정도는 문제없이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목표를 잡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물론 틀린 생각이었다.
한참을 공부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내가 국어와 영어 시험에 자신이 있는 것은 글을 빨리 읽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몰라도 글을 언제나 빨리 읽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나는 천재가 아니었으므로 글을 빨리 읽기 위해서는 대충 읽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충대충, 설렁설렁 읽는다. 소설을 읽으면 줄거리만 대충 알 정도로 읽고 신문기사도 요점만 대충 본다. 관심이 생기면 그제서야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본다. 하지만 대충 읽어도 문제는 풀 수 있다. 문제 풀면서 해당 부분만 다시 찾아 정독하면 되니까. 부호 하나하나 숫자 하나하나 빈틈없이 신경쓰지 않으면 틀리는 수학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을 치면 항상 끝까지 한 번 풀고, 앞으로 돌아가서 모든 문제를 한 번씩 더 풀었다. 시험이 특별히 어렵지 않다면 두 번씩 풀고도 보통 20분 정도 남아서 좀 헷갈리는 문제 서너 개를 고민해볼 시간이 된다. 그리고 마킹하면 끝이었다. 외국어 영역의 경우는 주로 듣기 들으면서 사이사이에 빠르게 10문제 정도를 풀어두었다. 이어서 두 번 훑고 마킹하면 역시 20분 정도 남아서 잘 수 있었다. 2004년 수능 때도 이렇게 시간이 남았었다. 재수 첫 모의고사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모의고사 몇 번 더 치르자 예전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영어 시험을 치다가 항상 자니까 이상하게 보는 애들이 많았다. 왠지 으쓱해졌지만, 수능 영어 정도 잘한다고 자랑할 거리는 못 되었다. 고등학생 때라면 모를까 내 나이가 몇인데. 토익 텝스 공부해서 취직 걱정할 나이 아닌가.
아무튼 수학도 그렇게 대충 읽고 대충 푼다는 게 문제였고 그게 언제나 실수로 이어졌다. 다른 과목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수학만 정독하려고 고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년 내내 날 괴롭힌 문제였다. 실수를 하는 것도 특정한 패턴이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 데서나 하는지라 잡기가 어려웠다. 집중해서 천천히 하려고 해도 막상 모르는 문제가 나와서 시간이 부족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모르는 문제가 결코 적지 않았기에 그럼 결과는 빤했다. 대여섯 문제씩 실수한 문제를 좍좍 그으면서는 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하면서도 이거 영영 못 고치는 거 아니냐, 이전 수능 때와 똑같이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래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3월 말에는 EBS 연계율이 70%까지 높아진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학원 선생님들이 비현실적인 정책이라며 코웃음쳤지만 입시제도가 사실 현실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수험생 입장에서 안 풀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여전히 뭔 문제집이 좋은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차라리 이쪽이 속 편했다. 학원에서 교재로 주는 것들을 싹 다 풀었고, EBS에서 수능 대비용으로 나오는 것들을 전부 다 샀다. 그 이외의 문제집은 전혀 사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정리한 것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문제집을 한 번 풀고는 틀린 것만 표시했다. 맞은 문제에 동그라미 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고 모의고사 채점할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뭘 모르느냐지 뭘 아느냐가 아니었다. 한 권 다 푼 다음에 틀린 문제만 한 번 더 풀면서 정리했고 다른 문제집 다 풀고 난 뒤에 돌아와 다시 복습했다. 사탐의 경우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EBS 문제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오답노트를 예쁘게 만드는 학생이 많던데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적은 좀체 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수학에 투자했다. 지상과제는 수학 1등급을 안정적으로 받는 것이었다. 언어는 수업 열심히 듣고 문제집 풀면서 감각만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반면 영어는 문법은 대부분 잊어버린 터라 신경을 좀 썼지만, 나머지 분야는 체면치레 수준으로만 공부했고 수업시간에는 주로 잤다. 