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나에게 맡겨두자 !?
 
 
내일 시험이 있다.
이것 저것 하다 집에 오니 오후 7시다. 공부가 매우 하기 싫다. 공부는 아직 다 하지 못했다.
오늘 일찍 자고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면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자신'에게 공부를 맡겨놓고 꿈나라에 빠진다.
 
몇시간 뒤 알람이 울린다. 공부를 맡겨놨던 미래의 자신은 현재의 자신이 되어 있다.
매우 졸리다.
 
'좀만 더 자야지...'
또 다시 미래의 나에게 공부를 맡긴다.
무의식적으로 알람을 끈다.
 
그리고 계속 잔다. 아침이 밝아왔다. 공부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곤 생각한다.

'과거의 그녀석이 도대체 나한테 어떤 짓을 해버린 거야 !!!'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계획을 짤 때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굉장히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놓는다.
미래의 자신은 매일매일 규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고, 꼬박꼬박 야간 자율학습도 안빠지고 매일 달성한 양을 채우며, 자습시간에 졸음이 와도 절대 자지 않는다.
 
그런 삶을 보여주는 유명한 글이 있다.
보자.
 

삼수생의위엄.JPG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미래의 자신에게 막대한 부담을 남겨둔 뒤, 지금 이 순간을 불안한 마음으로 즐긴다.

방학 숙제가 나오면 '개학 전날의 나'에게 맡겨두듯이 말이다.

그 후 미래가 현재가 되었을 때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면서,

결국 주어진 일을 막장이 된 상태로 포기해 버리거나 아무렇게나 대충 끝내곤 자책하고 후회한다.

물론 닥치면 해내곤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때는 엄청난 양의 스트레스가 부하된다. 괴롭다.

 

 

이건 당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인간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국 공통의 스토리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루기'의 극복은 어떻게 할까?  

 

 

미래의 나=현재의 나

 

답은 간단하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와 똑같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똑같다고 생각하면 될까?

 

예시를 몇가지 들어보겠다.  추리해 내보자.

 

안철수.jpg

안철수 교수
 
"나는 나 자신을 잘 못믿는다. 그냥 놔두면 얼마나 풀어질 수 있는 사람인지 잘 안다.
반면 난 책임감은 굉장히 강하다. 난 이 점을 이용해서 나를 풀어지지 않게 만든다.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면 최신 컴퓨터 정보, 최신 기술을 이해해야 한다. 

그 때 썼던 수법이 있다.
미 리 잡지사에 전화를 하여 (자신이 모르는 ) 새로운 이슈가 되는 분야에 대해 글을 쓴다고 무작정 약속을 해 버린다.
그 후 그 약속을 지키려고 고생고생해서 글을 쓰고 나면, 그 분야에 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 수준이 된다.
즉, 미리 대외적으로 약속하는 것이다."
 
 
 
 
구본석.jpg
구본석 공신
 
"난 삼수 초반에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도서관을 이용했다.
그러나 집에서 가깝다 보니 조금만 힘들어도 집에 가서 쉬게 되고 정신이 해이해졌다.
그래서 난 집에서 먼 도서관으로 가서, 텐트를 치고 살기로 결심했다.
집에는 주말에 딱 한번 왔다. "
 

 

다른 사람의 예를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나의 경험 한가지를 말해 보겠다.

난주말에 일어나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집에서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집에 있으면 컴퓨터를 만지고 자꾸 TV를 키고 왔다갔다 집에서 돌아다니다가 결국 의미없이 주말을 흘려 보내게 된다.

그걸 깨달은 뒤, 요즘 난 주말에 일어나면 평소와 마찬가지로 씻은 후, 무작정 밖으로 나가 버린다.

밖에 있게 되면 학교에 가든 친구를 만나든 길거리를 돌아다니든.. 집에 있는 것보다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말에 일어나서 샤워를 해야 할 때에는 상당히 귀찮다.

내가 그 귀찮음을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집에서 잉여로 지내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난 무작정 샤워실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든 샤워를 해야 하고 머리를 말려야 하고 옷을 입어야 한다.

 

 

 

 

 

 

 

자기제어장치

 

 

3가지 예시를 본 후 대충 감이 잡히는가?

방법은 바로,  '미래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자기제어장치>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자기제어 장치란 자신이 최대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 자기제어장치를 실행되게 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야자할 때 '난 집에 가도 공부할 수 있어' 하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자신에 대해서 솔직해야 한다.

솔직하게 자신에 대해서 성찰해 보고, 어떤 점이 약한 점인지, 그 약한 점을 극복할 때는 어떤 환경이 있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보는 것이다.

위의 세가지 예시를 잘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적절한 자기제어장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자기제어장치가 없다면??

 

자기제어장치를 만들지 못한 채 미래를 마주한 순간에는 어떻게 할까?

앞에 예를 들었듯이 내일이 시험인 경우 말이다.

 

그럴 경우에 난 최대한 근시안적으로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즉, 눈 앞에 닥친 일만 생각하고 미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미래를 생각하면 자꾸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를 분리하게 된다.

반대로 근시안적으로 생각하면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시간간격이 짧아져, 그 둘이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내일이 시험이라면 미래의 나에게 일을 맡겨 버리지 말고, 그냥 근시안적으로 지금 눈 앞에 닥친 일만 해결해야 한다.

자명종이 울리고 매우 졸린 상태라 하더라도 근시안적으로 그냥 일어나 버려야 한다.

 

이 자기제어장치는 아주 작은 스킬에 불과할 수 있지만, 당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마법의 힘일 수도 있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와 같음을 생각하라.


Posted by 박현수4s
,

#1. 갈팡질팡.

이번 가을.

전 참 재밌게 봤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 드라마는 바로!!!!!

성균관스캔들입니다.

제가 남팬인 동방신기의 유천님과,

제 여자친구가 닮은 송중기와,

유아인, 박민영,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중견 연기자 갑수형이 나온,

그 드라마입니다.

제가 원래 달달한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인데...

이 드라마를 보다가 기억에 오래 남았던 대사가 있었어요.


아마 마지막회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박민영이 유천님의 아버지역할인 갑수형을 만나서 했던 대사였죠.

"원망이 아니라 경계로 삼아야겠다 다짐하고 있습니다.

한번 물러서면 그 다음에 감추기 위해 두 번을 물러서게 되고,

그 다음엔 갈지자로 엉망이 된 발자국 속에서 

처음에 어디로 가고자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요."




사실 뭐,

소위 말하는 명대사가 넘치는 드라마들이 가지고 있던 명대사들에 비하면,

뭐 그리 좋은 대사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전 참 이 대사가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전 이 장면을 보면서,

이 대사를 들으면서,

사람 사는 장면을 참 잘 묘사한 대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처음에 뭔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다가,

뭔가 시련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쉽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물러선 것으로 인해서 나중에 두 발자국 물러서게 되는 일이 생기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출발한 곳을 바라보면,

일(一)자가 아니라 갈지(之)자로 걸어와 있는 것이 우리가 보통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2. 대기업 인사담당자와의 대화

예전에 학생 운동에 투신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때 만났던 운동권 대 선배들 중에서 지금 한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인사 부분을 맡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과 했던 대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안실장,

우리가 이력서에 학력난 넣고 학점도 적게 하고 이런게,

소위 말하는 SKY들만 뽑으려는 것 같지?

그게 아니야.

얘네가 어느 대학에서 뭘 배웠는지는 사실 그렇게 크리티컬한게 아냐.

어차피 대학에 뭘 배웠든 우리 시스템 안에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거의 다 새로 가르쳐야 해.



회사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이 사람의 목표달성능력이야.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 노력 속에서 목표를 달성해내는 능력.

설사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빠르게 그 실패를 벗어나는 능력.

그게 바로 우리가 보고 싶은 능력이야.


안실장도 알다시피 우리한테 지원하는 입사지원자들이 보통 20대 중반에서 후반이야.

그럼 얘네들이 실무를 통해서 뭔가 목표달성능력을 입증해 보일 기회는 없었을거고,

그런 점에서 신입을 뽑을 때는,

살면서 진행되어 왔던 목표 달성 능력인 공부를 통해서 그걸 보는 것 뿐이야.

우리한테 SKY가 중요한게 아냐.

SKY라도 1,2,3차 면접에서 이런 능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가차없이 떨어뜨리는 것이 우리 원칙이야."



#3. 안타까웠던 24일간의 기록.

18일에 수능이 실시되고 나서..

보통 하루에 쪽지가 약 10개 정도는 오는 것 같습니다.

재수를 결심했거나,

삼수를 결심한 친구들이,

재수 삼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는 쪽지입니다.




어떤 분은 제게 재수를 해도 되는지 물어보기도 했고,

어떤 분은 제게 재수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고,

어떤 분은 제게 삼수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재수를 해도 되는지,

삼수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보통 이런 질문에는 제가 답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제가 직접 본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 대답이 자칫 잘못하면 무책임한 대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다음에나 답을 드리곤 합니다.



이 중에서 정말 진심으로 안타까웠던 쪽지가 있습니다.

현재 삼수를 할까말까 고민 중인데,

자신이 진짜로 공부를 시작한 고2부터 재수 때까지.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성적이 그다지 오르지 않아서 자신이 없다는 쪽지였습니다.



음..

사실 저는 독설을 잘한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저는 독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워낙에 상대 눈치도 보지 않고,

그냥 있는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다보니까 독설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은 위와 같은 쪽지를 보게 되면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정말 노력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이 분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제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4. failure or test(실패 혹은 시련)


음.

전 사실 겁이 많은 편입니다.

특히나 이성적으로 판별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겁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제가 겁을 내는 것은 초과학적인 현상입니다.

바로 귀신이죠.-_-;;

가위도 무섭습니다.

롯데월드 후룸라이드도 무섭습니다. 안전벨트가 없기 때문이죠.

전 확실하게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면 두려워하는 편입니다.



음.

혹자는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제 견해는 다릅니다.(이것은 다름의 차원이지 틀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 실패는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있는,

N수 예정인 학생들.

학생들은 실패를 한 것일까요?

스스로 답을 해보고 나서 계속 읽어주길 바랍니다.^^



제가 나이가 계속 들어가면서 계속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예전의 겪었던 사건 및 사고를 시련으로 생각하여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제 삶을 가지고 생각하고,

제 행동의 방침을 결정할 때는 틀린 생각은 아니나,

제가 저보다 어린 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조언을 던질 때는,

저 태도는 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 순간의 고통은 정말 무겁기 떄문입니다.



살면서 참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목숨같이 생각했던 운동을 못 하게 되었던 때도 있었고,

정말 하고 싶었던 꿈을 포기해야 했던 때도 있었고,

정말 노력해서 준비해서 봤던 수능 시험에서 고3 1년 중에서 가장 낮은 성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큰 사고를 당해서 정말 크게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아끼는 사람이 큰 병에 걸려서 목숨이 위태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좋았던 형편이 급작스럽게 안 좋아진 적도 있습니다.



그 순간 순간에는 

"아..인생 참 거지 같네."라는 생각,

그 생각에서 더 나아가 "아, 이러다 망하겠는데.."라는 생각.

결국 "실패한건가."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이 때의 사건들은 전부다 제게는 시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때의 사건 및 사고(accident)는 추후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실패(failure)가 되기도 하고,

시련(test)가 되기도 합니다.



시련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여러개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나는 단어는 ordeal과 trial, hardship, test입니다.

GRE 공부가 헛것은 아니군요.ㅎㅎㅎ



전 보통 시련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ordeal이나 hardship보다는 trial이나 test를 주로 씁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 사고로 인한 고난을 겪을 때,

이것을 시련, 즉 test, 즉 누군가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주어진 기회(chance)로 생각한다면,

여기서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실패를 한 것입니까?



전 이 질문의 답을 모릅니다.

답은 제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다만,

다시 한 번 더 도전할 것을 결심한 학생들이라면,

그 사건이 실패(failure)가 아니라,

시련(test)이라고 생각해주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이것을 자신을 좀 더 테스트 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준 시련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 다시 도전합시다.





#5. 실패는 무엇인가?


음.

요새 학생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리거하면 추신수 선수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전 아직까지는 박찬호 선수가 더 먼저 떠오릅니다.



음.

이건 아마 꽤 오래전에 박찬호선수를 응원하는 월간 GM의 최훈씨가 그린 만화인데요..


사실 제가 박찬호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저 채무 때문은 아닙니다.


제가 박찬호 선수(사실은 맨날 찬호형이라고 하지만.ㅎㅎㅎ)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는 절대 시련에 굴복하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박찬호 선수는 먹튀라고 불렸습니다.

돈을 돈대로 받고서는 실적은 나오지 않는,

전형적인 돈 먹고 튀어버린 선수였죠.-_-;;



계속되는 부진과 부상,

재활과 부상을 반복하면서 90년대 후반,

그리고 20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를 이끌어 갈 것으로 보이던 가장 앞길리 창창해보이던 동양인 우완 투수는.

계속되는 부상과 재활을 거치면서 먹튀라고 손가락질을 받았고,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던 강속구 투수 박찬호는,

야구전문가들 사이에서 "강속구를 던지던 시절은 잊어라!"는 충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2002년의 계약은 5년간 6500만 달러..

5년간 박찬호 선수는 33승 33패 방어율 5.56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2008년까지 저니맨(이 팀 저 팀 옮겨다니는 선수를 뜻하는 말.)으로 전락한 박찬호 선수를 보면서,

한국의 팬들은 과거의 영광을 잊었습니다.

"은퇴하고 그냥 한국으로 와라."라고 말하는 팬들도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박찬호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부활을 외쳤습니다.

그러던 2009년,

박찬호 선수는 투구의 본질을 깨달은 뒤,

속구보다 제구에 신경 쓰는 투수로,

선발보다 팀의 승리를 위해 불펜에서 희생할 줄 아는 베테랑이 되었습니다.



이 때 박찬호 선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투구는 타자를 제압하려고 공을 뿌리는 동작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걸 30대 중반에서야 알았다.”


