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집 살 돈조차 없는 형편. 와 닿기 어려운 이 말이 조기 졸업을 해야만 했던 이유였다. 보통 조기 졸업은 민사고, 과학고 출신에 엄청난 선행 학습을 한 받은 친구들에게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는 정확히 반대였다. 일반고였고 선행은 커녕 학교 말곤 기댈 곳조차 없었다. 인간의 의지와 극한 상황은 불가능한일까지 가능하게 만든다. 내 눈은 점점 기숙사 소등 이후에도 글씨를 읽을 수 있게 적응이 되어 갔고 6과목을 단 두 번의 방학 동안 마스터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국 가난에 부모님을 탓하고 가난이 싫어 게임만 했던 뚱보가 지금은 카이스트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실패할 이유만큼이나 성공할 이유 역시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실패란 생각이 들어 좌절의 눈물을 흘릴지라도, 먼 훗날 그것은 성공의 씨앗이 되어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외로웠던 경험이 있었기에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기에 돈의 소중함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날 내가 힘들게 공부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여러분에게 조언도 해줄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그 모든 것은 나를 힘들게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야말로 나를 이루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홈쇼핑 광고를 보던 소년, 외로움과 친구가 되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주로 보았던 것은 홈쇼핑 광고였다. 늦은 밤에도 나는 혼자 집을 켰다. 조그만 음식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누나도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밤늦도록 부모님과 누나를 기다렸다. TV 정규 방송은 이미 끝났고, 당시에는 케이블 방송도 제대로 안 깔려 있었기 때문에 내가 부모님과 누나를 기다리며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오락은 TV 홈쇼핑 광고 보기였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면 지쳐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누군가를 홀로 기다린다는 것에 익숙해졌다. 점점 외로움이라는 것과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소외감에 익숙해졌다. 나는 이 세상의 주변인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홈쇼핑만 보고 있던 나에는 새로운 할 일이 생겼다. 학원을 다니게 된 것이다. 영어가 부족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영어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님은 흔쾌히 학원에 보내주셨다. 하지만 학원비 납부일만 되면 부모님은 까먹었다며 나중에 내겠다는 말씀만 하셨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만, 얼마 안 되어 그 이유를 이해했다. 학원이란 곳은 돈이 없는 나 같은 학생을 반겨주는 곳이 아니었다. 늘 학원비 독촉에 시달렸고 결국 나는 얼마 안 되어 학원을 그만두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홈쇼핑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집에 있는 시간 동안 거의 하루 종일 게임을 했다. 잠을 자다가도 몰래 일어나서 게임을 했고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게임을 했다. 당시에 나는 지금보다 더 작은 키에, 몸무게는 20kg나 더 나갔다. 성격은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해 갔고 자신감도 점점 잃어만 갔다. 나에게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렇게 크게, 혹은 작게 인생에 패배라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학원 교육이나 과외를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은 외로웠고 항상 박탈감만이 가득했다. 언제나 집에는 나 혼자 있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남들 다 하는 외식도 한번 해보지 못했다. 가족끼리 여행을 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친구들이 “너는 학원도 안 가고 놀 수 있어서 좋겠다.”라고 말할 때마다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나의 모든 것 하나하나가 나를 실패하게 할 이유인 것만 같았다. 나는 점점 그렇게 스스로를 포기해 갔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가정 형편, 조기 졸업만이 살 길

그렇게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목표 대학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다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점수가 높은 대학을 적어서 냈다. 절반 정도가 서울대를 목표로 한다고 했고 그 외에는 거의 고려대, 연세대를 적어 냈다. 당시 나는 포항공대를 적어서 냈다. 흔히 카이스트, 포항공대, 서울공대를 국내 최고의 공대라고 하기에 그중 하나를 고른 것이다. 당시에 나는 일반고에서 카이스트를 간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었고, 서울대는 마냥 높아 보였다. 그나마 포항공대가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선택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어찌됐든 그때부터 나의 입시 목표는 포항공대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듣지 않았으면 좋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언제 집이 경매로 넘어갈지 모르고, 당장 내일이라도 쫓겨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밤중에 문틈 사이로 흘러 들어온 부모님의 낮은 목소리에 나는 정말 멍하니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전까지 집안 경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들은 적이 없었다. 세상은 이 작은 공간마저도 나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친척으로부터 우연히 얻어 온 컴퓨터를 분해했다. 그 컴퓨터는 오래되어 거의 폐기 처분해야 할 수준이었는데 혹시라도 좋은 부품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어머니께서 오셔서 나에게 물으셨다.