담임선생님이 영어선생님이었고 수업을 잘했는데 좀 미안했다. 사탐에도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처음에는 정치를 얼마간 공부했지만 사탐 네 과목 공부할 이유가 없어서 정치를 그만두었다. 나중에 만에 하나 성적이 오르면 국사를 그 칸에 대신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학원에 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잠이 부족해서 언제나 피곤했고, 슬슬 지겹고 힘들고 짜증이 났다. 밖은 지독하게 더웠지만 학원 안은 시원했다. 너무 시원해서 탈이었다. 교실이 넓어서 에어컨 주변은 춥고 벽쪽은 더웠다. 며칠을 에어컨 바로 밑에서 찬바람 맞다가 코감기에 걸렸다. 체력이 저하되어서 그런지 도무지 낫지를 않았다.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흘러내려 너무나 괴로웠다. 모의고사를 치면서 한 문제 풀고 코 풀고 한 문제 풀고 코 풀기를 반복했다. 휴지의 산이 책상 위에 쌓였고 코가 빨갛게 헐어 아파왔다. 식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살은 미친 듯이 찌고 있었고 장염인지 뭔지 화장실에 하루에 세 번씩 갔다. 건강 완전히 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결국 감기가 낫기는 했지만 그 뒤로도 건강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가끔 친구들을 보면 우울해졌다. 나는 1년을 휴학했기 때문에, 군 제대 후 칼복학한 경우의 친구들은 이미 4학년 마치고 졸업해서 LG니 삼성이니 하는 대기업 취직해서 떵떵거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고시니 취직자리 알아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어찌되었건 다들 나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내가 설령 이 재수를 성공한다 치더라도 대학 졸업하면 나의 20대는 끝난다. 비싼 돈 들이고 노력 들이고 시간 들여서 그런저런 대학 졸업장 하나 얻는 것 이외의 의미가 있을까? 준비 없이 30대에 들어서게 될 내게 미래가 있을까?
그럼 지금 죽지 그래. 하루 두 번 지하철이 플랫폼에 들어설 때마다 철로를 내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앞을 향해 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간단히 끝난다. 그 뒤에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모님 슬퍼하고 친구 장례식 와 봐야 너 죽은 뒤의 일이다. 죽은 뒤에 천국이 있냐 지옥이 있냐. 하느님이 있냐 부처님이 있냐 뭐가 있어. 그냥 끝이지. 물론 나는 죽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미국서는 강도에게 머리에 권총 여섯 발 맞고 병원까지 기어가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팔다리 없이 태어난 사람도 책까지 내고 즐겁게 잘만 살더라다. 대학 잘리다시피 스물 여섯 살에 재수한다고 하면 더더욱 죽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신문을 펼쳤는데 광고에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늦었을 때 맞다'고 적혀 있었다. 유명한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빠른 거'라는 말은 사실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너는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 죽을 수는 없잖아. 늦었다는 걸 직시하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우고 살아야지. 문제는 성적보다는 결국 어딜 가서 무얼 하겠느냐는 것이다. 문과가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어쨌건 이건 내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였다. 성적이 아무리 엉망으로 나오더라도 1년 더 재수할 수는 없으니 지방대라도 가야 했다. 그럼 어디 가서 뭘 해야지 먹고 살 수 있는 걸까. 사실 성적보다 골치아픈 문제는 이것이었다. 서른 한 살 먹고 대기업 취직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교대 가서 요즘 경쟁이 치열하다는 임용고시라도 노려볼까. 통번역과라도 들어가서 번역가로 박봉에 시달리며라도 살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성적부터 안정시키고 보자고 생각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GvQkl7qa6RQ
Bill Conti - Going The Distance (Rocky)