하지만..

제게 더 인상적이었던 인터뷰는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종종 목표의 획득보다,

목표의 추구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전 실패는 도전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더 많은 기회가 여러분의 앞길에 있을 것입니다.



실패란,

도전하지 못하는 것,

목표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시련에서,

더 이상의 도전을 꿈꾸지 못하게 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실패입니다.



#6. 공신들과 학생들의 차이점.


음.

드디어 나왔습니다.

가장 쓰기 민감한 주제입니다.ㅎㅎㅎㅎ



제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거의 하루에 #한개씩을 생각하면서 미리 썼는데요.

그러다보니까 원래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완결하려고 했던 이 글을 지금 완결하게 되네요.^^;;



제 생각에 공신들이랑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차이는 2가지입니다.

1. 시련 극복의 mind set

2. 목표 달성의 capability

이것들입니다.



공신들이라고 해서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성공가도만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서형일 공신도 숱한 시련을 겪었고,

구본석 공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성태 공신도 고3 시절 공부하느라 울 정도로 힘든 적도 있었습니다.

뭐 요새라고 딱히 편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창민 공신 역시 고3 시절 분명히 오르지 않는 수리 점수 때문에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송용현 공신 역시 한 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시련이 있었고,

남혁진 공신 역시 간장만 먹어야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이라고 마냥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특징은 그 시련이라는 테스트를 극복해 온 것입니다.

구본석 공신과의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멤버도 있고,

서형일 공신 같이 냉철한 이성과 숱한 사색의 결과인 통찰을 통해서 극복하기도 했습니다.

저처럼 쌔뽁(운 혹은 복불복)으로 극복해 낸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입시라는 관문에서,

자신들이 겪었던 고난과 고통들을,

이겨내야 할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해서 성공을 쟁취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바로,

목표를 세팅하고 이를 달성하는 능력입니다.

큰 목표를 다시 작은 목표들로 나누고,

이런 작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결국 큰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을 갖춘 것이 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7. 실패는 두려워하되, 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성공을 의심하지 말라.

여러분,

자 이제 정리를 합시다.


제가 앞에서 실패는 뭐라고 했습니까?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내가 할 수 있을까 없을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여러분이 도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당연히 존재해야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Edward Vernon Rickenbacker라는 미국의 에이스 파일럿이 있었습니다.


그가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용기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으면 용기도 없다."



또한 제가 요근래 읽었던 함평나비축제 관련된 책 "나비의꿈"에서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꿈이 있는 자는 목표가 있고, 목표가 있는 자는 계획이 있고, 

계획이 있는 자는 실천을 하고, 실천을 하는 자는 실적이 있고,
실적이 있으면 반성을 하게 된다.

반성을 하게 되면 또 다른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누구에게나 머물 것인지, 떠날 것인지,
뛰어들 것인지, 관망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세상이 변화의 거대한 용틀임을 할 때, 그것에 정면으로 뛰어드는 것,
그 결단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바로 ‘최상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정이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두려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그리고 목표달성과 관련해서는 이것을 잊지 맙시다.

제가 예전에 칼럼에서 썼던 내용입니다.



그 목표 대학이랑 자기랑 사이의 거리를 재보자.

가령 목표 대학이 해발 8000m에 있는 산 꼭대기라면,

너의 위치는 어디인지 살펴보자.

아예 못 갈 정도면 거기는 0m다.

그래 좀 갈 정도면 해발 1000m다.

그래. 수리만 정복하면 갈 정도면 2000m다.

이렇게.

목표랑 나 사이의 거리를 재보자.

 

그리고 결심하자.

내일 7900m를 다 걸어가지는 않겠다고.

내일 5000m를 한 번에 오르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다고.

내일은 50m만 오르겠다고(이럼 너무 오래 걸리려나.)

내일은 100m만 오르겠다고.

이렇게 조금조금씩 올라서 정상까지 가겠다고 생각하자.

 

기적을 바라지말자.



흠.

지금까지 여러분이 좌절을 겪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을 의심하지는 맙시다.

성공을 의심하지는 맙시다.

우리의 성공을 의심하지는 맙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끝내고자합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능력은,

지금 세우고 있는 그 큰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굉장히 작은 목표일지라도 한 번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해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더 큰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큰 목표에 매몰되지 맙시다.

큰 목표에 매몰되지 맙시다.

큰 목표에 매몰되지 맙시다.



일단은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소소한 기쁨을,

정말 큰 기쁨으로 느끼면서,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더 큰 목표로 나아가 봅시다.


Posted by 박현수4s
,
의식하면 더 안된다?
 
 

 
손에 땀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손에 땀이 나면 
"왜 이렇게 손에 땀이 나지 ! "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자 손에 땀이 더 나게 됩니다.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결국 자신에 대해 포기를 하게 됩니다.
'손에 땀을 안 나게 하는 방법이 없구나..'

 

 
매번 시험 때 긴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시험 때 긴장이 되면
"긴장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자 더욱 더 집중이 안되고 문제가 읽히지 않습니다.
역시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되고 변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이상하게 어느 순간 어색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과 대화할 때 갑자기 어색해지면
'어색해지지 말아야지!' 하고서는 무리수를 던집니다.
하지만 그 무리수는 더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듭니다.
역시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되며 '아마 난 안될거야' 하며 자책합니다.

 

 
'노력역전현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뭔가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을수록
그와 정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노력역전현상에 계속 빠지면 악순환이 계속되어
본인은 자괴감에 빠지고 패닉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노력하면 다 잘된다?
 
 
 
 
이런 현상이 생긴 원인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노력을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열심히 하고 문제점을 접근하여 해결하려고만 하면 문제가 풀린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잘 해보려는 의도가...오히려 잘 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노력역전현상의 경우도 있습니다.
잠이 안올 때 '잠을 자야지!'생각을 하면 더 정신이 말짱해지면서 잠을 못자게 하는 것 역시 이런 경우죠.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 선생님도 부모님도 친구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마음을 편안히해'하고서는 애매한 답변을 해줄 경우가 많죠.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모든 현상을 치료하는 답은 될 수 없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노력역전현상을 겪었다면 한번 써보시길 바랍니다.)

 
 
 
 
 
 
 
 
 
 
 
 
 
반대로 생각하라
 
  
 
해결책은 바로 '반대로 생각하기'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 반대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죠.
 
 
 
손에 땀이 난다면 
'어? 손에 땀이나네. 그래! 땀이 얼마나 더 나는지 보자! 한웅큼 땀을 내게 해서 이 바닥을 적실거야'
하고서 반대로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시험 때 긴장이 된다면
'어? 긴장되네. 그래! 얼마나 내가 제대로 긴장하는지 보여주겠어. 자 날 봐. 제대로 긴장했잖아!'
하고서 반대로 긴장을 일부러 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어색하다면
'어? 어색하네. 그래! 내가 얼마나 어색한지 보여주겠어!'
하면서 일부러 더 어색하게 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해결책은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가 만들어낸 방법으로서  '역설의도기법(paradoxical intention)'이라 불립니다.
 
 
 
위에 언급된  '손에 땀이 나는 사람'은 실제로 빅터 프랭클 박사가 이 방법을 사용하여 1주일만에 완치했으며, 그 외에 '노력역전현상'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방법이 효과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반대되는 생각을 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어느 산 속에 지네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지네는 수백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걸어다니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수백 개의 다리는 모두 자신의 행동반경대로 척척 움직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것을 본 귀뚜라미가, ' 지네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다리로 걸을 수 있니? 너는 걸을 때 어느 쪽 다리부터 움직이는 거냐?' 라고 물었습니다.
지네는 대답했습니다. ' 글쎄. 그건 나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그 뒤로 지네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귀뚜라미가 한 말이 신경쓰여 자신이 어느 쪽 다리부터 딛고 떼어야 하는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꼼짝할 수밖에 없었던 지네는 결국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과연....
지네가 굶어죽지 않았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었을까요? ^^

Posted by 박현수4s
,
의지는 떠밀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말입니다.
 
 
열정은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본 모습과 맞아떨어지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유대감 같은 것이지요.
 
 
열정이 있어야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열정이 있어야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승려와 수수께끼 中[랜디 코미사]
 
 
 
 
 
  
금방 지치는 사람과
 
지치지 않는 사람을 가르는 것은
 
의지이냐 열정이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의지에 가득 차서
 
달라붙지만
 
 
결국에는 심지어 누군가가 등을 밀어도
 
일정 수준
 
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순수하게 내면에서 열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일이 너무 하고 싶어
 
자다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깊은 밤에도 불을 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벽을
 
뚫어낼 수 있는 열정이,
 
 
작은 희열들이 뭉치면서 만들어내는 
 
간절함과 순수한 에너지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순연하게
 
내면에서 올라오는
 
작은 희열이 이어져야
 
이 긴긴 싸움을 버틸 수 있습니다.
 
 
 
공부도 
 
어떤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그리고 아무런 재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타오르는 것,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이러한 열정으로 이어졌으면 하고
 
소원합니다.
Posted by 박현수4s
,
<"5분만 더 잘게" vs  "좀만 더 있다가 잘게">

6시 30분입니다. 오늘도 엄마가 깨웁니다. 
"5분만 더 잘게"
5분 뒤에 엄마가 또 깨우러 옵니다.
다시 요청합니다.
"5분만 더 잘게.."
하지만 엄마는 얄짤 없습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합니다.
할 수 없이 씻고 밥을 먹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옵니다.
너무나도 피곤하지만 발가락으로 컴퓨터 전원을 켭니다.
네이트온을 틀고 인터넷 기사를 보고 웃긴 자료들을 낄낄거리며 보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많이 가 있습니다.
엄마가 말합니다. 
"일찍 자렴"
하지만 "조금만 더 보다가 알아서 잘게" 하고 말하면서 새벽 1,2시까지 버팁니다.
버티다 버티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 침대로 다이빙해서 잡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수면부족에 시달립니다.





<왜 그런가?>


이건 여러분의 얘기가 아닙니다.
상황만 조금 다르지, 제 얘기입니다.
전 이런 상황이 신기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어느정도 졸리면 무조건 자러 가는 존재라면,
절대 밤 늦게까지 컴퓨터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의지력으로 자는 것을 깰 수 있다면
절대 아침에 그렇게 일어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아침에는 일어나야 하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며,
밤에는 자야 하는데도 자러 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뭐 이것은 태음인 소음인 소양인 등 체질적 차이에서 온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 이런 현상이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점은 이 점이 군대를 가면 모두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 가지 않았지만)
군대를 가면 자야 할 때 자고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무리 저녁형 인간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이런 현상이 선천적인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정답은 하나였습니다.

아침에는 제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밤에는 제 시간에 자야 하는데도 자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관성' 때문이었습니다.
현재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죠.

계속 자고 있었으니까 아침이 되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고
계속 깨어 있었으니까 밤에는 깨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군대는 이런 것을 타율에 의해서 자게 하고 일어나는 시간을 억지로 정해놓으니까 저절로 습관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대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아침 그 기상 나팔 소리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고 하네요.)


이런 관성의 현상은 비단 자고 일어나는 것만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흥미를 끌기 위해 넣은 아주 단적인 예시일 뿐입니다. 사례는 무궁무진합니다.
예를 들어 게임중독자들은 하루종일 게임을 합니다.
설령 자신이 파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컴퓨터를 끄기 쉽지 않습니다.
폭식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폭식하면 몸이 더 안좋아진다는 점을 알면서도
음식을 끊으려 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관성이 설령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불행하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현재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왜' 관성을 유지하느냐가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을 명확히 알아내더라도 별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Truth but Useless)
사실 문제를 이해하는 것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풀 때는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고 분석하면 해결책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어렸을 때 부모님께 학대당한 기억 때문에 지금 불행하다고 해서,
학대당한 기억을 후벼판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잖아요? ^^

중요한 것은  '문제점의 분석'이 아니라 '해결책'입니다.
'어떻게' 하면 관성을 깨고 올바른 상태로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의지력의 문제인가?>



이런 것을 보고 몇몇 사람들은 

"의지력의 문제야. 정신력이 글러먹었어. 정신 똑바로 차려. 나이값좀 하고. 군대를 다녀와야겠다."

하고서는 독설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그렇게 독설을 날리고 채찍질 하는 것으로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의지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꿈을 생각하세요. 꿈이 없어서 그래요."

글쎄요.......ㅋㅋ
전 꿈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며 노력을 안하는 사람을 너무나도 많이 봐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멋진 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현실에서는 노력을 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싫다며 자책을 합니다.
꿈의 유무로 결정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해결책일까요?




<사랑>


제가 알아낸 것은 하나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엥??? 쌩뚱맞게 무슨 사랑이냐구요?
너무 추상적이고 듣기 좋은 소리라구요?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자기연민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관성을 유지하는 것이죠.
의외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비판적입니다.