 

“좋은 컴퓨터가 사고 싶니?”

“아니요.”

“엄마가 미안해...... 그런 것도 못 사주고......”

“괜찮아요.”

“엄마도 잘해 주고 싶은데 그게 어렵다.”

“뭘요.”

“어제 이야기 다 들었니?”

“......”

“엄마가 미안해......”

“......”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컴퓨터를 만지작거렸지만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하필 나한테만… 세상은 왜 이렇게 잔인할까….

곧 나는 고2 조기 졸업에 포항공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포항공대에 입학하면 전액장학금을 받아 전혀 학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였다. 그리고 조기 졸업을 하면 고등학교에서도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더 이상 고등학교를 다니며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가정 형편이 견뎌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2 조기 졸업을 목표로 본격적인 공부에 돌입했다.

 

불도 켜지 않고 몰래 공부해야 했던 시간들

나의 입시 준비는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반드시 학비 면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나에게 더 이상의 미래는 없었다.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대학 입시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처음으로 치른 내신 시험 결과는 포항공대를 목표로 하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일반고에서 포항공대를 고2 조기 졸업으로 가기 위해선 전교 1~2등의 성적을 유지해야 했지만 중간고사 결과 나는 50등 밖의 성적을 받고 말았다.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그 등수로는 포항공대에 가기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 정도밖에 안 되었다. 나의 각오, 다짐이 모두 헛되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 정도 각오를 하고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 그렇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한 번 실패한다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이후로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포항공대 수학과 학생 박주홍이다.’

도서관 책상에 이렇게 써 붙였다. 나를 자극할 것이 필요했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그 글귀를 보았다. “네가 포항공대에 갈 수 있다고?” 하며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하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 오기가 생겼다. 반드시 성공해보이겠다고. 내 삶에 더 이상 우울하고 힘든 날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믿을 것은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 반드시 이뤄내고 싶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거의 매일 새벽 4시가 넘도록 공부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숙사에서 새벽 1시부터 야간 점등을 실시하였다. 기숙사생들이 너무 늦게까지 공부해서 수업 시간에 존다는 이유로 밤에 무조건 불을 끄기로 한 것이다. 기숙사 독서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갑자기 공부할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새벽 1시에 야간 점등을 하면 방에서 자는 척하다가 몰래 독서실로 나와 홀로 공부를 했다. 사감님께서 가끔 확인하러 오시기 때문에 스탠드도 켤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나는 멍하니 눈이 어둠속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그렇게 잠자코 있으면 동공이 점점 커지면서 희미하지만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필로 빼곡히 적은 문제 풀이까지는 볼 수가 없었지만 나는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가끔은 캄캄한 독서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서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달려야 했다.

 

카이스트를 목표로 새로운 계획을 세우다

그렇게 1학년 1학기가 지나고 첫 번째 여름 방학이 되자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이 책의 또 다른 저자인 공신 멤버 ‘변진우’와 친해졌는데 당시 진우는 고2 조기 졸업에 KAIST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는 진우의 영향으로 KAIST도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KAIST, 포항공대 두 곳을 목표로 삼고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KAIST, 포항공대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학, 과학의 경우 고등학교 전 과정을 심화 공부해야 했다. 심층 면접이 이뤄지는 고2 10월 전까지 고등학교 수학, 과학 전 교과를 공부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새로운 목표를 세운 시점은 7월 중순이니 대략 1년 2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단 수학은 3개의 심화 과목 중 ‘미분과 적분’을 골랐다. 과학의 경우 물리, 화학, 생물 3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나는 이 문제로 한동안 고민했다. 확실히 물리를 좋아했고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물리는 천재들의 학문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과학고 물리 천재들 사이에서 내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렇지만 다른 과목이라고 만만한 것도 아니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물리를 선택했다. 곧 계획에 윤곽이 잡혔다. 당시 나는 수학 10-가만을 공부한 상태였다. 면접 전까지 10-나, 수1, 수2, 미분과 적분, 물리1, 물리2 이렇게 6권을 추가로 독파해야 했다. 고1 여름 방학과 2학기, 겨울 방학 그리고 고2 1학기와 여름 방학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학기 중에는 최대한 내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계획에서 제외했다. 고2 여름 방학 역시 본격적으로 면접을 준비해야 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계획에서 제외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6권의 책을 두 번의 방학 동안 모두 공부해야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감당이 안 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하지만 나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맨땅의 헤딩, 나만의 항아리 공부법 개발