이 음악의 의미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재수 내내 음악을 많이 들었다. 음악 들으면서 공부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공부가 막히고 기분이 우울할 때면 별 수 없이 듣게 되었다. 공부에 지장이 덜 되도록 타협안으로서 가사 없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근사한 영화 OST 같은 거 들으면 기분이 확 풀렸다. 하지만 집중력에는 확실히 손해였고,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기억에 새겨지면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그 노래가 계속 맴돌아 방해했다. 별 도리 없이 끊는 수밖에 없었다. MP3에 들어있는 모든 음악 파일을 지우고 정 음악이 듣고싶으면 가끔 라디오로 KBS 클래식 FM을 들었다. 고3 때도 많이 들었던 채널이었다. 정말 좋은 음악이 많았지만 대부분 가사가 없고 생소한 물건이었으며 같은 곡이 계속 나오는 경우가 없었기에 머릿속을 맴돌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 원서접수 전날 동네 할인마트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부루퉁한 표정의 남자 직원이 왜 왔냐는 식으로 묻길래 선뜻 말이 안 나와, 아...그, 여권 사진 같은...하고 운을 떼니까 수능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 하고 말을 가로채고는 몇 장 찍어주었다. 언뜻 불쾌했지만, 지금 나이 먹고 수능 치는게 쪽팔리면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서 접수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7년만에 찾아간 모교는 겉보기는 똑같았지만 어느새 운동장 구석에 지하주차장이 딸린 체육관이 들어서고 바닥에 마루장판을 깔고 교실 학생 밀도도 많이 성글어지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4층 진학지도실에서 재수생 원서 접수한다는 글이 쓰인 A4 용지 아래에는 실내화를 신고 올라오세요 하는 문구가 붙어있기에 솔직히 망설였다. 둘러봐도 실내화가 보이지 않았고 덧신조차 없었다. 내 앞에는 역시 재수생이 틀림없는 자그마한 꽁지머리의 여자 하나가 역시 원서 접수하려는 듯 건물에 막 들어서고 있었는데, 조금 주저하다가 신발을 벗더니 양말만 신고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게 아닌가. 당연히 나도 따라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바닥은 매우 매우 더러웠다. 나처럼 마루장판 깔기 전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인 게 틀림없었다.
원서 접수하면서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신분증을 슬쩍 훔쳐봤는데 주민번호 앞자리가 84로 시작하는데다가 그 신분증이라는 게 부산교대 학생증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것도 여자니까 군대도 안 갔다왔으니 지금쯤은 대학 졸업한지 오래일 거 아냐. 교대 나왔지만 임용고시 줄줄이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어디 한의대라도 가고 싶어하나? 왜 수능을 다시 치려고 하지? 왠지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안도 되었다. 지금도 수능을 어떻게 쳤을까 궁금하지만, 나는 사실 그 여자 이름이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1년 선배였으니까 내가 아는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볼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D 데이가 300대에서 200대로, 또 100대로 줄어들었다. 군대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하루는 느리게 가더라도 한 달은 빠르게 간다. 하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고, 한 달은 내가 이미 떠나보낸 과거니까. 찬바람이 불어도 모기가 기승을 피웠지만 가을이 오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수시접수한다고 바쁜 애들이 많았지만 내가 접수할 이유는 없었다.
9월 모평 이후로 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수업만 대충대충 듣는 수준이었고 별도 공부는 거의 안 했었다. 모의고사 문제는 풀었지만 거의 아는 것만 찍는 수준이었다. 공부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9월 모평에서 드디어 수학이 1등급이 나왔고, 2주 뒤의 다른 모의고사에도 1등급이었다. 수학이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착각해서 사탐 위주로 공부해야겠다 싶어졌다. 조금만 성적 올리면 서울대학교도 도전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값도 물론 중요했지만 현실적으로 국립대니까 등록금이 쌌다. 등록금이 걱정이라면 장학금 받으면 된다는 말은 하질 말기 바란다. 아무튼 문제는 내게 국사는 기초조차 없다는 거였고 국사 수업은 기초 넉넉한 재수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내겐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업을 포기하고 자습을 시작했다.