"난 왜이러지? 왜 이렇게 운동을 안하지?"  
"문제가 안풀리네. 난 어차피 안될 놈이야" 
"에라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우리는 이걸 겸손하기 위함, 자신에게 엄격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죠.. 
자책입니다. 자신에게 채찍질하고 꾸짖는 것이죠.
이런 자책이 생기는 이유는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대충 삶을 살아버릴까봐(=방종) 두려워서 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교육자들(부모님 포함)이 이런 방식으로 학생을 교육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채찍질' 자체가 오히려 우리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대충 살게 만듭니다.
폭식자들은 자신을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살이 찌도록 놔두는 것입니다.
만약 폭식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면 자신을 걱정하게 될 것이고, 자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로 잉여짓을 하다 늦게서야 잠에 이루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엄격한 자기절제로는 절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해결한다 하더라도 아주 단기적인 해결일 뿐입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이루어진 한 심리학 실험에서는 84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도넛을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그 때 자기연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적절한 양을 먹은 반면,
죄책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감정적인 식사에 휩쓸리는 것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해결책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밤늦게 컴퓨터를 하더라도
"미래의 나를 위해서 잠을 자야지" 하고 잠을 잘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공부가 하기 싫을 때도
"나 자신을 사랑하니까 나를 위한 공부를 해야지" 하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자책하는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습관을 바꿔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







1)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첫번째 방법은...
다음 동영상을 보십시오..^^





2)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두번째 방법은...한 강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저도 우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우울증은 저에 대한 비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과연 창의력이 있는 것일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신이 창의성 없는 증거,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증거만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더더욱 내면을 부정적으로 파고들어 해결책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심화되면 자살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습관'입니다. 자신을 비관적으로 보는 습관입니다.
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오랜 기간 고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우연히 법륜 스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우리 앞에 바다가 있다고 하자.
그 바다보고 아름답다고 하면 우리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 바다가 색깔이 왜 이러냐고 하며 불평하면 우리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불행해진다.
이 와중에 바다는 가만히 있는다. 결국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이것은 굉장히 심오한 심리학적 얘기입니다.
우리를 기분 나쁘고 불행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밖에 있는 세상'이 아니라 
그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남에게서 사랑을 구하면 사랑이 부족해진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사랑받기 전에 사랑하라.
베풂을 받기 전에 베풀어라.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해라.
이 모든 과정은 희생이 아니다.
희생은 나중에 뭔가 대가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면 우리가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것이 왜 희생이겠는가?
그것이 희생이라면 왜 모든 종교에서 사랑하라고 하겠는가?
사랑은 보상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도 아니고, 지금 자신이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사랑하지 못한다.
그것은 '천성' 때문에 아니라 '습관' 때문이다.
평생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이 습관을 고치면 된다.
이 습관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표현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습관을 고쳐나가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이 수행을 계속 한다면 
명상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 
기도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 
종교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어떤 조건이 없더라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능동적입니다.
아무리 사랑이 없고 불행했었더라도,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번에 바뀌지 않아도 됩니다.
평생 해나가는 '수련'입니다.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을 실패자로, 패배자로 낙인찍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박현수4s
,
한편으로 수능 직전에 그렇게 상태가 나빴는데 왜 성적이 잘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일까. 혹은 지난 1년간의 노력이 진실로 멋진 것이고 노력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기에? 학평의 모의평가에서 성적이 잘 나왔던 건 믿을만하지만, 그 뒤에 내가 치렀던 사설 모의고사는 형편없었고 거기서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도 하나도 믿을 게 못 되는 것일까? 

 솔직한 개인적 생각으로는 아마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신문에 나오는 학생처럼 국영수를 교과서 위주로 예습복습 철저히 공부한 탓이고 사실은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노력 없이 단지 운만으로 뭔가를 얻고 잃는다는 건 별 의미없는 일이지만, 가끔은 운이란 게 사람 인생에 있어서 꽤 큰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애매한 문제 한두 개 맞춘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반적인 수능 출제 양상은, 내가 자신있었던 언어와 외국어가 다소 어렵게 나오고 수학이 쉽게 나온 건 천운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또한 불행히도 그 운이란 게 실제로 있다면 약간의 아쉬움을 내게 남기기는 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거창한 해피엔딩은 못 된다. 나는 이 오르비 옵티머스라는, 7년 전에는 존재 여부도 몰랐던 사이트를 발견하고는 뭐 대단한 것이라도 찾아낸 양 생각했고 거기서 나오는 입시 관련 정보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으리라 철썩같이 믿었다. M모 사이트 같은 다른 곳의 유료 예상 서비스가 훨씬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음에도, 그리고 부모님 역시 그쪽을 믿는 게 훨씬 낫다고 내게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나는 싸우고 또 싸워서 과감히 상향지원을 했다. 

 재수는 있을 수 없으니 최대한 하향해서 가군 나군 넣고 혹시 모르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다군까지도 하향지원하자는 부모님의 말에 말 그대로 신경질을 냈던 것이다. 운 좀 붙어서 시험 하나 잘 치고 나니 뭐든지 문제없을 것 같았다. 성적 잘 나왔으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어디든 넣어도 문제없이 붙을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과욕이었고 내 자신의 희망에 내가 취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뭔가에 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최초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에야 나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2월 말까지 추가합격 통보가 오기를 기다리며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내가 가고 싶던 대학을 가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른 말 잘 들으면...으로 시작하는 속담이 아주 빈 말은 아닌가 보다. 안 들어서 손해본 게 입시 관련해서만 벌써 두 번째니까.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도 후회할 일은 얼마든 많다. 조금만 원서를 더 하향해서 넣었더라면, 수능의 그 수학문제에서 검산 한 번만 더 했더라면, 재수할 때 3월달부터 국사와 제2외국어를 했더라면, 군대 갔다와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졸업하려고 노력했더라면, 아니 대학 1학년 때 술먹고 놀러다니지 말고 공부를 했더라면, 점수 맞춰 아무 대학이나 등록하지 말고 바로 재수를 했더라면, 자연계가 아닌 인문계를 선택했더라면...이러다가는 젖먹던 시절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밤을 새우고 새워 방구석에 앉아 후회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랄 것이다. 아무리 아쉽고 후회되더라도,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 넘어가면 안 되는 무언가, 더 이상 후회하면 안 되는, 결국은 포기하고 깔끔히 잊어야만 순간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재수를 시작하면서 그 순간을 정했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튼 다행히도 다른 원서는 합격했고, 이전에 다니던 K대학보다는 평가가 좀 낮지만 그래도 인문계 자연계 차이를 고려하면 그닥 큰 차이없다고 할 만한 한 대학에는 장학금까지 받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디 붙었다고 말하자 친구가 "이번 수능 잘 쳤다며?"하고 반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속쓰리지만, 최소한 수능 성적 얼마와 맞바꾼 대가로 돈 걱정 덜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꽤 큰 의미가 있다. 원래 썼던 원서가 붙었더라도 어쩌면 진지하게 고려했을지 모를 옵션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 뿐이라고. 

 물론 단지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 위해 7년이란 시간을 낭비한 것은 분명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도록 내 발목을 잡고 손해를 끼칠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다. 남들이 앞으로 뛰어가는 동안 혼자 뒤로 갔으면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죽을둥 살둥 달려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리 행운 불운 핑계를 대봐야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가 내 공과 내 과로 인한 것이고,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일 뿐이다. 어쨌건 일이 결정난 지금은 후회하지 말아야 할 순간이 드디어 되고야 말았다. 




 2011년 3월의 서울. 27살 늦깎이 대학 1학년생에게도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봄이 왔다. 외모만 보고도 진작에 신입생 아닐 거라 지레 짐작하고 동아리 가입 권유 팜플렛 한 장 내게 주지 않는 2, 3학년 학생들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조잘대며 오가는 캠퍼스를 몇 번이고 걸어 보았다. 

 이 3월은 누군가에게는 닭장 같은 고등학교 교실이나 재수학원에서의 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개강파티가 즐거운 대학교 첫 경험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취업 스펙을 만들기 위해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로 밤을 지새는 날의 연속일 것이다. 혹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건, 인턴생활, 과외, 알바, 뭘 하건...이 글을 읽고 있는 이 땅 이 나라 위의 젊은이들 누구나에게 자신만의 사연으로,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짜증과, 희망과 좌절과 또 그 모든 것으로 점철된 수많은 길고긴 이야기가, 지나간 과거와 지나갈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현재 역시 매 순간순간마다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줍잖게 들리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뒤에 드리운 과거가 맘에 안 든다고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진 미래가 어두워 보인다고 미리 앞서 절망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치열하게 살자고 말이다. 최소한 타임머신은 아직 아무도 못 만들었지 않은가.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건투를 빈다. 
Posted by 박현수4s
,
아무리 익명의 인터넷 공간이라지만 이런 글을 쓰는 건 솔직히 좀 부끄러운 일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새학기가 시작하고 입시생들이 다 자기 갈 길 가고 오르비에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갔을 지금에 이르러서야, 3월의 새학기가 시작된 오늘에 이르러서야 밤늦게, 그리고 뒤늦게 이런 글을 써서 올리는 거기도 하다. 그러니 일단 군 제대해서 복학 후 2009년 2학기에 학고를 맞았다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이 먹고 재수 시작하는 점에 있어서 그리 자랑할 거리는 없다. 

 근데 솔직히, 이전에도 맞아봐서 그런지 꽤 무감각하더라. 아, 올 것이 왔구나.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런 생각 정도 들었다. 

 사실 대학서 왠만큼 출석 하고 교양만 들어줘도 학고 맞기 쉽잖다. 요즘 같은 학점 인플레 시대에, 아무리 아등바등 교수님 찾아다니고 도서관에서 밤 새우는 짓거리 안 해도, 간신히 턱걸이 출석하고 시험지 절반쯤 비우고 프로젝트 대충 제출하고 C+만 줄줄이 받아도 학고까지는 잘 안 나온다. 3학년 때 그런 거 받는 건 진짜 포기한 인간이 받는 거지. 공부 포기한 인간. 대학 포기한 인간. 취직 포기한 인간. 미래를 포기한 인간. 

 부산의 집으로 내려가는 동안 천천히 현실감각이 나를 따라잡았다. 이제 20대도 절반 넘게 지났는데, 군대도 갔다왔는데, 더 이상 젊지 않은데. 예전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학고 맞고 군대 갔다왔어도 또 학고다. 안 되니까 포기한 건지 아니면 포기했으니까 안 되는 건지를 고민해 보았다. 난 여전히 정신 못 차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왜 살아있는가를 궁금해했다. 난 뭘 하기 위해 살고 있지? 내가 살아 있어야 하는 필요가 뭐지? 선로에 들어오는 부산행 KTX 열차를 보면서 저기 뛰어들면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들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아파트 계단 올라서 4층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집을 지나쳐 옥상에 올라갔다. 난간 너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확실히 죽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뛰어내리지 못했다. 죽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총 한 자루라도 내 손에 있으면 정말 빠르고 간단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알약 하나라도 있으면 삼키면 끝일 텐데, 편하고 고통없이 죽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게으르게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 배치고사에서 덜컥 1등 해버렸던 것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반에서 10등 안쪽에서 놀았는데 어쩌다 그 성적이 나와서 입학식 날 손 들고 선서했는가 모르겠다. 어쨌건 성적은 뭔 이유에선지 몰라도 제법 올랐고 그 뒤로도 전교에서 10등 안쪽은 지켰었다. 2학년 과 고를 때가 되어 부모님은 조금만 더 하면 의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고 이과를 고르라고 했었다. 나는 의대는 왠지 싫었다. 피 튀기는 것도 싫었고 사람 자르고 짼다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고 소독약 냄새 매캐한 병원 찾아가면 무감각한 표정으로 사람 죽고 살리는 것에 대해 직업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역시 싫었다. 의대 붙은 친구 녀석의 요즘 모습이 어떤가 그때 알았더라면 그런 생각 따윈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과 자체는 괜찮은 것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과학잡지도 여러 권 봤었고 과학자니 기술직이니 하는 것도 왠지 매력있게 느껴졌다. 복잡한 기계장치나 멋진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것에서 남자로서 느끼는 매력 같은 것. 그래서 이과에 갔다. 그저 막연하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오래되어 잘은 기억 안 나지만 2년 내내 모의고사 성적은 무난하게 나왔던 것 같다. 학원도 가고 내신도 따지고 가끔 야자 째고 PC방 가서 스타도 하고 고3으로서 할 건 다 했다.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전교 1등도 가끔 해봤다. 의대는 어쩌면 갈 수 있을 수도 있었고 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서울대 공대 정도는 무난히 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의대 못 간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능날도 무난했었다. 2003년 겨울에 친 수능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몇 가지는 기억난다. 특히 점심시간에 친구들하고 모여서 밥 먹고 수능 난이도에 대해 수다떨던 내용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수학 쉽지 않았냐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맞장구쳤었다. 쉽다고 생각했다. 사실 쉬웠다. 뉴스에서도,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성적표가 나왔을 때 수리영역에 4등급이 찍혀 있었다. 요즘은 수험표 뒤에 번호 적어와서 가채점들 하는게 보편화되어 있던데 나 때는 생각을 못했었다. 그래서 성적 나오기를 기다리며 놀기 바빴기에 내게는 매우 비상식적인 성적이었고 마킹을 밀려썼나 하고 생각했다. 부랴부랴 확인해보니 죄다 계산실수였다. 1 더하기 1은 3. 위쪽에는 덧셈기호로 썼는데 옮겨적다가 나눗셈기호로 착각한 것. 자릿수 잘못 맞춰 계산한 것. 문제를 읽다가 조건 하나를 빠뜨린 것. 그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들밖에 없었다. 몰라서 틀렸고 내가 틀려야 마땅하다고 느낀 문제는 거의 없었다. 긴장해서 그랬을까? 중학교 때 보습학원 다니면서 여러 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들어서는 별로 그런 기억이 없다. 근데 왜 하필, 여기에서. 난 이과라서 수학에 가중치 들어가는데. 왜? 

 부모님은 재수를 원했다. 아버지는 특히 재수를 원했다. 수학만 벌충할 수 있으면 의대 원서 넣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백분위점수로 언어가 100% 나왔고 외국어는 만점이었지만 시험이 너무 쉬워서 97%가 나왔다. 애초에 나는 그 두 가지 과목만은 자신이 있었다. 수리를 제외하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었지만, 역시 이과니까 수리와 과탐에 최대 100%까지 가중치가 들어가는 건 큰 문제였다. 그럼 재수할까? 

 6차 교육과정 마지막 세대에 숙한 입장에서 앞으로 다가올 7차인지 뭐니 하는 이상한 것을 또 배워서 시험쳐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은 대학 가서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되면 뭐하지? 뭐가 좋을까. 다들 의사에 그렇게 목을 매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좋은 대학 가면 뭐하지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이름도 생소한 학과들을 훑어보면서 여기 가면 뭘 할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했다. 