실제로 공부 계획을 세우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사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독학으로 해야 했다. 공부 계획, 공부법 모두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특단의 방법이 필요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더욱이 주변에 KAIST나 포항공대로 진학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지도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전적으로 인터넷 정보에만 의존해야 했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려다 보니 고민만 점점 깊어져갔다. 지금도 나의 일기장을 보면 당시 내가 고민하던 공부 계획이나 공부법에 대한 흔적이 끊임없이 나온다. 하루에 한번씩, 길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공부법에 관한 내용을 일기에 적었다. ‘이 책을 써야한다, 저 책을 써야 한다’,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저렇게 공부해야 한다.’라는 식의 내용을 빼곡히 일기에 적어놓았다. 이렇게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느 정도 나만의 공부법이 생겼다. 지금은 ‘항아리 공부법’이라는 부르는 방법이다. 공부법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고 하자. 물을 어떻게 붓더라도 물은 항아리의 밑바닥부터 차오른다. 이것은 모든 만물의 이치다. 공부라는 것도 똑같아서, 결국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공부할 때, 가장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가며 난이도를 점점 올려갔다. 한 권의 책 안에는 각 단원이 있고 단원마다 난이도가 낮은 것부터 높은 것까지 존재한다. 보통 한 단원을 모두 다 끝낸 후에야 다음 단원 공부를 들어가지만 그러다 보면 첫 단원의 고난이도 부분에서 막혀 공부에 지치게 되는 것. 첫 단원부터 마지막 단원까지 쉬운 난이도 부분부터 쭉 살핀 후 다시 책의 제일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내용을 공부하는 식, 이것이 바로 나만의 항아리 공부법이었다. 이 방법을 통해 여름 방학 동안 10-나, 수1을 공부했고 겨울 방학이 끝날 때까지 수2, 미분과 적분, 물리1, 물리2를 모두 공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부법을 스스로 만들며 공부를 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빨리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수학, 과학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2학기 때 전교 석차가 100위권 가까이로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좀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다. 그동안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져 요금 미납으로 전화가 끊어지거나, 부모님의 신용카드가 정지되어 문제집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욱 의지를 불태웠다. 아버지께서는 다리를 다치시고도 당신의 치료비로는 돈을 쓰지 않고 오히려 불편한 다리로 학교까지 걸어와 나에게 문제집을 사다 주셨다. 주먹을 불끈 쥐고 공부했다. 결국 나는 졸업 직전에는 전교 2등까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3개의 전공을 가진 욕심 많은 카이스트 학생

이후 면접시험에서 나는 당당히 KAIST와 포항공대를 고2 조기 졸업 전형으로 합격하였다. 졸업할 당시 학교에서 걸어준 플래카드에는 KAIST에도 나의 이름이 있었고 포항공대에도 나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걸 보자 웃기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 나는 KAIST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욕심이 많아서 전공을 3개나 하고 있고 동아리 활동도 놓치지 않고 하고 있다. 대학에 입학해서 공연도 해보고 학교의 지원으로 해외 컨퍼런스에도 참가해 보았다. 방학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인턴도 하고 있고 꿈에만 그리던 연구도 직접 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때 다짐했던 대로 학생들을 위해 글도 쓰고 강연도 하며 멘토가 되어주고 있다.

여러분이 내 수기를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덮는 것으로 선배들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리고 여러분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멋지게, 그 누구보다 감동적인 여러분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당신이란 이름으로 기억될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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