국사 공부는 매우 단순하게 했다. EBS에서 50강쯤 되는 인강을 MP3에 다운로드받았다. 웬 뚱뚱한 남자 선생님이 나오는 거였는데 알고보니 2010년이 아니라 2009년 거였다. 큰 상관은 없었다. 통학하는 데만 40분 정도 걸렸는데 주로 오가면서 말하는 것만 들었다. 어차피 단순암기과목이고, MP3의 조그만한 화면 봐야 별 소용도 없었다. 가끔 칠판에 지도라도 그리는 성 싶으면 잠깐씩 화면을 켜서 봤다. 한 화씩 보고 교과서를 펴서 해당 분량을 그냥 외웠다. 교과서 나오는 모든 문장을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 무작정 외웠다. 길거리 다니면서 중얼중얼하자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교과서에 없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 이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외우고 나면 마지막으로 문제집을 풀었다. 효과는 있기는 있었다. 다만 너무 늦게 시작했고 진도 역시 너무 느렸다.
슬슬 수능일이 다가오면서 학원을 그만두는 애들이나 다른 학원 다니다 때려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많아졌다. 재수학원에서 여자 여자 사귀고는 노닥거리는 애들도 많았다. 사실 나는 애들 이름조차 거의 모르는 편이었지만 매일 보는 얼굴이 익지 않을 리는 없었다. 처음엔 재미있던 선생님 농담도 슬슬 질려가고 맘에 안 드는 수업이라고, 독학하겠다고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는 애들이 줄줄이 늘어났다. 사탐의 경우 한 시간에 세 명밖에 안 듣는 처참한 경우마저 보였다. 선생님이 불쌍해 보였고 어차피 독학 따위 자신없었기에 나는 국사를 제하고는 수업을 꾸준히 들었다. 물론 종종 자기는 했다.
D-100일 이후로는 거의 정형화된 틀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명확히 시간표와 달성분량 같은 걸 짜서 공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얼마만큼 공부해야겠다 하는 양과 규칙은 확연히 잡혀 있었다. 다만 이제는 일찍 자려고 애썼다. 수능 전날도 새벽 2시에 잘 건 아니니까. 하지만 버릇이 잡혀 있어서 막상 일찍 자기가 쉽지 않았고 낮에 조는 버릇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불안했다.
더 불안한 건 성적이었다.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그나마도 자꾸 미끄러졌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 성적을 자신만만하게 받아들고 생각했을 때는 지금 내가 이런 성적 받는 상황에 처해 있을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성적은 오히려 내려가기만 했다. 수리 성적은 계속 널뛰기만을 반복했다. 쉬울 때는 1등급이 나왔지만 조금만 어려워지면 3등급까지도 떨어졌다. 공부를 더 한다고 꼭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물론 수학적 기초가 많이 약하긴 해도 어려워서 못 푸는 건 아니었다. 문제가 어려우면 풀긴 풀더라도 검산할 시간이 없어서 계산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어 틀리는 것이다. 두 번씩 검산할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고칠 수 있었고 9월 모평 때처럼 1등급이 나왔다. 하지만 수능이 그렇게 쉽게 출제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또 두 번 검산한다 치더라도 한 번 실수했는데 두 번 연달아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어느 문제를 실수했는지 알 수 없으니 모든 문제를 다 검산할 시간이 없는 한은 검산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객관식의 경우는 내가 실수하면 보기에 답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다고 보고 주관식 위주로 검산을 실시했지만, 제일 앞페이지의 객관식 문제를 실수로 틀리는 경우도 많았다. 한 선생님은 그 문제를 자살 방지용 문제라고 부르기까지 했었는데도 그랬다. 충분히 풀 줄 알면서 틀린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고, 2004년 수능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들었다.
국사에도 시간을 꾸준히 투자하고 있었지만 외울 분량이 너무 많아 성적이 오르는 속도는 너무 느렸고, 타 과목들의 성적도 그닥 동향이 없었기에 서울대 갈 가망도 없는데 왜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자기만족이었을 것이다. 올라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희망 하나는 걸고 싶은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
그래도 차마 제2외국어까지는 공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했었고 재수 시작하면서 수능 기출문제를 풀어봤긴 했다. 문제가 너무 쉬워서 고등학교 적의 희미한 기억만으로도 몇 개를 풀 수 있었다. 걱정 덜었다고 좋아했지만 알고보니 내가 봤던 건 2003년의 기출문제였고 요즘의 독일어 수능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아랍어를 하려고 EBS 프린트물만 잔뜩 뽑아두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인강 하나 제대로 안 보고 포기해버렸다. 입맛이 썼다.