 이전에도 농담처럼, 고등학교 친구들이 너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이 비정한 세상이 내 꿈을 앗아가버렸어 운운하며 쿨한 척 폼만 잡았었다. 내게 꿈이 있나? 없었다. 공부는 부모님이 시켰기에 그냥 했다. 성적은 높으면 좋고 낮으면 아쉬운 하나의 숫자에 불과했다. 기준점이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성적표 받아들고선 눈물이 났지만 그건 꿈을 이룰 수 없어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다. 그러니 재수를 하고싶을 리가 없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부모님과 여러 번 싸웠지만 결국 내 뜻을 관철시켰다. 부모님은 방구석에 무덤처럼 쌓여있는 문제집과 교과서를 거의 2월달까지 버리지 않고 놔둠으로서 미련을 잔뜩 갖고 있다는 것을 말없이 시위했지만, K대학교 전기전자공학과에 점수 맞춰 써넣은 결과로 합격 통지서가 날아오자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그 대학 못 들어가서 슬퍼하는 사람도 얼마든 많았다. 공대 나와서 어디 회사에 공돌이 취직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가 있을까. 입학식날 내 마음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표면상으로 주된 문제는 수학이었다. 그게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공대 수학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잡을 생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수능 시험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수학이란 그 자체가 그냥 싫었던 것 같다. 애초에 문제도 잘 풀리지 않았고, 그래서 책 펴놓고 딴 생각하고 수업 시간에 졸았다.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지만 1학년 때는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2학년 올라가면서 문제는 커졌다. 공대에서 수학은 모든 과목의 기본이었다. 공부의 첫 단계를 빼먹으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두 배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았을 때 결과는 뻔했다. 그나마 교양과목이 있어서 아주 나쁜 성적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주로 나는 게임에 빠져 있었고 공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수능이란 목표가 있을 때도 어디 갈지 막연했는데 그 목표가 사라진 후에 내가 내 자신을 통제할 리가 없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전공 위주로 성적표를 편성하게 되면서 나는 거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 포기하다시피 수업을 들으며 학고를 맞았고 그거 맞아도 세상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F학점은 성적표에 찍힌 알파벳에 불과했다. 목표가 없으니 아쉬울 것이 없었다. 부모님의 질책을 받고 잊어버렸다. 휴학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 군대를 갔다왔다. 군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았다. 갔다오니 학교가 바뀌어 있었다. 

 새로 지은 지하 열람실에 학생이 넘쳐흘렀다. 청년실업 이야기가 뉴스에서 밥먹듯 흘러나왔다. 후배 하나가 1학년 1학기에 C+학점 하나 있는 게 맘에 안 든다고 자퇴 후 재입학하면 수정이 되느냐고 묻는 걸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신입 대학생들은 과장 좀 보태서 거의 고3처럼 공부했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재수강 과목만 쌓였지만 2학년 수업을 재수강하는 교실에서 나는 고학번으로 출석부 앞쪽에 올라와 있었다. 일찌감치 복학한 과 동기들은 자기 수업 듣기도 바빴다. 군대 가기 전, 3년 전에 배웠던 것들은 거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노력했지만 부족했다. 나는 말 그대로 기초가 없었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생각되자 노력할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고 노력조차 하고싶지 않았다. 시험에서 백지를 제출한 과목이 제법 많았다. 어느새 밑바닥에 이르러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공부해도 되지 않는, 혹은 할 생각조차 없는, 진짜 바닥. 타성에 젖어 강의실과 하숙집과 도서관을 매일 오갔지만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졸업은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였다. 하지만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총장이 말도 안 되게 높은 등록금이 적절하다고 말했던 것이 한때 이슈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군대 있는 동안 퇴직을 했고 나는 부모님이 두 손에 꼭 쥐고 앞으로 30년은 살아야 할 돈에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연 이천 만원씩 깎아먹고 있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게임을 하면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성적이 나왔다. 부산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다.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와 한참을 주저하다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부모님께선 화를 내지 않으셨다.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 앞으로를 이야기하자고 했다. 두 분의 얼굴 표정을 보고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에 둘러앉아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 나눈 대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가지 없었다. 일단 다니던 대학은 포기해야 했다. 설령 간신히 졸업한다 쳐도 몇 년이 걸릴 것이며 그 다음엔 어떡할 것인가. 하릴없이 어디 시덥잖은 지방대학에 편입을 하던가, 아니면 당장 공장에라도 가던가, 혹은 26살 먹고 고시를 준비하던가 수능을 다시 한 번 더 치던가 정도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고르기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결국 재수하는 것밖에 선택이 없었다. 공대를 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의대는 가망도 없어 보였고, 남는 건 인문계로 재수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월 88만원 받고 살더라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했다. 




 집에서 공부하면서 재수학원을 알아보러 다녔다. 수능 공부한지가 6년이나 지났는데 학원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비싼 돈 내고 기숙학원 다닐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통학 위주로 찾았다. 집 근처에 나름 유명한 A학원과 B학원이 있었고 걸어서 닿는 곳에 C학원이 있었다. A학원은 간판은 걸려 있었지만 알고보니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 듯 했다. B학원은 아주 가깝기는 했지만 작은 규모에 허름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에 부산에 지점이 새로 생겨 대폭적으로 광고를 하던 C학원은 시설도 꽤 그럴듯해 보였고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니 운동겸 걸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D학원을 추천했다. 어렸을 적에 얼굴도 몇 번 본 적 있는 아는 친척분이 거기서 강사를 하고 계셨지만 가려면 지하철을 타야 했고 시간이 40분은 걸렸다. 

 그 외에도 재수학원은 많았다. 부산에 재수학원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학원들을 둘러볼수록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인다는 서울의 유명 학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고작 부산인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진짜 유명 서울 강사면 대치동 가기도 바쁠 텐데 부산까지 누가 내려올까 하는 상담선생님의 이야기가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결국 아는 분 있으니 문제집이라도 하나 공짜로 주겠지 하는 생각에 D학원을 골랐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차마 이 나이 먹고 재수한다는 이야기를 할 용기를 내지는 못해서 그 이야기를 하진 못했고, 국민학교, 중학교적 몇 번 만나본 게 전부인 내 얼굴을 그분이 기억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도 처음엔 시간표에서 이름 찾아보기 전까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참고로 그분은 얼마 뒤 강사 일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셨다. 

 학원이 시작되기 전에 집에서 한 달여를 공부했다. 일단 오전 6시에 정확히 기상하는 연습부터 했다. 작년 수능시험 문제부터 한 번 풀어봤는데 바뀐 게 너무 많아 매우 당혹스러웠다. 언수외가 죄다 100점 만점이고 시간도 바뀌었고 시험 치는 순서도 바뀌어 있었다. 인문계는 사탐을, 자연계는 과탐만을 치고 그것도 수많은 과목 중에 최대 4개까지 골라 친다는 것도 역시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성적은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시작부터 좌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7차 교육과정이 6차 때보다 배우는 내용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시집 가서 애 낳고 잘 사는 누나에게 예전에 물려받은 덕에 1996년 발행이라고 찍혀있는 정석을, 고3 때 보았고 아직도 용케 책꽂이에 남아있는 정석을 연습문제 위주로 재빨리 보았다. 언어는 유명 현대시하고 소설 같은 것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백여 편 정도 간단히 보고 익혔다. 수학 이외의 과목은 문제집을 사야 했는데 대체 뭘 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EBS라 쓰여있는 것만 샀다. 사탐은 뭘 공부해야하는지 역시 알 수 없어서 상담 선생님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울대 갈 생각은 없으니 국사 빼고, 외울 게 많은 윤리 빼고, 하면서 한국지리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를 추천해주었다. 별달리 아는 게 없으니 역시 그렇게 공부했다. 알고보니 그 선생님이 경제 선생님이는데 막상 경제 공부를 해보니 속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3 때 사탐 공부한 것도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다행히도 나는 제일 윗반에 편성되었다. 이름은 서울대반이지만 내가 그 반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개중 몇 명이나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를 의심했다. 그래도 수업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한때에는 부산 최고의 학원이었지만 학원 판도가 바뀌면서 D학원은 많이 황량해졌다. 학원 건물이 들어선 도로 건너편에는 임대 플랭카드를 건 커다란 빌딩이,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빌딩이 역시 같은 학원의 간판을 달고 텅 빈 채로 서 있었다. 그래도 수백 명이 다니는 학원이니 작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 한 마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아이들은, 재수생활 내내 공부 이외의 것은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던 애들은 서서히 자기들끼리 친해져갔다. 나는 학원에서는 왕따처럼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았다. 6살 어린 애들하고 친해지면 뭐 좋나. 반 최고령자하고 대화 나누고 싶어하는 애들도 별 없었다. 말 없이 사니까 귀머거리라고 생각했는지 늙은 놈이 주책이다 이상한 인간이다 하는 식의 말을 뒤에서 하는 걸 종종 흘려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1년쯤 아웃사이더로 산다고 죽진 않는다. 좀 외로울 뿐이다. 

 기행도 많이 저질렀다. 아는 사람이 없으면 남을 신경쓸 이유가 없다. 나는 주로 학원에서 잤다. 자기 바빠서 남들하고 친해질 시간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학교에선 자기 바빴다. 밤에 공부하는 버릇이 든 덕택이다. 자습을 10시에 마치고 집에 오면 10시 40분은 된다. 11시부터 공부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2시까지. 오히려 한밤중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리 조용해도 옆자리 연필 사각대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자습실보다 정말 고요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 아무도 살아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자정의 공부 분위기는 거의 황홀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러고 나면 다음날 학원에서 존다는 것이다. 아침 자습 시간에 잤고 쉬는 시간에 잤고 오후 자습 시간에도 잤다. 물론 수업시간에도 침 질질 흘리며 잤다. 조금 수업이 지루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집중력을 잃었고 그럼 잤다. 다행히도 너무 많이 자면 옆에 앉은 누군가가 고맙게 깨워주기는 했다. 입시는 4당 5락이니 하는 말이 한때 유행했고 나폴레옹은 하루에 세 시간 자고도 거뜬했다지만 나는 나폴레옹이 아니었고 잠 많이 안 자면 종일 영향을 받었다. 새벽 네 시 반에 잤던 날은 오전 수업 하나도 안 듣고 내내 잔 적도 있었다. 이렇게 공부해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차라리 학원을 가지 않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제대로 자고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독학을 택하기엔 너무 부담이 컸다.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인상 좋은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자기소개서의 나이 란을 눈으로 훑고는 내가 왜 솔직히 적었는지 의문인 부모님 나이와 무직이라 적힌 아버지의 직업란 역시 훑었다. 그 나이 먹고 재수하냐고, 늦게 낳은 자식보고 부모님이 돈 벌어오라고 안 하시더냐고 농담조로 물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수업시간에 자느냐고 물었다. 역시 웃었다. 괜찮은 공대 다니다가 이제 와서 재수하는 이유는 뭔지, 학교 자퇴는 했는지도 물었다. 농담이 아닌 건 알았지만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생소한 재수학원 생활에는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이름도 모르고 대화도 없다 하더라도 매일 보는 애들 얼굴은 눈에 익는다. 복도 구조나 교실 구조가 눈에 익고, 시간표와 점심 메뉴가 기억에 익고, 선생님들의 제각기 다른 목소리가 귀에 익고, 교재의 빳빳한 종이도 손에 익고 책상의 높낮이나 화장실 냄새조차도 익숙해진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공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집이 되어갔다. 

 학원 분위기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으냐는 건 주관적인 판단일 것이지만 내게는 충분했다. 최고의 강사진 밑에서 최고의 학원 다닌다고 최고의 성적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선생님들의 경우도, 인터넷으로 뜬 스타들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비교할 수는 없었다. 7년 전에는 메가스터디를 필두로 해서 인강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보지 않았었고, 인강이 보편화된 지금에도 볼 생각은 없었다. 어느 선생이 좋은지 어떤 업체가 좋은지 알 수도 없었고 인터넷 강의에 돈 내는 건 어쩐지 아깝게 느껴졌다. 조그만 액정이 달린 MP3를 쓰던 터라 원하면 깨알만한 글씨로 칠판에 판서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배터리 수명도 짧고 화면도 작아서 인강을 본격적으로 보기는 역부족이었다. PMP를 사려도 돈이 없었다. 주로 주말에 집에서 컴퓨터로 공짜 EBS 강의를 몇 개 정도 보았다. 

 수업 시간에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는 꼬박꼬박 자고, 자다가 누가 고맙게도 깨워주면 일어나서 공부하고, 공부가 막히면 MP3으론 음악을 듣고 점심시간이나 통학시 남는 시간에 영어공부 겸 해서 토렌트로 받은 미쓰버스터즈(이전부터 한 번 끝까지 보고 싶었던)를 보았다. 자막이 없었지만 대사를 매우 또박또박 말해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듣기 쉬웠다. 그렇게 8개 시즌 보는 동안 작은 화면 보느라고 눈 많이 나빠졌을 것이다. 