수능을 한 달여 앞두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쳤는데 결과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떨어지지 않는 건 영어 성적 밖에 없었다. 언어가 2등급 나오고 수학이 3등급 나왔을 적에는 한 번은 웃고 넘길 수 있었는데 그 다음번 모의고사엔 성적이 더 떨어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오르기는커녕 사탐을 포함한 전 과목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까지 쳤던 모든 모의고사 문제지를 모아두었다가 계속 복습에 활용했다. 외국어 영역은 문법 관련 문제만 스크랩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언젠가 한 번은 모의고사에 좀 까다로운 수학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틀렸다. 푸는 법은 정말 쉽지만 단순 계산이 짜증나게 복잡한, 그야말로 지저분한 문제였고 그래서 틀렸다. 복습한다고 이때에 다시 풀어 보았지만 또 틀렸다. 세 번 네 번을 풀었지만 여전히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풀 때마다 죄다 다른 곳들에서 참으로 개성있게 계산이 틀린 부분이 나왔다. 검산해도 어디서 실수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지와 일일이 대조해야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가 있었다. 여섯 번째 풀다 여전히 답이 안 나오자 포기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럴까. 수학 공부가 정말 하기 싫어졌다. 수학이란 존재를 저주하고 싶었다. 왜 내 발목을 이렇게도 몇 년씩 잡는 걸까. 물론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사실 수학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문제였지. 그게 더 골치 아팠다.
딴에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수능 전날 긴장으로 밤잠을 못 잘까봐 일부러 두 시간만 자고 시험을 쳐보기도 했다.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 적어와야 할 테니까 시험 치고 시간을 남겨서 그거 옮겨적는 연습도 몇 번 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에는 문제가 풀렸다. 지금은 풀리지 않는다. 이게 분명히 답일 거라 생각했는데 매겨보니 아니었다. 대체 왜지? 슬럼프가 온 것이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일까?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뜯었다. 가망 없는 국사 공부 따위 때려친 지 오래였다.
뚜렷한 해결책 없는 채로 아까운 시간만 줄어들어갔다. 300대였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두 자리, 그리고 한 자리가 되었다. 재수학원이 종강했고 사물함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교재들을 마대자루에 넣어 버리고 집처럼 익숙했던 교실을 떠났다. 작별인사할 애들조차 없었다. 아웃사이더짓 너무 심각하게 했었나 생각했지만 사실 눈앞에 닥친 문제에 그런 거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EBS 최종 모의고사 언어/수리 3회짜리를 수능 바로 직전에 차례로 풀려고 아껴두었다. 수능 삼일 전에 그거 언어영역을 펼쳤는데 지문이 안 읽혔다. 또 틀리면 어쩌지, 또 그러면 어쩌지. 몇 문제 풀다가 그만두고 수리를 펼쳤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문제 풀고 바로 그 문제 답을 확인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서너 문제를 줄줄이 틀리고 나자 더 이상 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 사소한 계산실수였다. 그 뒤로도 계속 그랬다.
수능 바로 전날은 아무 것도 하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상황에 다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실패할 수는 없었다. 이 나이에 또 일 년을 더 투자해 재수할 수는 없었다. 성적이 나오면 어디든 가야 했다. 거기에 만족해야 했다. 거기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시험 못 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조차도 차마 들지 않았다. 최종 정리할 때는 수능 전날에 이거 요약해놓은 거 총복습하고 저 책 보고 해야지 하고 한 달 전에만 해도 계획했는데 수능 전날이 막상 닥치니 정말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가방에 수정테이프를 두 개 넣고 사인펜을 세 자루 넣고 잘 깎은 연필도 두 자루씩 넣고 샤프심도 세 통을 넣고 지우개도 새 걸 하나 더 샀다. 혹시 모르니 많이 가져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고 서랍 안에 집어넣고 MP3도 역시 서랍 안에 넣고 아예 잠가버렸다. 성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런 건 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일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하는둥 마는둥 하다 밤 9시에 이불을 폈다. 잠자리에 누워서 내일은 수능치는 날이 아니야 하고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며 관련된 모든 생각에서 도피하려고 시도했다. 어차피 못 칠 바에야 긴장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잠은 금새 들었지만 여러 차례 깨었다. 악몽을 꿔서였는지 뭐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차례 깨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새벽 다섯 시였던가, 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와서는 조용히 기도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수능 한파가 오지 않아 특이하게도 전혀 춥지 않았던 시험일 아침. 나는 여전히 오늘이 수능일이란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거의 아홉 시간을 잤지만 매우 피곤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이뇨제라고들 하니 참았다. 수험장은 걸어서 20분 걸리는 꽤 가까운 곳이었지만 부모님께서 태워다주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승용차들과 도시락을 든 수많은 수험생들과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와 경찰들, 호들갑피우며 선배들 응원하는 고1 고2 학생들까지, 이 광경을 내가 다시 보게 되다니.
달라진 건 지난 7년간 부모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하고 흰머리 뿐이었다. 못난 아들을 먹이겠다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하고 점심 도시락을 싸던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방 안에 몰래 들어와 자는 척 했던 내 얼굴 옆에서 기도를 올리던 아버지의 얼굴 역시. 이미 환갑도 지나신 분들이다. 나는 무어가 잘나서 번듯한 월급봉투 하나 받아오지 못하고 이렇게 부모님을 고생시키고 있는가. 목에 뭔가가 걸려 흔해빠진 잘 치고 올게요 같은 말도 못하고 묵묵히 차에서 내렸다.
부모님 작별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데 한 학생이 손 들고 뭔가를 하다가 내 얼굴을 때려서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 순간 든 생각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학생 뒤통수에 대고 뭐라 화를 낼 생각도 못했다. 깨진 거 아냐? 안경은 멀쩡했지만, 만약 깨지기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비 안경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언제나 모든 상황에선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운이 좋건 안 좋건 상관없다. 나는 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불안해졌다.
복도로 들어서니 선생님이 비닐로 된 덧신을 나눠주며 신으라고 했다. 잘 맞지 않는 덧신을 신발에 찢어져라고 우겨넣다가 문득 옆을 보니 다른 몇몇은 자신있게 쇼핑백에서 슬리퍼를 꺼내 신고는 계단을 올라가는 게 아닌가. 덧신을 씌운다 해도 운동화를 종일 신고 있으면 발에 땀 차니까 불편한데. 재수학원에서 쓰던 슬리퍼 가져왔으면 되는데. 대비가 되어 있기는 뭐가 되어 있어.