 영어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적에도 그랬고 대학 다닐 적에도 그랬다. 취미생활에 있어 영어는 꽤 유용한 도구다. EPL의 최신 소식이 궁금하면 영문 공식 홈페이지 가면 되고 국내 개봉 안 한 신작 영화에 대해 알고 싶으면 IMDB 접속해서 글 읽으면 된다. 상식이 고프면 위키피디아 영문판도 있고 외국 유머 사이트도 재밌는 곳이 많다. 하다못해 게임하면서 대사 읽을 때도 도움이 된다. 사실 내 첫 영어공부의 절실한 첫 동기는 게임, 그것도 C&C였다. 미션 시작하기 전 브리핑에서 뭐라고 하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충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동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학교 수업 외적으로 영어공부를 많이 했었다. 6차 때는 만점자가 상위 4% 나올 정도로 영어가 워낙 쉽게 출제되기는 했지만...그래도 고3 때는 모의고사 치면 시간이 남아서 20~30분 정도 항상 잤었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를 쳤다. 시험 끝나는 시간이 생소해서 몇 번이고 확인해가며 시험을 치렀다. 사탐 치다가 과목 바꾸라는 벨 소리를 듣고는 순간적으로 저게 뭐지 하고 생각했다가 눈치를 챘다. 채점하려고 하는데 문항 옆에 점수가 표시 안된 건 몇 점짜리인지도 알 수 없어서 옆에 앉은 애에게 물어봐야 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래도 성적은 맘에 들었다. 사실 두어 달 공부한 것 치고는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적이 나왔다. 언어는 꽤 빠르게 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학원 언어영역 최고점이 95점이라고 했는데 내 채점 결과로는 내가 96점이었다. 선생님께 당당히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채점하다가 문항 점수를 착각한 것이었다. 외국어는 쉬웠다. 쉬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 들어가서는 카투사 들어가려고 토익 공부를 했었는데 만점은 못 받아보고 만점 바로 아래 점수는 받아본 적이 있었다. 물론 카투사 선발 확률과 토익 점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증명해보였다. 그 뒤로 영어 공부 별로 안 해서 많이 녹슬었지만 부잣집 망해도 삼대는 간다. 문제 다 풀고 20분쯤 남아서 그냥 잤다. 학기 초에는 사회탐구도 범위가 좁아서 역시 할만했다. 

 문제는 수리였다. 70점이란 점수가 나왔는데 몰라서 틀린 문제도 많았지만, 채점 결과 2, 3점짜리의 대여섯 문제를 단순 계산실수로 틀렸던 것이었다. 2004년 수능 때 그랬던 것처럼, 아주 단순한 실수들을 수도 없이 저지른 끝에 나온 결과였다. 이걸 여태껏 못 고치나 싶어 걱정이 되었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수능 전까지 완벽히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어와 외국어가 괜찮으니 성적 상승을 생각하면 서울대 정도는 문제없이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목표를 잡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말하자면 물론 틀린 생각이었다. 

 한참을 공부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내가 국어와 영어 시험에 자신이 있는 것은 글을 빨리 읽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몰라도 글을 언제나 빨리 읽는 버릇이 있었다. 물론 나는 천재가 아니었으므로 글을 빨리 읽기 위해서는 대충 읽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대충대충, 설렁설렁 읽는다. 소설을 읽으면 줄거리만 대충 알 정도로 읽고 신문기사도 요점만 대충 본다. 관심이 생기면 그제서야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본다. 하지만 대충 읽어도 문제는 풀 수 있다. 문제 풀면서 해당 부분만 다시 찾아 정독하면 되니까. 부호 하나하나 숫자 하나하나 빈틈없이 신경쓰지 않으면 틀리는 수학과는 다르게도 말이다. 

 그래서 언어영역을 치면 항상 끝까지 한 번 풀고, 앞으로 돌아가서 모든 문제를 한 번씩 더 풀었다. 시험이 특별히 어렵지 않다면 두 번씩 풀고도 보통 20분 정도 남아서 좀 헷갈리는 문제 서너 개를 고민해볼 시간이 된다. 그리고 마킹하면 끝이었다. 외국어 영역의 경우는 주로 듣기 들으면서 사이사이에 빠르게 10문제 정도를 풀어두었다. 이어서 두 번 훑고 마킹하면 역시 20분 정도 남아서 잘 수 있었다. 2004년 수능 때도 이렇게 시간이 남았었다. 재수 첫 모의고사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모의고사 몇 번 더 치르자 예전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영어 시험을 치다가 항상 자니까 이상하게 보는 애들이 많았다. 왠지 으쓱해졌지만, 수능 영어 정도 잘한다고 자랑할 거리는 못 되었다. 고등학생 때라면 모를까 내 나이가 몇인데. 토익 텝스 공부해서 취직 걱정할 나이 아닌가. 

 아무튼 수학도 그렇게 대충 읽고 대충 푼다는 게 문제였고 그게 언제나 실수로 이어졌다. 다른 과목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수학만 정독하려고 고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년 내내 날 괴롭힌 문제였다. 실수를 하는 것도 특정한 패턴이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 데서나 하는지라 잡기가 어려웠다. 집중해서 천천히 하려고 해도 막상 모르는 문제가 나와서 시간이 부족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모르는 문제가 결코 적지 않았기에 그럼 결과는 빤했다. 대여섯 문제씩 실수한 문제를 좍좍 그으면서는 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하면서도 이거 영영 못 고치는 거 아니냐, 이전 수능 때와 똑같이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그래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3월 말에는 EBS 연계율이 70%까지 높아진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학원 선생님들이 비현실적인 정책이라며 코웃음쳤지만 입시제도가 사실 현실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수험생 입장에서 안 풀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여전히 뭔 문제집이 좋은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차라리 이쪽이 속 편했다. 학원에서 교재로 주는 것들을 싹 다 풀었고, EBS에서 수능 대비용으로 나오는 것들을 전부 다 샀다. 그 이외의 문제집은 전혀 사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정리한 것들을 반복해서 읽었고 문제집을 한 번 풀고는 틀린 것만 표시했다. 맞은 문제에 동그라미 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고 모의고사 채점할 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뭘 모르느냐지 뭘 아느냐가 아니었다. 한 권 다 푼 다음에 틀린 문제만 한 번 더 풀면서 정리했고 다른 문제집 다 풀고 난 뒤에 돌아와 다시 복습했다. 사탐의 경우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EBS 문제를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오답노트를 예쁘게 만드는 학생이 많던데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적은 좀체 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수학에 투자했다. 지상과제는 수학 1등급을 안정적으로 받는 것이었다. 언어는 수업 열심히 듣고 문제집 풀면서 감각만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반면 영어는 문법은 대부분 잊어버린 터라 신경을 좀 썼지만, 나머지 분야는 체면치레 수준으로만 공부했고 수업시간에는 주로 잤다. 담임선생님이 영어선생님이었고 수업을 잘했는데 좀 미안했다. 사탐에도 시간을 많이 투자했다. 처음에는 정치를 얼마간 공부했지만 사탐 네 과목 공부할 이유가 없어서 정치를 그만두었다. 나중에 만에 하나 성적이 오르면 국사를 그 칸에 대신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학원에 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만 반복하다 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잠이 부족해서 언제나 피곤했고, 슬슬 지겹고 힘들고 짜증이 났다. 밖은 지독하게 더웠지만 학원 안은 시원했다. 너무 시원해서 탈이었다. 교실이 넓어서 에어컨 주변은 춥고 벽쪽은 더웠다. 며칠을 에어컨 바로 밑에서 찬바람 맞다가 코감기에 걸렸다. 체력이 저하되어서 그런지 도무지 낫지를 않았다.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흘러내려 너무나 괴로웠다. 모의고사를 치면서 한 문제 풀고 코 풀고 한 문제 풀고 코 풀기를 반복했다. 휴지의 산이 책상 위에 쌓였고 코가 빨갛게 헐어 아파왔다. 식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살은 미친 듯이 찌고 있었고 장염인지 뭔지 화장실에 하루에 세 번씩 갔다. 건강 완전히 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결국 감기가 낫기는 했지만 그 뒤로도 건강은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가끔 친구들을 보면 우울해졌다. 나는 1년을 휴학했기 때문에, 군 제대 후 칼복학한 경우의 친구들은 이미 4학년 마치고 졸업해서 LG니 삼성이니 하는 대기업 취직해서 떵떵거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고시니 취직자리 알아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어찌되었건 다들 나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내가 설령 이 재수를 성공한다 치더라도 대학 졸업하면 나의 20대는 끝난다. 비싼 돈 들이고 노력 들이고 시간 들여서 그런저런 대학 졸업장 하나 얻는 것 이외의 의미가 있을까? 준비 없이 30대에 들어서게 될 내게 미래가 있을까?

 그럼 지금 죽지 그래. 하루 두 번 지하철이 플랫폼에 들어설 때마다 철로를 내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 앞을 향해 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간단히 끝난다. 그 뒤에는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모님 슬퍼하고 친구 장례식 와 봐야 너 죽은 뒤의 일이다. 죽은 뒤에 천국이 있냐 지옥이 있냐. 하느님이 있냐 부처님이 있냐 뭐가 있어. 그냥 끝이지. 물론 나는 죽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미국서는 강도에게 머리에 권총 여섯 발 맞고 병원까지 기어가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팔다리 없이 태어난 사람도 책까지 내고 즐겁게 잘만 살더라다. 대학 잘리다시피 스물 여섯 살에 재수한다고 하면 더더욱 죽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신문을 펼쳤는데 광고에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늦었을 때 맞다'고 적혀 있었다. 유명한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가장 빠른 거'라는 말은 사실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너는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데 죽을 수는 없잖아. 늦었다는 걸 직시하고 그에 맞춰 대책을 세우고 살아야지. 문제는 성적보다는 결국 어딜 가서 무얼 하겠느냐는 것이다. 문과가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어쨌건 이건 내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였다. 성적이 아무리 엉망으로 나오더라도 1년 더 재수할 수는 없으니 지방대라도 가야 했다. 그럼 어디 가서 뭘 해야지 먹고 살 수 있는 걸까. 사실 성적보다 골치아픈 문제는 이것이었다. 서른 한 살 먹고 대기업 취직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교대 가서 요즘 경쟁이 치열하다는 임용고시라도 노려볼까. 통번역과라도 들어가서 번역가로 박봉에 시달리며라도 살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성적부터 안정시키고 보자고 생각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GvQkl7qa6RQ 

 Bill Conti - Going The Distance (Rocky) 
 이 음악의 의미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재수 내내 음악을 많이 들었다. 음악 들으면서 공부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공부가 막히고 기분이 우울할 때면 별 수 없이 듣게 되었다. 공부에 지장이 덜 되도록 타협안으로서 가사 없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근사한 영화 OST 같은 거 들으면 기분이 확 풀렸다. 하지만 집중력에는 확실히 손해였고,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기억에 새겨지면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그 노래가 계속 맴돌아 방해했다. 별 도리 없이 끊는 수밖에 없었다. MP3에 들어있는 모든 음악 파일을 지우고 정 음악이 듣고싶으면 가끔 라디오로 KBS 클래식 FM을 들었다. 고3 때도 많이 들었던 채널이었다. 정말 좋은 음악이 많았지만 대부분 가사가 없고 생소한 물건이었으며 같은 곡이 계속 나오는 경우가 없었기에 머릿속을 맴돌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능 원서접수 전날 동네 할인마트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부루퉁한 표정의 남자 직원이 왜 왔냐는 식으로 묻길래 선뜻 말이 안 나와, 아...그, 여권 사진 같은...하고 운을 떼니까 수능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 하고 말을 가로채고는 몇 장 찍어주었다. 언뜻 불쾌했지만, 지금 나이 먹고 수능 치는게 쪽팔리면 앞으로는 어떡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서 접수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7년만에 찾아간 모교는 겉보기는 똑같았지만 어느새 운동장 구석에 지하주차장이 딸린 체육관이 들어서고 바닥에 마루장판을 깔고 교실 학생 밀도도 많이 성글어지고, 많이 달라져 있었다. 4층 진학지도실에서 재수생 원서 접수한다는 글이 쓰인 A4 용지 아래에는 실내화를 신고 올라오세요 하는 문구가 붙어있기에 솔직히 망설였다. 둘러봐도 실내화가 보이지 않았고 덧신조차 없었다. 내 앞에는 역시 재수생이 틀림없는 자그마한 꽁지머리의 여자 하나가 역시 원서 접수하려는 듯 건물에 막 들어서고 있었는데, 조금 주저하다가 신발을 벗더니 양말만 신고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게 아닌가. 당연히 나도 따라했고 곧바로 후회했다. 바닥은 매우 매우 더러웠다. 나처럼 마루장판 깔기 전에 학교를 다녔던 학생인 게 틀림없었다. 

 원서 접수하면서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신분증을 슬쩍 훔쳐봤는데 주민번호 앞자리가 84로 시작하는데다가 그 신분증이라는 게 부산교대 학생증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그것도 여자니까 군대도 안 갔다왔으니 지금쯤은 대학 졸업한지 오래일 거 아냐. 교대 나왔지만 임용고시 줄줄이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어디 한의대라도 가고 싶어하나? 왜 수능을 다시 치려고 하지? 왠지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안도 되었다. 지금도 수능을 어떻게 쳤을까 궁금하지만, 나는 사실 그 여자 이름이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1년 선배였으니까 내가 아는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볼 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D 데이가 300대에서 200대로, 또 100대로 줄어들었다. 군대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하루는 느리게 가더라도 한 달은 빠르게 간다. 하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재고, 한 달은 내가 이미 떠나보낸 과거니까. 찬바람이 불어도 모기가 기승을 피웠지만 가을이 오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수시접수한다고 바쁜 애들이 많았지만 내가 접수할 이유는 없었다. 

 9월 모평 이후로 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수업만 대충대충 듣는 수준이었고 별도 공부는 거의 안 했었다. 모의고사 문제는 풀었지만 거의 아는 것만 찍는 수준이었다. 공부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9월 모평에서 드디어 수학이 1등급이 나왔고, 2주 뒤의 다른 모의고사에도 1등급이었다. 수학이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착각해서 사탐 위주로 공부해야겠다 싶어졌다. 조금만 성적 올리면 서울대학교도 도전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값도 물론 중요했지만 현실적으로 국립대니까 등록금이 쌌다. 등록금이 걱정이라면 장학금 받으면 된다는 말은 하질 말기 바란다. 아무튼 문제는 내게 국사는 기초조차 없다는 거였고 국사 수업은 기초 넉넉한 재수생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내겐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업을 포기하고 자습을 시작했다. 