그것보다 좀 더 큰 문제는 시계였다. 알람 기능 같은 거 있는 디지털 손목시계는 안 된다기에 항상 쓰던 것 대신에 집에 굴러다니던 싸구려 증정품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가져왔었다. 고등학교 중학교 때 나는 항상 시계를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학교 종 치는 순간에 맞추는 버릇이 있었다. 방송 시보에 맞춘다고 해도 학교 시계가 그것과 몇 초쯤 차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만약 시험 치는 중에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면, 지금 대략 3분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2분 37초 남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건 꽤 큰 차이가 있다. 재수할 때에는 모의고사 칠 때마다 그렇게 했다. 수능날도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근데 이 망할 놈의 싸구려 시계가 시간을 맞추려고 용두를 돌리니까 툭 빠져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사인펜 세 자루 챙기지 말고 시계를 두 개 가져와야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1교시 시작할 때까지 거의 시계와 씨름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더 열받는 건, 정작 시험이 시작되자 상당수의 수험생이 차고있는 디지털 시계에 대해서 감독관이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디어 감독관이 들어오고 시험 준비가 시작되었다. 여러 모로 찜찜했지만 최대한 노력한 건 지금 이 시험이 수능이 아니라고 내 자신을 착각시키려고 애쓴 것, 그리고 긴장을 풀고 문제에 집중하기로 한 것 두 가지였다. 시험 망해도 부산대학 정도는 갈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집에서 가깝고 하숙비 안 들고 국립대라 등록금도 싸고 얼마나 좋은가. 거짓 생각이라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던 것 같았다. 참고로 부산대학에 불만은 없다. 누나가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언어는 처음엔 집중이 안 되어 당황했지만, 곧 익숙해져 풀다보니 꽤 무난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반가운 건 공과대학 2학년 때 들었던 데이터구조/알고리듬 수업에서 어레이하고 링크드 리스트가 난데없이 지문으로 나왔던 것 정도였다. 시간 아낄 수 있다고 즐겁게 생각했지만, 배운 지 오래되서 결국 지문 읽고 풀어야 했으니 별 소용은 없었다. 어쨌건 무난하게 두 바퀴를 돌았고, 끝날 무렵에는 헷갈리는 선택지가 몇 개 남았다. 바로 며칠 전의 실패가 머릿속에 남아 과연 점수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되었다. 내가 정답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란 보장은 없었다. 시계를 정확히 맞추지 못했으므로 불안해서 여유시간을 좀 많이 잡고 마킹을 시작했다. 덕분에 OMR 마킹을 보고 가채점용 답안을 수험표에 옮겨적은 뒤 확인까지 하고도 시간이 좀 남았다.
수리 나형은 쉽게 느껴질 정도여서 꽤 빨리 풀었고 남은 시간에 주관식 문항은 모두 검산을 실시했다. 물론 이야기했듯이 쉽다고 해서 잘 친다는 보장은 내겐 없었다. 검산을 했는데 틀린 문제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맘에 무척 걸렸다. 9월 모의평가 때는 검산해서 5문제의 답을 고쳐서 맞췄고 1등급을 받았었다. 답안지 걷어갈 때 앞자리 앉은 학생(얼핏 듣기로 강남대성 출신인 것 같았다)의 주관식을 슬쩍 보다가 내 것과 답이 몇 개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또 사소한 덧셈 같은 거 줄줄이 틀리고 쟤가 맞았겠지, 아무렴 내가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있어 하는 생각에 또 우울해졌다.
점심 시간에는 과자류라면 질색을 하시는 어머니가 웬일로 초콜렛을 도시락에 넣어주셔서 먹었는데, 둘러보니 수험생들이 죄다 단 거 하나씩 들고 먹고 있었다. 아마 어디 방송에서 전문가니 하는 사람이 나와서 초콜렛이 수험생에 좋다 같은 이야기를 최근에 했었던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점심은 조금만 먹었고, 목이 말랐지만 물은 최소한도로 마셨고 화장실에는 쉬는 시간마다 두 번씩 갔다. 사탐 시간에 화장실 가고싶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재수학원에서 모의고사 치다가 사탐 시간에 두 번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던 적이 있었다.
외국어는 만만하게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빈칸추론에 까다로운 문제가 하나 있어서 살짝 당황할 뻔 했었다. 해석은 되는데 답이 헷갈리는 것이다. 세 번째 풀 때 답을 고쳤지만 조금 불안했다. 사탐은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에 꽤 편한 마음으로 쳤다. 국사는 아는 것만 빠르게 풀었고, 한국지리와 경제는 헷갈리는 문제가 몇 개 있어서 시간이 빠듯했다. 시계가 시보에 몇 분 몇 초 늦는지 시험지에 적어놓고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썼다. 사회문화는 예상대로 쉬워서 사탐 다 푼 다음에 지리와 경제의 마킹을 수험표 뒷면에 옮겨적고도 시간이 남았다.
아랍어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치지 말고 일찍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그리고 나 같은 생각을 한 수험생들이 십여 명이나 교실서 빠져나가 포기각서 쓰고 집으로 갔지만 그러기엔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각서 쓴다 하더라도 안 치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왠지모르게 들어서 치기는 쳤다. 예상대로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고, 풀 수 있는 것도 하나도 없었지만 왠지 다 찍고 자기엔 쪽팔려서 열심히 푸는 척 했다. 그 짓도 몇 분이나 할 수는 없으니 결국은 OMR에 적당히 예쁜 모양이 되도록 마킹하고, 괜스레 페이지를 넘겨 고2 때 제2외국어로 공부했던 독일어나 몇 개 풀어보려 애써 보았다. 2004년 수능 독일어는 정말 쉽게 출제되어서 지금도 몇 문제쯤은 맞출 수 있었는데 2010년엔 그렇지 않았다. 결국 그래도 시간이 남아 엎드려 잤다. 잠이 안 왔지만 고개 박고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종료 종 치고 시험지 거두고 감독관이 모두 확인한 후 퇴실해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 왜 그리도 시간이 길게 느껴지던지 모르겠다.
거의 뛰다시피 수험장을 떠났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부모님이 중국요릿집에 데려다주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 박혀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M모 사이트에 접속했다. 의외로 컴퓨터로 가채점하는 방법을 몰라서 한참 헤맸다. 제일 불안한 수리 나부터 채점하기로 했다. 92점. 한 문제는 계산 실수고 다른 한 문제는 풀이 자체가 잘못되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채점해 보았다. 결과는 동일했다. 운 좋으면 1등급도 나올 수 있는 점수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서 충분히 대박이다. 1 더하기 1을 실수해서 6문제 7문제 틀리고 70점대 점수 받지 않는 것만 해도 천운이다.
고함지르고픈 생각을 억누르고 언어를 채점했다. 막상 어렵다고 느낀 문제보다는 애매하다고 느낀 문제를 두 개 틀렸다. 외국어는 97점 이상은 나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었다. 사탐이 걱정이었는데 거의 만점 아니면 하나씩 틀렸다. 국사는 3등급 턱걸이할 수준까지로 오르긴 했지만 좋은 점수는 못 되었었고(중간에 공부를 포기하면서 근현대사 관련 부분을 거의 공부 안 했던 게 제일 큰 문제였다. 빠짐없이 다 틀렸으니.) 아랍어는 채점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종합해보면 언수외에 사탐 3과목이 1등급이니 여태껏 친 모든 모의고사와 수능을 통틀어 가장 잘 친 점수였다. 서울대야 물 건너갔지만 연고대 웬만한 과 정도는 문제없이 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야. 나도 운이 좀 따라주는구나 하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의심도 좀 들었다. OMR 마킹 다 한 뒤에 OMR 카드 보면서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을 옮겨적고 난 뒤 확인까지 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부실한 인간에겐.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고로 지금 기뻐해선 나중에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경험해본 적이 있잖은가. 부모님조차도 내 성적을 믿고는 싶지만 믿어도 될까 하는 눈치였다.
성적 발표날까지는 주로 그런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 물론 입시 관련 인터넷 사이트도 열심히 뒤지고 M모 사이트 사장이 하는 입시설명회 가서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부당함에 대한 장광설을 듣기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1년 동안 살 많이 붙었다. 젠장.) 맛있는 것도 먹고 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성적 발표날에 모교 찾아가서는 원서 접수날처럼 양말발로 더러운 마룻바닥 위를 걷는 대신에 자신있게 구석의 신발장을 열고 귀빈용이라 표시된 슬리퍼를 꺼냈다. 진로상담실에서 명부에 내 이름을 서명하면서 심장이 잔뜩 쿵쾅거리는데, 내 것을 찾기 위해 성적표를 뒤적이던 선생님이 내 성적표를 주기 전에 한 번 슥 보고는 한 마디 던졌다. 학생 공부 잘하네 하고 말했다. 긴장한 마음에 그럼 대체 얼마나 잘해야 정말 잘하는 거죠? 하고 따질 뻔 했다. 낚아채다시피 성적표를 받았다.
의외로 나는 성적표에 표준점수하고 백분위, 등급만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성적표 받아들고도 이게 원점수로는 얼마나 차이난다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성적 같아 보였고, 사실 나중에 집에 와서 대조해보니 가채점한 것하고 단 1점의 차이도 없었다.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사하고 제2외국어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서울대 중하위권 정도는 턱걸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좀 남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히 과욕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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