 국사 공부는 매우 단순하게 했다. EBS에서 50강쯤 되는 인강을 MP3에 다운로드받았다. 웬 뚱뚱한 남자 선생님이 나오는 거였는데 알고보니 2010년이 아니라 2009년 거였다. 큰 상관은 없었다. 통학하는 데만 40분 정도 걸렸는데 주로 오가면서 말하는 것만 들었다. 어차피 단순암기과목이고, MP3의 조그만한 화면 봐야 별 소용도 없었다. 가끔 칠판에 지도라도 그리는 성 싶으면 잠깐씩 화면을 켜서 봤다. 한 화씩 보고 교과서를 펴서 해당 분량을 그냥 외웠다. 교과서 나오는 모든 문장을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 무작정 외웠다. 길거리 다니면서 중얼중얼하자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교과서에 없는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 이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외우고 나면 마지막으로 문제집을 풀었다. 효과는 있기는 있었다. 다만 너무 늦게 시작했고 진도 역시 너무 느렸다. 

 슬슬 수능일이 다가오면서 학원을 그만두는 애들이나 다른 학원 다니다 때려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많아졌다. 재수학원에서 여자 여자 사귀고는 노닥거리는 애들도 많았다. 사실 나는 애들 이름조차 거의 모르는 편이었지만 매일 보는 얼굴이 익지 않을 리는 없었다. 처음엔 재미있던 선생님 농담도 슬슬 질려가고 맘에 안 드는 수업이라고, 독학하겠다고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는 애들이 줄줄이 늘어났다. 사탐의 경우 한 시간에 세 명밖에 안 듣는 처참한 경우마저 보였다. 선생님이 불쌍해 보였고 어차피 독학 따위 자신없었기에 나는 국사를 제하고는 수업을 꾸준히 들었다. 물론 종종 자기는 했다. 




 D-100일 이후로는 거의 정형화된 틀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명확히 시간표와 달성분량 같은 걸 짜서 공부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얼마만큼 공부해야겠다 하는 양과 규칙은 확연히 잡혀 있었다. 다만 이제는 일찍 자려고 애썼다. 수능 전날도 새벽 2시에 잘 건 아니니까. 하지만 버릇이 잡혀 있어서 막상 일찍 자기가 쉽지 않았고 낮에 조는 버릇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불안했다. 

 더 불안한 건 성적이었다.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그나마도 자꾸 미끄러졌다. 3월달에 첫 모의고사 성적을 자신만만하게 받아들고 생각했을 때는 지금 내가 이런 성적 받는 상황에 처해 있을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성적은 오히려 내려가기만 했다. 수리 성적은 계속 널뛰기만을 반복했다. 쉬울 때는 1등급이 나왔지만 조금만 어려워지면 3등급까지도 떨어졌다. 공부를 더 한다고 꼭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물론 수학적 기초가 많이 약하긴 해도 어려워서 못 푸는 건 아니었다. 문제가 어려우면 풀긴 풀더라도 검산할 시간이 없어서 계산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어 틀리는 것이다. 두 번씩 검산할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고칠 수 있었고 9월 모평 때처럼 1등급이 나왔다. 하지만 수능이 그렇게 쉽게 출제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또 두 번 검산한다 치더라도 한 번 실수했는데 두 번 연달아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어느 문제를 실수했는지 알 수 없으니 모든 문제를 다 검산할 시간이 없는 한은 검산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객관식의 경우는 내가 실수하면 보기에 답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다고 보고 주관식 위주로 검산을 실시했지만, 제일 앞페이지의 객관식 문제를 실수로 틀리는 경우도 많았다. 한 선생님은 그 문제를 자살 방지용 문제라고 부르기까지 했었는데도 그랬다. 충분히 풀 줄 알면서 틀린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고, 2004년 수능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들었다. 

 국사에도 시간을 꾸준히 투자하고 있었지만 외울 분량이 너무 많아 성적이 오르는 속도는 너무 느렸고, 타 과목들의 성적도 그닥 동향이 없었기에 서울대 갈 가망도 없는데 왜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자기만족이었을 것이다. 올라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희망 하나는 걸고 싶은 개인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 

 그래도 차마 제2외국어까지는 공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했었고 재수 시작하면서 수능 기출문제를 풀어봤긴 했다. 문제가 너무 쉬워서 고등학교 적의 희미한 기억만으로도 몇 개를 풀 수 있었다. 걱정 덜었다고 좋아했지만 알고보니 내가 봤던 건 2003년의 기출문제였고 요즘의 독일어 수능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아랍어를 하려고 EBS 프린트물만 잔뜩 뽑아두었지만 미루고 미루다 인강 하나 제대로 안 보고 포기해버렸다. 입맛이 썼다. 




 수능을 한 달여 앞두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쳤는데 결과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떨어지지 않는 건 영어 성적 밖에 없었다. 언어가 2등급 나오고 수학이 3등급 나왔을 적에는 한 번은 웃고 넘길 수 있었는데 그 다음번 모의고사엔 성적이 더 떨어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성적이 조금이라도 오르기는커녕 사탐을 포함한 전 과목에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까지 쳤던 모든 모의고사 문제지를 모아두었다가 계속 복습에 활용했다. 외국어 영역은 문법 관련 문제만 스크랩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언젠가 한 번은 모의고사에 좀 까다로운 수학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틀렸다. 푸는 법은 정말 쉽지만 단순 계산이 짜증나게 복잡한, 그야말로 지저분한 문제였고 그래서 틀렸다. 복습한다고 이때에 다시 풀어 보았지만 또 틀렸다. 세 번 네 번을 풀었지만 여전히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풀 때마다 죄다 다른 곳들에서 참으로 개성있게 계산이 틀린 부분이 나왔다. 검산해도 어디서 실수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지와 일일이 대조해야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가 있었다. 여섯 번째 풀다 여전히 답이 안 나오자 포기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럴까. 수학 공부가 정말 하기 싫어졌다. 수학이란 존재를 저주하고 싶었다. 왜 내 발목을 이렇게도 몇 년씩 잡는 걸까. 물론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사실 수학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 문제였지. 그게 더 골치 아팠다. 

 딴에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수능 전날 긴장으로 밤잠을 못 잘까봐 일부러 두 시간만 자고 시험을 쳐보기도 했다.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 적어와야 할 테니까 시험 치고 시간을 남겨서 그거 옮겨적는 연습도 몇 번 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에는 문제가 풀렸다. 지금은 풀리지 않는다. 이게 분명히 답일 거라 생각했는데 매겨보니 아니었다. 대체 왜지? 슬럼프가 온 것이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일까? 애꿎은 머리카락만 잡아뜯었다. 가망 없는 국사 공부 따위 때려친 지 오래였다. 

 뚜렷한 해결책 없는 채로 아까운 시간만 줄어들어갔다. 300대였던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두 자리, 그리고 한 자리가 되었다. 재수학원이 종강했고 사물함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교재들을 마대자루에 넣어 버리고 집처럼 익숙했던 교실을 떠났다. 작별인사할 애들조차 없었다. 아웃사이더짓 너무 심각하게 했었나 생각했지만 사실 눈앞에 닥친 문제에 그런 거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EBS 최종 모의고사 언어/수리 3회짜리를 수능 바로 직전에 차례로 풀려고 아껴두었다. 수능 삼일 전에 그거 언어영역을 펼쳤는데 지문이 안 읽혔다. 또 틀리면 어쩌지, 또 그러면 어쩌지. 몇 문제 풀다가 그만두고 수리를 펼쳤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문제 풀고 바로 그 문제 답을 확인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서너 문제를 줄줄이 틀리고 나자 더 이상 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 사소한 계산실수였다. 그 뒤로도 계속 그랬다. 




 수능 바로 전날은 아무 것도 하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상황에 다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실패할 수는 없었다. 이 나이에 또 일 년을 더 투자해 재수할 수는 없었다. 성적이 나오면 어디든 가야 했다. 거기에 만족해야 했다. 거기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시험 못 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조차도 차마 들지 않았다. 최종 정리할 때는 수능 전날에 이거 요약해놓은 거 총복습하고 저 책 보고 해야지 하고 한 달 전에만 해도 계획했는데 수능 전날이 막상 닥치니 정말 아무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가방에 수정테이프를 두 개 넣고 사인펜을 세 자루 넣고 잘 깎은 연필도 두 자루씩 넣고 샤프심도 세 통을 넣고 지우개도 새 걸 하나 더 샀다. 혹시 모르니 많이 가져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고 서랍 안에 집어넣고 MP3도 역시 서랍 안에 넣고 아예 잠가버렸다. 성적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런 건 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일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하는둥 마는둥 하다 밤 9시에 이불을 폈다. 잠자리에 누워서 내일은 수능치는 날이 아니야 하고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며 관련된 모든 생각에서 도피하려고 시도했다. 어차피 못 칠 바에야 긴장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잠은 금새 들었지만 여러 차례 깨었다. 악몽을 꿔서였는지 뭐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차례 깨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새벽 다섯 시였던가, 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와서는 조용히 기도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수능 한파가 오지 않아 특이하게도 전혀 춥지 않았던 시험일 아침. 나는 여전히 오늘이 수능일이란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거의 아홉 시간을 잤지만 매우 피곤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이뇨제라고들 하니 참았다. 수험장은 걸어서 20분 걸리는 꽤 가까운 곳이었지만 부모님께서 태워다주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승용차들과 도시락을 든 수많은 수험생들과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와 경찰들, 호들갑피우며 선배들 응원하는 고1 고2 학생들까지, 이 광경을 내가 다시 보게 되다니. 

 달라진 건 지난 7년간 부모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하고 흰머리 뿐이었다. 못난 아들을 먹이겠다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하고 점심 도시락을 싸던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방 안에 몰래 들어와 자는 척 했던 내 얼굴 옆에서 기도를 올리던 아버지의 얼굴 역시. 이미 환갑도 지나신 분들이다. 나는 무어가 잘나서 번듯한 월급봉투 하나 받아오지 못하고 이렇게 부모님을 고생시키고 있는가. 목에 뭔가가 걸려 흔해빠진 잘 치고 올게요 같은 말도 못하고 묵묵히 차에서 내렸다. 

 부모님 작별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데 한 학생이 손 들고 뭔가를 하다가 내 얼굴을 때려서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 순간 든 생각에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학생 뒤통수에 대고 뭐라 화를 낼 생각도 못했다. 깨진 거 아냐? 안경은 멀쩡했지만, 만약 깨지기라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비 안경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언제나 모든 상황에선 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운이 좋건 안 좋건 상관없다. 나는 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불안해졌다. 

 복도로 들어서니 선생님이 비닐로 된 덧신을 나눠주며 신으라고 했다. 잘 맞지 않는 덧신을 신발에 찢어져라고 우겨넣다가 문득 옆을 보니 다른 몇몇은 자신있게 쇼핑백에서 슬리퍼를 꺼내 신고는 계단을 올라가는 게 아닌가. 덧신을 씌운다 해도 운동화를 종일 신고 있으면 발에 땀 차니까 불편한데. 재수학원에서 쓰던 슬리퍼 가져왔으면 되는데. 대비가 되어 있기는 뭐가 되어 있어. 

 그것보다 좀 더 큰 문제는 시계였다. 알람 기능 같은 거 있는 디지털 손목시계는 안 된다기에 항상 쓰던 것 대신에 집에 굴러다니던 싸구려 증정품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가져왔었다. 고등학교 중학교 때 나는 항상 시계를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학교 종 치는 순간에 맞추는 버릇이 있었다. 방송 시보에 맞춘다고 해도 학교 시계가 그것과 몇 초쯤 차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만약 시험 치는 중에 시간이 부족하게 된다면, 지금 대략 3분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2분 37초 남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건 꽤 큰 차이가 있다. 재수할 때에는 모의고사 칠 때마다 그렇게 했다. 수능날도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근데 이 망할 놈의 싸구려 시계가 시간을 맞추려고 용두를 돌리니까 툭 빠져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사인펜 세 자루 챙기지 말고 시계를 두 개 가져와야 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1교시 시작할 때까지 거의 시계와 씨름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더 열받는 건, 정작 시험이 시작되자 상당수의 수험생이 차고있는 디지털 시계에 대해서 감독관이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디어 감독관이 들어오고 시험 준비가 시작되었다. 여러 모로 찜찜했지만 최대한 노력한 건 지금 이 시험이 수능이 아니라고 내 자신을 착각시키려고 애쓴 것, 그리고 긴장을 풀고 문제에 집중하기로 한 것 두 가지였다. 시험 망해도 부산대학 정도는 갈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집에서 가깝고 하숙비 안 들고 국립대라 등록금도 싸고 얼마나 좋은가. 거짓 생각이라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던 것 같았다. 참고로 부산대학에 불만은 없다. 누나가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언어는 처음엔 집중이 안 되어 당황했지만, 곧 익숙해져 풀다보니 꽤 무난하게 느껴졌다. 한 가지 반가운 건 공과대학 2학년 때 들었던 데이터구조/알고리듬 수업에서 어레이하고 링크드 리스트가 난데없이 지문으로 나왔던 것 정도였다. 시간 아낄 수 있다고 즐겁게 생각했지만, 배운 지 오래되서 결국 지문 읽고 풀어야 했으니 별 소용은 없었다. 어쨌건 무난하게 두 바퀴를 돌았고, 끝날 무렵에는 헷갈리는 선택지가 몇 개 남았다. 바로 며칠 전의 실패가 머릿속에 남아 과연 점수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되었다. 내가 정답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란 보장은 없었다. 시계를 정확히 맞추지 못했으므로 불안해서 여유시간을 좀 많이 잡고 마킹을 시작했다. 덕분에 OMR 마킹을 보고 가채점용 답안을 수험표에 옮겨적은 뒤 확인까지 하고도 시간이 좀 남았다. 

 수리 나형은 쉽게 느껴질 정도여서 꽤 빨리 풀었고 남은 시간에 주관식 문항은 모두 검산을 실시했다. 물론 이야기했듯이 쉽다고 해서 잘 친다는 보장은 내겐 없었다. 검산을 했는데 틀린 문제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맘에 무척 걸렸다. 9월 모의평가 때는 검산해서 5문제의 답을 고쳐서 맞췄고 1등급을 받았었다. 답안지 걷어갈 때 앞자리 앉은 학생(얼핏 듣기로 강남대성 출신인 것 같았다)의 주관식을 슬쩍 보다가 내 것과 답이 몇 개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또 사소한 덧셈 같은 거 줄줄이 틀리고 쟤가 맞았겠지, 아무렴 내가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있어 하는 생각에 또 우울해졌다. 

 점심 시간에는 과자류라면 질색을 하시는 어머니가 웬일로 초콜렛을 도시락에 넣어주셔서 먹었는데, 둘러보니 수험생들이 죄다 단 거 하나씩 들고 먹고 있었다. 아마 어디 방송에서 전문가니 하는 사람이 나와서 초콜렛이 수험생에 좋다 같은 이야기를 최근에 했었던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점심은 조금만 먹었고, 목이 말랐지만 물은 최소한도로 마셨고 화장실에는 쉬는 시간마다 두 번씩 갔다. 사탐 시간에 화장실 가고싶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재수학원에서 모의고사 치다가 사탐 시간에 두 번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던 적이 있었다. 

 외국어는 만만하게 생각했었지만 의외로 빈칸추론에 까다로운 문제가 하나 있어서 살짝 당황할 뻔 했었다. 해석은 되는데 답이 헷갈리는 것이다. 세 번째 풀 때 답을 고쳤지만 조금 불안했다. 사탐은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에 꽤 편한 마음으로 쳤다. 국사는 아는 것만 빠르게 풀었고, 한국지리와 경제는 헷갈리는 문제가 몇 개 있어서 시간이 빠듯했다. 시계가 시보에 몇 분 몇 초 늦는지 시험지에 적어놓고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썼다. 사회문화는 예상대로 쉬워서 사탐 다 푼 다음에 지리와 경제의 마킹을 수험표 뒷면에 옮겨적고도 시간이 남았다. 

 아랍어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치지 말고 일찍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그리고 나 같은 생각을 한 수험생들이 십여 명이나 교실서 빠져나가 포기각서 쓰고 집으로 갔지만 그러기엔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각서 쓴다 하더라도 안 치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왠지모르게 들어서 치기는 쳤다. 예상대로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고, 풀 수 있는 것도 하나도 없었지만 왠지 다 찍고 자기엔 쪽팔려서 열심히 푸는 척 했다. 그 짓도 몇 분이나 할 수는 없으니 결국은 OMR에 적당히 예쁜 모양이 되도록 마킹하고, 괜스레 페이지를 넘겨 고2 때 제2외국어로 공부했던 독일어나 몇 개 풀어보려 애써 보았다. 2004년 수능 독일어는 정말 쉽게 출제되어서 지금도 몇 문제쯤은 맞출 수 있었는데 2010년엔 그렇지 않았다. 결국 그래도 시간이 남아 엎드려 잤다. 잠이 안 왔지만 고개 박고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종료 종 치고 시험지 거두고 감독관이 모두 확인한 후 퇴실해도 좋다고 말할 때까지 왜 그리도 시간이 길게 느껴지던지 모르겠다. 




 거의 뛰다시피 수험장을 떠났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부모님이 중국요릿집에 데려다주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은 딴 곳에 박혀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M모 사이트에 접속했다. 의외로 컴퓨터로 가채점하는 방법을 몰라서 한참 헤맸다. 제일 불안한 수리 나부터 채점하기로 했다. 92점. 한 문제는 계산 실수고 다른 한 문제는 풀이 자체가 잘못되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채점해 보았다. 결과는 동일했다. 운 좋으면 1등급도 나올 수 있는 점수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서 충분히 대박이다. 1 더하기 1을 실수해서 6문제 7문제 틀리고 70점대 점수 받지 않는 것만 해도 천운이다. 

 고함지르고픈 생각을 억누르고 언어를 채점했다. 막상 어렵다고 느낀 문제보다는 애매하다고 느낀 문제를 두 개 틀렸다. 외국어는 97점 이상은 나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었다. 사탐이 걱정이었는데 거의 만점 아니면 하나씩 틀렸다. 국사는 3등급 턱걸이할 수준까지로 오르긴 했지만 좋은 점수는 못 되었었고(중간에 공부를 포기하면서 근현대사 관련 부분을 거의 공부 안 했던 게 제일 큰 문제였다. 빠짐없이 다 틀렸으니.) 아랍어는 채점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종합해보면 언수외에 사탐 3과목이 1등급이니 여태껏 친 모든 모의고사와 수능을 통틀어 가장 잘 친 점수였다. 서울대야 물 건너갔지만 연고대 웬만한 과 정도는 문제없이 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야. 나도 운이 좀 따라주는구나 하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의심도 좀 들었다. OMR 마킹 다 한 뒤에 OMR 카드 보면서 수험표에 가채점용 답안을 옮겨적고 난 뒤 확인까지 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부실한 인간에겐. 언제나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고로 지금 기뻐해선 나중에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경험해본 적이 있잖은가. 부모님조차도 내 성적을 믿고는 싶지만 믿어도 될까 하는 눈치였다. 

 성적 발표날까지는 주로 그런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 물론 입시 관련 인터넷 사이트도 열심히 뒤지고 M모 사이트 사장이 하는 입시설명회 가서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부당함에 대한 장광설을 듣기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1년 동안 살 많이 붙었다. 젠장.) 맛있는 것도 먹고 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성적 발표날에 모교 찾아가서는 원서 접수날처럼 양말발로 더러운 마룻바닥 위를 걷는 대신에 자신있게 구석의 신발장을 열고 귀빈용이라 표시된 슬리퍼를 꺼냈다. 진로상담실에서 명부에 내 이름을 서명하면서 심장이 잔뜩 쿵쾅거리는데, 내 것을 찾기 위해 성적표를 뒤적이던 선생님이 내 성적표를 주기 전에 한 번 슥 보고는 한 마디 던졌다. 학생 공부 잘하네 하고 말했다. 긴장한 마음에 그럼 대체 얼마나 잘해야 정말 잘하는 거죠? 하고 따질 뻔 했다. 낚아채다시피 성적표를 받았다. 

 의외로 나는 성적표에 표준점수하고 백분위, 등급만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성적표 받아들고도 이게 원점수로는 얼마나 차이난다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성적 같아 보였고, 사실 나중에 집에 와서 대조해보니 가채점한 것하고 단 1점의 차이도 없었다.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사하고 제2외국어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서울대 중하위권 정도는 턱걸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좀 남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히 과욕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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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과 변화

 

 

 
많은 사람들이 다짐을 합니다.

 

 
"오늘부터 담배를 피지 말아야지"
"10kg 감량을 위해서 아자아자!"
"K대를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오늘부터 수능 480점을 향해!"

 

 
짧은 세월을 살아온 저이지만,
전 아직까지 
그런 말을 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뀌더라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 많이 봤을 뿐입니다..

 

 
물론 수많은 자서전, 합격수기 등에서는
'그날부터 달라졌다' 라고 회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변화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당사자가 자신의 과거를 미화시킨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원대한 결심으로 인해 자신이 달라진 것처럼 기억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억에 남는 특정한 사건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다보니.. 생기는 오류입니다.


 
사람은 설령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하더라도
변화했다는 사실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순간은 흘러가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합니다..

 

 

 
제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전 재수시절을 회상하여 말할 때도 '9월부터가 전환점이었다' 라고 말하지만,
그 순간을 전 전환점이라고 인식하지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그저 변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만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 뿐인데
그것이 진짜 변화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자책과 희망

 

 

 
 
 
수많은 학생들이 자책을 하며 상담을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희망이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방학을 허무하게 보냈는데, 지금부터 달라지면 될까요?"
"왜 이렇게 살아온 지 모르겠습니다."
"성적이 나쁜데, 지금부터 하면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지나온 세월에 대한 후회로,
또는 자책에 대한 반발심에서,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상황에 대한 조급함에서,
완벽한 변화에 대한 희망을 저에게 묻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급격한 변화를 하려는 마음가짐은 위험합니다.
 
만약 자신이 변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고
결국 변화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게 되어,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됩니다.
 

 

 

 

 
 
 
 
 
 
 
강요와 폭력

 
 
 
 
아무리 좋은 변화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자학입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남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전 예전에 있던 집단에서 경영자라 하는 사람이
'당신은 내가 3개월동안이나 독설을 섞어가며 그렇게 말했는데도 하나도 안변하냐' 하며
다른 사람에게 심한 말을 섞어가며 책망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3개월만에 바뀔 수 있을까요?
신체적인 손해만 가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것 역시 폭력입니다.
마음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사람은 그런 윽박지름이나 억지 자극으로 한순간에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내면에서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꺼낼 수 있도록 부드럽고 위압적이지 않게, 장기적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자연과 성장
 
 
  
 

 
자연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볍씨를 뿌린 후 내일 벼가 자라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볍씨는 적절한 영양분과 함께 온갖 풍파를 겪고 자신에게 주어진 성장의 시간을 지나온 후에야 여문 벼로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람 역시 자연의 섭리를 따릅니다.
사람은 절대 한순간에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자신의 의지력으로 우리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스런 성장과 깨달음 안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억지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변화는 억지 자극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불타다 없어지는 촛불과 같습니다.
변화하기를 마음먹고 행동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하루하루 행동을 통해 아주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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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수능 치는 사람들이 한번 봐줬으면 좋겠음





난 청주대 다녔다

근데 그냥간건 아니고 재수해서 간거였다



가고 나서도 맨날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창피해서 친척집엔 가지도 않곤 했다

대학 오티 같은건 가지도 않아서 아싸였고

일주일도 안되서 슬슬 학교수업도 빠지기 시작했다


정말 말그대로 21살이 될때까지 한게 아무것도 없었음




어느날인지 정확히는 기억 안나는데,

눈 존나게 오던 3월이였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여태 허송세월로 허비해온 시간들과

어떻게 살아나가야 될지 막연할 뿐인 현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흘러만 가고있는 인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여지껏 난 특별한 새낀줄 알았는데 말야.


자퇴하던날 마지막으로 교실에 들어온 나에게 학우였던 이들이 한 말들..

'공부 안하다 나중에 보스캥거루처럼 되고 싶냐'고 떠들고 다닌다는 전 담임선생..

자퇴한 날로부터 한마디도 말을 해본적 없는 아버지..

재수시절 수능 전날에 컴퓨터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시던 어머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밖에 없는 과거의 날들을 생각하면서

난 집에 들어가기 전 소주 한병을 들이켰다

그리곤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지




난 다음날 묶고 다닐 정도로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지난 인생에 대한 반성과

마지막으로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냈어

그리고 다음날부터 학원에 들어갔지

2010년 3월 말이였다





그때부터 하루 13시간정도의 시간을 학원에서 보내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공부했더니

뭐 하급반이였지만

2달 안가서 반에서 1등을 하게 되더라고.
 
평생 해본적도 없었던 1등을 해보니까

노력하는 만큼 보답해주는 이 공부란 것에 대해 재미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6월.. 9월..

계속 날들이 지나가면서

점수는 계속 올라갔고,

슬럼프를 겪는다던지

공부에 대한 싫증을 느낀다던지 하는 일이 없었던 나는

별 문제없이 수능날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수능날.

이미 2번이나 봤던 수능이였는데

이번에야 비로소 긴장되고 떨렸다
 
정말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오늘 내가 노력해온 것들이 보답받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뭐 곧 시험은 시작됬고..

시간은 느낄새도 없이 흘러갔음





지금도 의자에 앉아서 생각하면 그 삼수시절이 꿈만같다.

게임하고만 얽혀온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줄이야

수능이란 시험을 겪으면서
 
단순한 성적표 이외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무언가를 얻은것만 같은 기분이다




정말 공부 하라는 말이 틀린말은 아닌거 같아

공부를 시작하면서

학교도 자퇴했고

게임밖에 모르던 21살 별볼일 없던 놈이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잖아

학교를 자퇴한 새끼가 언젠가 학교선생을 하게 될 처지가 되었다니 정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임.
.
.
.




너희들도 언젠가 느끼겠지만

교육청에서 성적표를 받고 

하늘을 보면서 집으로 걸어올때 느껴지는 그 기분은

정말로 진정하게 노력해온 사람만이 만끽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번 후회없이 공부해봐

닌 레알존나시발멋지게성공할수있다고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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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야 뭐 사캬형처럼 감동적인 계기나, 목적을 가지고 공부해온 것도 아니고
성적이 극적으로 향상된 케이스도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날보고 도움되는 사람 있을까 싶어서 수기 써볼게

중학교

사실 나는 물론 어렸을때부터 물론 상위권에 속하는 학생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1등만하는 그런(지금 내가 입학한 대학의 이미지에 맞는) 학생은 아니였어.
게다가 중학교 2학년 시절 흔히말하는 사춘기를 겪었어.

여자문제, 부모님과의 갈등, 게임중독 같은 것들 때문에 이미 남부럽지 않은 시기를 거치고 중3이라는
나이에 들어서게됬었지. 사실 우리 중학교가 그래도 이 지역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이 오던 학교라서
상위권은 나름 튼튼했어. 지금도 보면 그때 최상위권은 모두 서울대에 입갤해있어.

그런 애들 사이에서 나는 그냥 반에서 1등정도 하는 수준이였고 전교에서는 한 10등안에만 드는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어. 물론 객관적 입장에서 보기엔 잘하는 수치였지. 근데 중학교 그당시에는 내가
별로 성적이나 대학에 대한 욕심도없고 그냥 막연하게 의사를 꿈꾸던 시절이여서 내 기준에서 하는 얘기지만
내 성적에 비해 공부를 정말 안했던거같아.

성적은 실업계나 겨우 갈만한애들이랑 놀았고, 그당시 공부를 안하는데 성적이 잘나온다고 학교에 소문이 났었으니
아마 내 개인적인 기준만으로 공부를 안한건 아닐거야.. 

그렇게 공부에 대한 욕심없이 지내다가 중3시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 3년동안 공부 잘한다 잘한다 소리 듣던 내가
전교1등한번 못해보고 중학생시절을 끝낼 순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때 처음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해봤어.
아마 내 공부방법은 이때 확립된거같아. 도서관에 앉아서 문제집을 몇권이고 풀었지..

그리고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왔어. 중3 2학기 기말고사 중간고사를 모두 전교1등으로 졸업했어. 
졸업당시 성적은 전교 6등이였지 아마 이게 내가 고등학교 가서 공부를 하게된 계기가 아닐까 싶어.


고등학교 1학년

고등학교에 입학할때 성적은 전교2등이였어.
나름 우리 고등학교가 시내에서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만 모이는 고등학교라서 내가 2등을 했다는게 
신기하고 꽤나 자랑스러웠어. 

그리고 자만에 빠져서 공부를 안했지. 1학년때는 공부한 기억이 수학공부밖에 없어. 수학공부도 딱히 수능을
겨냥하고 했다기보단 그냥 수1까지만 끝내보자 라는 생각으로 정석책을 공부했지..

그리고 가끔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얘기하는건데 나는 절대 선행을 빠르게 한 타입은 아니였어.
고1 들어오기전 겨울방학에 10-가,나를 공부했을 정도니깐.. 내 생각에 선행은 빨리했다고해서 좋은것도 아니고
늦게했다고해서 나쁜것도 아닌거같아.

어차피 뭔가를 배운다고해도 계속해서 접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되는게 당연하거든. 만일 선행을 해도 고1때 수1이나 수2를
계속해서 공부할 자신이 없다면 그냥 고1들어가기전에 고1꺼 정도만 해두고 이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물론 선행을 더 앞서서 했다면 계속해서 잊지않게 복습해주는거 잊지말구

이런식으로 고1이 지나갔는데, 신기하게도 모의고사 공부한번 한적 없었던 내가
1학년 모의고사에선 모두1등급을 맞았어. 기본적으로 중학교때 쌓아놓은게 있어서 그런지 별 무리가 없더라구.

그리고 1학년때는 내신공부는 시험 2주일전부터 시작했는데, 중학교때도 그랬지만 난 수업을 열심히 듣는 타입이기보단
뒤에앉아서 열심히 자는 타입이였어.. 그리고 1학년때는 자만에 빠져서 시험기간에 피시방다니면서 카오스하느라고
내신이 썩 좋은 편도 아니였지.. 그러다가 1학년 기말고사때 수학시험을 봤는데 이때 내가 평생 상상치도 못했던 점수를
맞았어. 78점이였지. 

태어나서 수학을 70점대로 맞아보긴 처음이였어. 수학 시험공부는 살면서 해본적이 없었는데, 다행히 1등급은 나오긴 했지만
70점대를 맞았다는거 자체가 내겐 큰 충격이였어. 그때부터 수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지

고등학교 2학년

충격적인 점수를 받은 이후로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학교 보충교재부터 손을 댔어. 학교에서 하는 수업은 안듣고
보충교재를 수업시간에 혼자 풀어나가기 시작했지. 그렇게 해서 보충교재를 모두 푸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어.
그리고 학원을 다니면서 학원에서 주는 문제외에도 선생님께 문제를 더 달라고해서 엄청난 양의 문제를 풀기 시작했지.

그리고 개념은 항상 정석(기본,실력)으로 다졌어. 뭔가 특별히 이로운점을 느꼇다기보단 그냥 정석을 많이 푸니깐 나도
정석을 풀었고 정석이 개인적으로 내 맘에 들기도 했고.. 그리고 이때 딱히 수학공부법이라고 할게 없는게, 그냥 말그대로
정석풀고, 문제지풀고 이렇게 공부했거든..

그런식으로 진도를 수2까지 뺐어. 그런데 이때 정말 수학이라는 학문에 빠지게 되었어.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면서
putnam, imo, kmo, 등등 여러가지 경시대회 문제를 혼자 풀어대고, 나가지도 않을 경시대회 책을사서 풀고..
심지어 대학교 수학 학부서적까지 빌리거나 사서 보곤했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게 내 수학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시간낭비였다고봐. 개인적으로 후회하는건 아니지만
후배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하면 '수리 가형이나 잘해라'이렇게 말해주고싶어..

그리고 저런 학습위주의 수학을 해서 그런지 문제풀이에서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어.
바로 '실수'야.

수학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부분인데, 정말 이때부터 실수가 날 괴롭히기 시작했어.
수리영역에서 공부를하면서 그때까지 모르는문제는 단 한문제도 없었어. 그치만 그게 틀린문제가 한문제도 없다는 뜻은 아니였지
이건 고3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해볼게

그리고, 고2때까지 딱히 외국어공부를 특별히 한적은 없는데, 나는 TEPS를 준비했어.
고3되기전까지만 공부하려고 했던 TEPS라서 단어를 좀 무식하게 외웠는데, 내가 단어외우는 방법은 이랬어
하루에 딱 외울양을 정해. 나는 300개였어. 이걸 수업시간이나 짬짬이시간에 계속 외우면서 다외웠다고 생각된
단어는 포스트잇에 적어서 책상위에 붙여놨어(뜻은 말고 pneumonia 이렇게 단어만) 계속해서 접할 수 있게. 
그렇게 해서 다음날 학교에오고 포스트잇을 다시봐서 단어를 모두 아는 포스트잇만 책상에서 뗏어.
만일 확실하게 안외웠다면 포스트잇만 늘어나고 점점 힘들어지니깐 확실하게 외워야 되는거지. 이렇게 한달을 하니깐
거의 10000단어를 외울 수 있더라고

그리고 다른 영역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L/C는 반복과 꾸준함 만큼 좋은게 없어. 매일매일 55분씩 듣는거야.
시험전날까지. L/C는 들으면 들을수록 오르고 영어를 듣는데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시험은 쉬워져.
그리고 R/C는 항상 시간을 재고 문제를 푸는연습. 만일 점수가 700이 안된다면 기본기를 먼저익혀. 문법공부와 독해공부. 그때는
시험시간에 맞춰서 문제푸는게 아니고 한문제 한문제 꼼꼼하게 해석해야될때야. 그 이후부터는 실전같은 문제풀이.
책은 그냥 How to teps로 공부했고.. 

그리고 항상 모든 시험에 있어서 중요한건 실전과 같은 연습이라고 생각해.
수리 영역은 수리를 보는 시험이지 절대 수학을 보는 시험이 아니야. 수학을 잘하는사람 ≠수리를 잘하는사람 이라고 생각해.
물론 Teps도 마찬가지고. 항상 시간에 맞춰서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해야되. 이게 가장 중요한거야. 공부를 열심히 하기만 한다고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게 아니고 그때 그 분위기에 맞춰서, 시간에 맞춰서 평소에 푸는 연습을 해두어야 시험장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고2때는 공부량이 많은 편은 아니였어. 이때가 제일 틈틈히 시간을 많이써서(?) 놀았는데,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야자, 보충 다튀고 쓸모없는 기타과목수업이 많은 목요일 같은경우는 매일 점심시간에 땡땡이치고
피방가고 그랬어.. 대신 그 외에시간은 확실히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였지.

고등학교 3학년

난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좆같이 보냈어. 독서실을 끊어놓고 엄마 핸드폰에는 독서실 문자를 스팸차단해놓고(문자열차단)
내가 번호를 바꿔서 보내면서 자유자재로 독서실을 드나들었지. 그렇게 겨울방학을 보내고보니
고3 모의고사에 들어와서 꽤나 충격적인 점수가 나왔어. 그게 수리였어. 아마 2갠가 틀렸었을거야..

그때부터 내가 내걸은 모토는 실수와의 싸움이였지. 이때부터 실전과같이 수리영역푸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어
100분을 딱 내걸고 긴장되는 분위기속에서 매일매일 하나씩 모의고사를 풀었어. 그리고 내가 실수를 하게되는 사고방식이 어떤건지
공책에 다적어놓았어. 예를들어 ●정적분할때 밑끝을 계산안함.. 이런식으로 말이야

흔히말하는 오답노트는 아니구, 내가 스스로 찾아낸 공부방법이라고 해야되나.. 이렇게 한달 하고나니깐 내가 자주 틀리는
부분과, 내가 문제가 있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어. 신기하게도 실수를 하는 건 몇개의 포인트에서 자꾸자꾸 반복되고 있더라구.
그리고 내가 찾아낸 주된 문제점은,

'문제를 꼼꼼히 읽지 않고 푼다'

라는 점이였어. 이건 대다수의 학생들도 아마 나와같은 입장일 거라고 생각해. 나는 문제를 몇가지 수치만 보고 쉭넘겨서
이게 어떤문제다 내 멋대로 파악해버리고 바로 풀어버리는 타입이였어. 그래서 꼭 조건을 빠트리거나 내멋대로 문제해석을
해서풀었을 때가 있곤 했거든.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고친 습관이 '모든 문제를 밑줄치면서 읽는다'였어. 밑줄치면서 그냥
생각없이 읽는건 절대아니고, 조건에 동그라미 쳐가면서 밑줄치면서 읽었어.

그리고 몇개의 포인트를 항상 시험시작전에 유념해가면서 그 포인트를 놓치는 유형의 문제가 나오면 긴장하면서 풀었어.
이런식으로 실수를 고쳐나가면서 나중에는 넘겨가면서 푸는 문제집있잖아? 그걸 푸는데 10회 모두 만점을 맞고 그런적도 있었어.
물론 수능전까지 실수를 적는 노트는 계속 써나갔지.

그리고 언어영역 공부에 관해서인데, 나는 3년동안 언어영역 2등급이 나와본적은 없어. 그런데 3학년와서 안정적인 점수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가 그때 공부한 방법은 이래.

먼저 내가 모의고사를 풀고 틀린영역을 구별해서 체크해둬. 예를들어 비문학과학/비문학사회/고전시가/... 이런식으로 영역별로
몇개의 문제를 틀렸는지 기록해. 그렇게 기록하다 보면 분명히 자기가 약한 부분이 있어. 그럼 그부분의 문제집을 사다가 (시중에 영역별문제는 넘쳐)
푸는거야. 그렇게 보완하고 또 보완해. 그리고 기본적으로 기출문제집(난 2번풀었어)이랑 EBS문제집 푸는건 잊지말구.

그리고 외국어영역은 계속 1개 틀리거나 다맞는 수준이다 보니깐 그냥 기출에 EBS몇권으로 되더라구..

과탐은 인강들었어. 과탐인강은 꼭 들어. 내가 3학년 들어가서야 인강을 처음 듣기시작했는데(시작이 백인덕), 과탐 인강만큼 좋은게 없더라구.
과탐 공부를 물론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인강을 들으면 포인트를 집어주니깐 훨씬 공부하기가 쉬워. 모르는 길을 가는거보다 
어느쪽으로 가라고 가르쳐주면 가기 더 쉽잖아. 과탐이 그 영향을 다른 과목보다 많이받거든. 과탐은 그렇게 기출풀고 인강만 들어도
1등급 나왔어 나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6월모평때 좋은 점수를 맞았어. 이건 인증한적있으니깐 찾아보면 나올거야..
그런데 여기서 또 자만한게 실수였어. 자만하고 이때부터 다시 카오스의 시작이였어..카오스 악마의게임이야 카오스때매
조지는애들 정말많다.. 이때 애들이랑 PC방다녔는데 (어메이징PC방이라고 있어..) 어메이징PC에서 도원결의를 맺었지..
우리는 다른날 다른시에 태어났으나 한날한시에 이 PC방에서 나가기로.. 

그리고 9월 결과는 처참했지.. 9월모의평가 하루는 충격으로 그냥 집에서 하루종일 누워있었어.
그치만 좌절하지는 않았어.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런생각을 했어. 독기를 품고 그 다음날부터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을 정했지.
기상시간 6시반에 취침시간 2시반쯤... 흔히말하는 4시간자고 풀공부, 고승덕모드에 들어갔어. 아마 내 인생에서 공부를 열심히한건
이때뿐일거야. 그 전까지만해도 놀면서 공부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이때부터 내가 공부안한다는 소리는 아무도 못했거든.

이때 내공부방식은 먼저 학교에 가기전에 문제집을 하나 정해. 그 다음 학교에가서 언어 1교시 시간이 될때까지 문제집을 
풀다가, 언어 1교시 종치는 시간부터 모의고사 시간표에 맞춰서 수능시험처럼 시험을 한번 보는거야. 하루에 한번. 이렇게 
과탐까지 풀고(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아침에 정한 문제집을 풀어) 그다음 문제집 1권을 12시까지 다풀어. 만약 문제집이
너무많으면 과탐은 안 풀때도 있었어. 이렇게 하면 하루에 1권 문제집을 풀 수 있고 그다음 집에가서 자기전까지 오답을해.
물론 학교수업은 하나도 안들었어. 이렇게 하기전에도 안들었지만..

이렇게 수능전날까지 거의 매일 안빠지고 이 패턴을 반복했어.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방향은 아니지만 지금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지 ^^
어떤 방향이던, 지금 내 결과는 내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해. 어떤방식이더라도 흘린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걸 다시한번 깨달았지.

모든 수기를 읽으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나도 이말에 동의해. 니들이 이 수기를 읽던 안읽던간에 정말로 니들이 깨닫고 바뀌지 않는다면 변하는건 아무것도 없어.
공부법은 내가 찾아주는게 아니라 니들이 찾는거야. 마이클 조던이 너희들한테 농구를 가르쳐 준다고 너희들이 프로농구선수가 될 수 있는게
아니잖아? 

중요한건 너희 자신이고. 수기를 읽으면서 나도 뭔가 변하고 나도 뭔가 노력해봐야겠다라고 조금이라도 생각한 사람있으면
이글에 댓글만 달고 얼른 컴퓨터 꺼서 공부해!

내일내일 미루다가는 정말 내일은 커녕 공부시작이 수능 일주일 전이 될 수 도 있어. 오늘부터 시작해
진정으로 땀흘려 공부한사람이라면 하늘이 절대 배신하지 않을거야. 너희들 대입에도 좋은 결과 있기를 빌게!
Posted by 박현수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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